#155화
"피, 피해요!"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모닥불을 덮쳤다.
"허억! 뭐야?"
"꺄아아아아!"
다들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나는 활을 들고 저쪽을 겨냥하며 신음했다.
"그놈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은밀하게 접근했지? 그 큰 덩치로? 하지만 이내 의문이 풀렸다.
"저런…."
"으악! 무서워!"
나무와 나무 사이로 머리와 몸을 밀어 넣고 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온 거대 원숭이는 김우태를 보자마자 그 큰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쿼어어어어어어!
"헉! 저놈이 나를 봤어!"
누가 봐도 김우태를 노리고 있다.
"형! 메뚜기!"
"으악! 온다!"
놈이 얼마나 빠른지 익히 알고 있던 나는 활을 쏘며 옆으로 피했다.
슉슉!
놈에게 날아가는 화살에 '기'가 맺혔는데 인내까지 더해져서 푸욱, 푸욱 놈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눈이 뒤집힌 놈은 화살 몇 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히이이익! 겁나게 크잖아!"
"도망쳐요! 형!"
김우태가 아무리 재생력이 좋아도 놈의 손아귀에 접혀 으깨지면 즉사다.
"으아아아아! 빠, 빨리! 메뚜기야!"
김우태가 메뚜기에 올라타고 비명을 질렀다.
푸드드득!
메뚜기도 원숭이가 무서웠는지 날개를 폈는데 이미 원숭이가 쭈욱 팔을 뻗고 있었다.
후우우웅!
그 팔이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은 우릴 소름 끼치게 할 정도였는데 간발의 차이로 메뚜기가 날아올랐다.
-으아아아악! 싫어! 싫다고오오오오!
메뚜기가 날아오르자 원숭이도 나무를 밟고 뛰며 김우태를 잡아채려 했는데 메뚜기가 속도를 높이자 원숭이도 미친 듯이 뒤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저쪽으로 멀어지는 메뚜기와 원숭이를 보며 나는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괜찮아요?"
"어, 어…. 저렇게 큰 건 처음 봤어. 무슨…. 산이 날아오는 줄…."
웬만해선 유쾌함을 잃지 않는 도화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간담이 서늘했던 모양이다.
"일단 메뚜기가 더 빠른 것 같긴 한데요…."
드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나무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원숭이는 닥치는 대로 나무를 부수며 김우태를 따라 달렸는데 저 기세면 죽을 때까지 추적할 것 같았다.
"오빠, 어떡해?"
"우리가 미션을 끝내면 돼요. 저 원숭이를 따돌린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니까…. 나중에 합류하도록 하죠."
나는 도화지에게 손을 뻗었다.
"여긴 발각됐으니까 이동하죠. 버틸 수 있죠?"
"으응. 근데 넌 저런 놈이랑 싸워서 이긴 거야?"
"저걸 어떻게 이겨요. 그냥 도망친 거지."
그레이트 웜도 그렇고 저 원숭이도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생물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가요."
"오빤 괜찮겠지?"
"강한 사람이에요."
메뚜기를 타고 날다 보면 우리보다 먼저 피라미드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속도를 더 높여야겠다.
"범아."
규우?
"네 힘 좀 빌리자."
우리가 아무리 빨라도 범이보다 빨리 정글을 누빌 순 없었다. 셋이면 힘들었겠지만 나와 도화지는 범이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어그로가 너무 강하네.'
지난 미션에선 스켈레톤들이 우릴 인식하지 못해서 김우태가 어떤 능력을 품었는지 체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여긴 본능밖에 없는 생물이 가득한 정글이었다. 작은 곤충이나 뱀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지만, 거대 원숭이는 부모님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김우태를 적대했다.
휙휙휙!
범이의 등에 올라타고 정글을 빠르게 이동했다.
'일단 거대 원숭이가 있다는 건 확인했어. 그러면 피라미드 안에도 작은 원숭이들이 있다는 건가?'
가봐야 알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김우태를 자유롭게 해주려면 미션을 끝내야 했다.
그렇게 우린 일주일 거리는 나흘 만에 돌파했다. 잠은 최소로 자고 범이에게 계속 생수를 먹였다.
이윽고….
"저게 그 피라미드구나!"
아침 무렵 우리 앞에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다.
"으음…."
"왜?"
"달라요."
"다르다고? 뭐가?"
"저건 저번에 제가 갔던 그 피라미드가 아니에요."
모양은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런데 곳곳에 뚫린 창문처럼 생긴 통로에 작은 원숭이들이 얼쩡거리는 게 보였다.
'장소는 다르지만, 패턴은 같다는 건가?'
어쩌면 그때 그 원숭이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뭐, 어느 쪽이든 그때는 내가 지금처럼 강해지기 전이어서 숨어다녔지만, 이젠 아니었다.
"들어갈게요."
"지금? 이렇게 갑자기?"
"쟤들, 약해요."
나는 범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여기까지 우리를 태우고 오느라 정말이지 고생 많았다.
이젠 내가 나설 차례였다.
우끼끽?
한 녀석이 저 위에서 나를 발견하곤 놀라 삿대질을 하려다가 가슴에 화살이 박혔다.
꾸익-!
【원숭이들이 원숭이 사냥꾼에게 겁을 먹었습니다.】
시야에 놈들이 걸리는 족족 화살을 쏘며 피라미드로 뛰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자. 김우태가 위험해.'
벌써 며칠째 거대 원숭이에게 쫓기고 있다면 심신이 매우 지쳤을 거다.
'하필이면 그렇게 빨리 만나다니.'
재수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일정을 빨리 소화하고 있으니 좋은 쪽으로 여기자.
끼이이익! 끽! 끼익!
밖으로 나와 얼굴을 내미는 원숭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카악! 꾸엑!
화살은 백발백중이다. 이제 내 활 솜씨는 각종 스킬과 경험에 의해서 거의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누나! 이쪽으로요!"
"응!"
빠르게 피라미드에 진입하면서 나는 속도를 늦췄다.
"어? 이거…. 돌이 아니네."
"기계 같죠?"
"응! 밖에서 볼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복도는 저번 피라미드처럼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첫 번째 문에 접근하자 문이 열렸는데 역시 남아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이 박살이 난 상태였다.
"참… 공들여 부쉈네. 이러기도 쉽지 않았을 건데."
도화지가 혀를 내둘렀다.
"부지런한 녀석이 있나 본대?"
"잘 찾아보면 멀쩡한 부품도 있어요. 그거 재능마켓에 가져가면 포인트로 바꿔줘요."
"아, 그래?"
이때 원숭이 한 마리가 문밖에서 우릴 봤다. 그러더니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도망쳐버렸다.
"네가 무서운가 봐."
"호칭 때문일 거예요."
전엔 왜 다 끝나고 이런 호칭을 부여해주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다. 2회차부터 강한 베네핏이 되는 거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확실히 전보다 편해졌어.'
내가 강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천년 지네 사냥꾼이란 호칭도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것들이 겹쳐서 내 존재감을 만들고 있는 건가?'
거대 원숭이에겐 먹히지 않는 것 같지만 자잘한 놈들이 귀찮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동하죠."
"응! 여기서 원숭이 왕을 찾으면 되는 거지?"
"네. 근데 그놈은 웬만해선 나오지 않을 거예요. 영리하거든요. 우리가 놈이 숨은 곳을 찾아야 해요."
킁킁!
도화지가 코를 벌름댔다.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데?"
"아…."
생각도 못 했다.
"다른 냄새를 풍기는 게 하나 있어."
도화지에겐 내게 없는 능력이 있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혹시 형 냄새는요?"
"너무 멀어졌어. 그 큰 원숭이 냄새는 기억해뒀는데 최소 며칠 거리야. 지금도 계속 멀어지고 있고. 우리랑 반대로 날아가나 봐."
"으음…. 일단 미션부터 해결하죠."
"그래!"
우린 냄새를 따라 피라미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원숭이들은 나를 피해 계속 도주했는데 방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마주치는 놈들은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었다.
"잘 도망가네."
"또 이동했어요?"
"응. 우리가 접근하는 걸 아나 봐."
도화지가 입술을 모으며 고민하더니 말했다.
"민준아."
"네?"
"그냥 우리 찢어지자."
"네?"
"원숭이들이 너 때문에 겁을 먹고 안 와. 이럴 바엔 내가 범이랑 가서 왕을 잡을게. 여기에 강한 놈도 없잖아."
그건 그렇다. 도화지의 방어력을 뚫을 수 있을 만한 공격력을 지닌 원숭이는 없다.
"네가 날뛰어줘. 그러면 그 녀석도 당황할 거야."
"몰이사냥을 하자는 거죠?"
"응!"
"알았어요. 조금만 더 가면 홀이 나올 거에요. 거기서 헤어져요."
내가 경험했던 피라미드와 같은 건 아니었지만 구조는 정확히 같았다. 복도의 끝에 큰 홀이 있고 그 가운데 부서진 기둥에서 액체가 흘러나와 연못처럼 고여 있었다.
범이가 뛰어가더니 그걸 핥아먹었다.
"엥? 이거 먹어도 돼?"
"드링크에요."
나는 빈 병에 드링크를 담았다. 전엔 이런 여유가 없었는데 이거 한 병 한 병이 다 '대체 에너지 드링크'다.
'그냥 퍼가면 곧 효과를 잃는 것 같지만 빈 병에 담으면 완제품이 되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이거 상당히 좋지 않나?
'수호자의 돌을 여기에 써도 되겠는데?'
생수는 피로회복을 돕지만 공복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 에너지 드링크는 영양소도 있고 배고픔도 충족한다.
'아니지. 근본적으로 그놈을 해결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거대 원숭이가 머릴 스쳤다.
이 순간에도 그놈과 함께하고 있을 김우태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갈게요."
빈 드링크 몇 개를 채우고 일어났다.
"응! 조심해!"
"누나가 조심해야죠."
지금도 보라. 내가 올려보다 우릴 훔쳐보던 원숭이들 머리가 두더지 게임처럼 쏙쏙 사라져버렸다.
"한바탕 흔들어봐."
"네!"
계단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위쪽 원숭이들에게 화살을 날리며 일부러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치며 홀을 가득 채웠다.
'꼭대기부터 쓸고 내려오다 보면 놈이 숨을 곳이 없어지겠지.'
도화지는 냄새로 녀석을 추적할 수 있으니 어느 순간이 되면 잡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원숭이들을 몰며 쉬지 않고 계단을 빙빙 돌며 뛰었다.
'이쯤에서 한번 놀래줘 볼까?'
내 패턴을 학습할 수도 있으니 12층쯤 되는 곳에서 복도를 향해 훅-! 뛰어들었다.
우끼기?
우끼이이이이!
숨어 있던 녀석들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녀석들 사이에 망토를 두른 놈이 있는지 주시하면서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봤다.
'엥?'
몸집이 작은 녀석 하다가 방안에서 이쪽을 보며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었는데 녀석의 털이 분홍색이다.
'뭐야? 저건?'
내가 2회차를 거치며 수많은 원숭이를 만났지만 저런 털빛을 가진 원숭이는 처음 봤다.
쏘옥.
숨어버리는 녀석을 따라 나는 몸을 확! 뒤집으면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때 충격적인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공간 2572XX-157A에 입장하셨습니다.】
뛰어듬과 동시에 내가 들어왔던 문이 닫혔다.
【해당 문은 마스터키로 열 수 없습니다.】
"흐읍?"
얼마나 당황했는지 저쪽에서 멀뚱히 나를 보는 분홍색 원숭이를 보면서도 활을 쏠 생각을 못 했다.
【과거로의 초대(유니크) 미션이 진행됩니다. 미션 중엔 파티원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이, 이런?"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고갤 돌렸더니 분홍색 원숭이가 다른 문으로 도망쳤다.
【과거로 통하는 문으로 입장하세요.】
내가 시간을 끌면 김우태와 도화지가 위험하단 생각에 분홍색 원숭이를 따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