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54화 (154/277)

#154화

"그런 게 있어?"

"네. 일단 첫째로는 템빨이예요. 누나도 필라테스를 하고 있지만 저렇게 해서 스텟 하나 얻으려면 엄청 고생이잖아요. 그런데 아이템은 레어만 되도 스텟이든 뭐든 달렸거든요."

"그렇지!"

"위험도는 있지만, 필라테스보다 아이템을 구하는 게 더 빨라요. 우리도 제법 호흡이 잘 맞으니까."

"흐흐, 형님 덕분이 아니겠냐.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이번 일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번째는 드링크에요."

"어쭈?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동의 안 함?"

"합니다. 하하!"

만족한 듯 웃는 김우태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각종 드링크를 적절하게 쓰면 우리보다 강한 적도 상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당분간은 포인트를 벌면 다 드링크에 투자할 생각이에요. 소재는 계속 나오기도 하고 재능마켓에서 살 수도 있으니까."

"세 번째도 있냐?"

"네. 시간을 빨리 소비하는 거예요."

"그건 뭐 필라테스 하다 보면 후딱후딱 지나가지 않겠냐?"

"그렇긴 한데 여기가 꽤 넓잖아요?"

"그렇지. 이 위치에 이 정도 공간이면 월세로 할 때 이천만 원씩은 내야 할걸?"

"그렇게 많이요?"

"삼층까지 있잖아. 이걸 통째로 쓰고 있다고. 강남역 한복판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값비싼 혜택이었다.

"지금까진 왔다 갔다 드나들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가 우리 본부인데요."

"오! 집처럼 쓰자? 이거야?"

"오전 6시면 청소도 싹 알아서 되고 우리 마음대로 하루를 짤 수도 있어요. 생각하기 나름일 것 같아서요."

이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접근으로 보면 쉽다. 밖에 집이 있으니까 재능마켓에서 한 보름쯤 처박혔다가 나가면 '아, 힘들었다. 집에 가서 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반대가 된다면?

'군대처럼 보자는 거지.'

재능마켓의 세계가 집이고 가끔 외출이나 휴가를 나간다는 느낌으로 임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렇다 쳐도 쟨 고딩이라고. 한창때인데 여기 갇혀서 살자고 하면 좋겠냐? 친구들하고 떡볶이도 먹고 남친도 만나고 그래야지."

"저도 고딩인데요…."

"아, 그랬지. 근데 넌 친구 없잖아."

"형도 없어지고 있잖아요."

"얘가 표정도 안 변하고 아픈 곳을 찌르네? 난 인형만 버리면 언제든 인싸로 돌아갈 수 있거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잠시 아싸를 자처한 거라고. 이 숭고한 희생을 너라도 알아야지!"

"…시간을 빨리 소비할수록 우리는 많은 미션을 받을 거예요. 필라테스도 해야 하니까."

"이해했어. 그래서?"

나는 노트를 꺼내 김우태가 자고 있을 때 정리한 것을 보여줬다.

"와, 이건 언제 했냐. 너 고딩 아니지? 무슨 애가 이래?"

"…여길 보면요.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소모하면 매일 하층에 한번은 갈 수 있어요."

"매일…. 가자고? 농담이지?"

"퀸이 알을 낳았잖아요. 그 알에서 어떤 것들이 나왔는지 우리가 봤고요. 퀸과 로드가 비슷한 힘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로드도 어떤 일을 꾸미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은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없다는 거죠."

이전의 삶이었다면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는 건 지력+4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밖에 없어요. 우리가 해야 해요. 이번 위기만 넘으면 그때는 우리가 앞서지 않겠어요? 뭐가 넘어오든 우리는 숙련된 사냥꾼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오, 숙련된 사냥꾼! 그거 마음에 드는데!"

이때 도화지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나는 찬성."

"허얼, 넌 언제 깼어?"

"오빠 목소리가 그렇게 큰데 잠을 자겠어요?"

"아, 미안. 코까지 골길래 잠귀가 무딘 줄 알았지."

"코 안 골았거든요!"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계산해보면 다음은 누나예요. 여태까진 누나가 필라테스로 시간을 소모할 때 우리가 밖으로 나갔잖아요?"

"그렇지. 귀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으니까."

"근데 꼭 미션이 아니라도 여긴 기구가 많아요. 얼마든지 단련할 수 있다는 거죠. 가령 형이랑 저랑 스파링을 한다든지."

"너, 나한테 쌓인 게 많았구나."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다. 김우태는 훌륭한 상대다. 세계 챔피언을 데려와도 김우태만큼 맷집을 보일 순 없을 거다.

"누나의 경우엔 밀린 공부를 해도 되고요."

"싫어! 차라리 두더지 잡을래!"

"…뭐든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많다는 거예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래서 그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갈린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엔 그 반대였다. 더 많은 시간을 쓸수록 기회는 무한대가 된다.

"누나는 이번 시간을 다 쓰면 정글에 가게 될 거예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를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아요. 제가 동행하니까 어제처럼 숨겨진 뭔가가 등장할 수도 있고요."

"정글은 어떤 곳인데?"

"쉽진 않죠…. 벌레도 많고요."

"으으. 싫다. 벌레."

"엄청나게 커다란 원숭이도 있는데 그놈을 반드시 사냥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걱정하는 건 패턴이 바뀌어서 전혀 다른 전개가 되는 건데 이번에 부패의 주인을 보면 기본 미션은 동일할 것 같았다. 이렇게 정보가 하나하나 쌓여갈수록 우리에겐 매우 귀한 자산이 된다.

"제가 거기에서 쓸만한 아이템을 많이 얻었거든요. 같은 아이템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누나랑 형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도적템 말이지?"

"만능열쇠인데요…."

"그게 그거지."

도화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유리벽으로 뛰어갔다.

"아! 있다! 정글! 가자!"

【벌레 퇴치 팔찌: 파리, 모기뿐 아니라 독충에게도 영향을 발휘하는 귀한 팔찌. 가격: 17,000P.】

저 비싼 포인트를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잠깐 고민하게 되다가도 그레이트 웜 뱃속에서 모래와 함께 밀려들던 독충을 생각하면 유사시엔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필라테스 하면 살 수 있을 거야!"

김우태가 피식 웃었다.

"얼마나 했다고 했었지? 시간 내에 못 하면 팔찌 없이 가야 할 건데?"

"흐읍…."

도화지가 망치를 들고 저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얄밉게 혀를 내밀고 있던 두더지가 쏘옥 숨어버렸다.

"할 거야! 무조건 하고 만다! 내가! 한다면 하는 여자야!"

벌레든 뭐든 그녀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게 있다면 나쁠 건 없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웃다가 일어나서 김우태에게 말했다.

"우리도 움직이죠?"

"응?"

"해야죠."

"뭘?"

"대련이요."

김우태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

.

.

사이클을 유지하면 김우태, 도화지, 그리고 내 순서였다. 도화지는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체류 시간 안에 두더지 잡기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게 얼마나 눈물겹던지 김우태가 도와주려고 두더지를 발로 찼다가….

"이게 다 오빠 때문이에요."

페널티로 –1,000회가 되었고 김우태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 꿍할 성격은 아니었다.

"야, 내가 사줄게! 그 팔찌!"

"정말요?"

"그래! 이번에 나가면 그것부터 사준다!"

"오! 상남자!"

"하하하! 가오가 없겠냐! 포인트가 없지!"

한 공간에 계속 있다 보니 부쩍 친해지고 있었다. 도화지가 범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범이, 네가 증인이다? 나중에 오빠가 딴 말 하면 엉덩이를 콱 물어버려!"

규우!

범이도 이제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더해 오늘은 특별한 친구도 함께했다.

"야, 그쪽이 아니라고. 아휴, 말귀를 못 알아먹냐."

김우태가 메뚜기 목줄을 쥐고 있었다. 위급할 때 비행할 수 있는 메뚜기는 정글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보급품 상자에서 자질구레한 걸 수령하고 우린 밖으로 나갔다.

【미션: 원숭이 왕을 사냥하라!】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피라미드까지 가는 게 일이긴 해도 우리 스팩이면 원숭이들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좋아! 싹 쓸어버리자고! 하하!"

이 미션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들어왔기에 두 사람도 피라미드에서 뭘 해야 하는지 안다.

"헉. 더워."

"습해!"

하지만 백날 들어봐야 몸으로 체감 한번 하는 만 못하다. 정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끈덕지고 불쾌한 기분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야, 장난 아니네. 온통 나무야."

각자 보급으로 받은 정글도를 들고 가로막는 나뭇가지나 키 큰 풀을 쳐내면서 나아갔다. 이번엔 우리 장비도 좀 바뀌었다. 오늘 재능마켓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많은 물건을 사서 오피스텔 문 앞에 두고 한꺼번에 옮겼다. 그러면서 이해했다. '500만 원 벌기 미션'이 혹시 이렇게 외부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형, 그거 뱀이에요."

"허얼…!"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손으로 잡아 치우려는 김우태에게 주의를 주면서 나는 더 생각했다.

'내겐 이번이 두 번째니까 수호자의 돌을 또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차우산에서도, 설원에서도 그랬다. 무려 '레전드' 아이템인 수호자의 돌은 어쩌면 이렇게 두 번째 방문에 얻을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해서 수호자가 이쪽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지금까지 갔던 곳을 모두 확보하려고 했을 때 다섯 개가 필요해.'

이제 두 개니까 차곡차곡 모으면 언젠간 되지 않을까?

'여긴 현재까지 수호자의 돌을 쓸 이유가 없어.'

정글엔 많은 나무가 있다. 아마도 엄청난 희귀동물도 있을지 모르고. 근데 이런 일반적인 것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벌목해서 내다 팔 것도 아니지 않나?

'우선순위는 용암지역과 차우산이야.'

수호자의 돌을 더 확보할 수 없다면 아꼈다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써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쯤에서 쉴까요?"

"후…. 절반은 왔냐?"

"최소 일주일은 더 가야 돼요."

"진짜? 미치겠네. 어이가 없다. 어이가."

이마저도 내가 한번 경험해봤으니까 단축한 거다.

"그냥 내일부턴 메뚜기 타고 날아갈까?"

"우리 셋이 타면 날지도 못했잖아요."

"하나씩 실어나르면?"

"쟤가 그렇게 똑똑할 것 같지가 않아서…."

"네가 운전하고 둘씩 가면?"

"괜찮긴 하지만 남은 한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요. 여기 큰 원숭이 있어요."

나야 혼자 남아도 괜찮지만, 운전대를 김우태에게 맡기면?

'그 원숭이한테 어그로 끌려서 최악이 될 수도 있지.'

그렇다고 도화지가?

-꺄하하하! 신나! 지구 끝까지 가즈아아아!

생각한 순간 자동으로 고갤 저어버렸다.

화살을 한 움큼씩 빼서 불을 피웠다. 널린 게 나무라도 화살이 더 잘 탄다. 혹시 불이 번지지 않도록 주변을 치운 뒤 기름도 먹였다.

화르르르륵!

모닥불에 둘러앉아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야. 너 혼자 이걸 한 달 넘게 했다고?"

"그땐 그냥 살아야 했으니까요. 하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요."

도화지가 범이의 품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누웠다.

"와아…."

낮엔 전부 하늘이 가려져 있는 것 같았지만 밤이 오자 나뭇잎들 사이로 별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겹치지 않으려고 이 녀석들도 저렇게 간섭을 피하는 거다. 수십, 수백만 나무들이 모두다.

"예쁘다아…."

그렇게 감탄하며 모두가 긴장을 풀고 하늘을 올려보는데 눈썹이 꿈틀거렸다.

"…?"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저쪽을 봤을 때 뭔가 거대한 게 우릴 향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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