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하지만 이가 없어도 잇몸이 남는 법!
【주력이 증가합니다.】
"따라와라!"
양말에 담긴 스킬을 꺼내쓰며 나는 아까 저놈이 날아든 창문을 향해 뛰었다.
놈의 스피드와 나는 엇비슷했다. 녀석이 월등하게 빠르다면 당장 잡혀 죽겠지만 회피 기술과 순발력을 이용하면 얼추 피하며 거릴 벌릴 수 있었다. 본래 공격하는 쪽보다 방어하는 쪽이 도망치긴 쉬운 법인데 그걸 방해하는 유일한 페널티가 사방이 막힌 곳이다.
그래서 뛰어내렸다.
화르르륵!
【뱀파이어 날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서라! 이노오오오옴!
어릴 때 어떤 책을 본 적이 있다. 제목이 기억나질 않지만 그 책의 등장인물은 맹인이었는데 검객이었다. 그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저놈이 그러고 있다.
'날 어떻게 감지하는 걸까?'
땅에 내려서면서 위를 힐끗 봤다. 대전 안엔 수많은 기척이 있었다. 얼추 백이 넘어가는 스켈레톤 사이에서 놈은 나를 정확히 추적해내고 있었다.
'이크!'
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놈이 허공에서 휘두른 검을 따라 음습한 기운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급히 머릴 숙여 피했더니 뒤쪽으로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분명 허공을 베었는데 공간을 격해서 나를 공격한 바람이 있었다.
'내가 싸웠던 그 누구보다도 강해!'
이런 공격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어서 경험이 더 필요했다.
'스킬 효과가 남아 있을 때 최대한 거릴 벌리자.'
나는 기둥을 발로 차며 힘을 받아 몸을 날렸다. 구르고 뛰고 옆으로 다이빙하듯 놈의 공격을 피해내면서 계속 달렸다. 세 걸음, 다섯 걸음…. 조금씩 누적하면서 앞서나가던 나는 아까의 그 작은 정원으로 돌아와 있었다.
"…?"
"…!"
의자에 앉아 있던 스켈레톤 둘이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드리트리 경?
-무슨 일인가요?
연극이 깨지고 있었다.
'좋지 않은데.'
이 녀석들이 바보일 때 후딱 해치웠어야 했는데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습격입니다! 암살자가 있습니다! 놈이 근처에 있어요!
-아앗? 암살자라니요!
-아무도 없는걸요?
드리트리가 고함처럼 외쳤다.
-피하십시오! 어서요!
그러더니 내 쪽을 향해 검을 찔렀다. 거리가 상당했는데 놈의 검 끝에서 총알 같은 뭔가가 날아왔다.
"으읏!"
가까스로 허리를 옆으로 피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옆구리에 구멍이 뻥! 뚫렸을 것이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목이 잘려도 죽지 않고 검 한 자루로 총처럼 공격까지 할 수 있는 괴물이 있다니.
'과연 유니크 미션이라 이거지?'
오기가 치솟았다. 내가 그냥 당할까 보냐?
'시간을 벌어야 돼.'
벽을 밟고 뒤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활을 겨냥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건 드리트리가 아니었다.
피잉-!
화살이 날았다.
콰르르르륵!
회전하는 화살은 뼈까지 갈아버린다.
-꺄아아아아아!
흠칫!
드리트리의 몸이 멈췄다.
-왕비님!
명치에 박힌 화살의 힘 때문에 산산조각이 난 뼈들이 널브러지고 드레스가 걸레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죽지 않는다.
-암살자가 나를 공격했어! 아파! 내 팔이 어딜 간 거지?
주섬주섬 모은 뼈들이 달라붙었다.
"…."
아무리 하층이라지만 저런 식이라면 이것들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냐.
대애애애애앵!
대애애애앵!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입자다!
-비상! 비상! 암살자가 있다!
-경비병! 놈을 찾아 죽여라!
성벽 위에 얼쩡거리던 녀석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봤다.
.
.
.
왕은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책장을 밀었다.
그르르릉.
책장이 넘어가면서 아래로 통하는 길이 열렸는데 벽엔 빛을 내는 돌들이 박혀있었다.
그는 한달음에 지하로 내려가면서 외쳤다.
-후작! 어디에 있소? 후작!
몇 개의 방을 지나치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로브를 입은 스켈레톤들이 멍하니 서 있다가 그를 발견하자 머리를 조아렸다.
-후작은 어디에 계시냐?
-그, 그게….
-조금 전까지 여기에 계셨었는데….
스켈레톤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말을 더듬었다. 2천 년간 해오던 연극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쪽에서 낡은 로브를 입은 스켈레톤이 나타났다.
-침입자요!
-궁 안에 말입니까?
-그렇소! 드리트리 경이 막고 있는데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소!
-허어! 이거 큰일이군요! 어떻게 궁 안까지 잠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 누가요?
-그걸 모르니 답답한 게 아니겠소!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둘이 넓은 방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여기라면 안전할 것입니다.
방 안에선 여러 실험이 있었는지 사방에 그을음도 있었고 수상한 냄새도 났다.
-그건 어떻게 됐소?
-고문서를 뒤지던 참이었습니다. 지금까진 상당히 유력합니다!
-오! 그거 잘 됐구려!
후작이 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보잘것없는 돌처럼 생겼지만, 마법사들에겐 몹시도 진귀한 것이었다.
【수호자의 돌】
-일정 조건을 만족해야 발동할 것 같은데 강제로 조건을 발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한 마법진과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이라면 어떤 거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이제껏 해오던 일 아니겠소? 대를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겠지. 후작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암, 나는 모르는 일인 거요.
저 벽에 튀긴 피가 어떤 용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화였다.
-드리트리 경이 있으니 암살자는 곧 처리될 거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감행했다는 건 우리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누굴까요?
-공작가일 수도 있고 그 망할 엘프 놈들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우리에겐 좋지 않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후작이 수호자의 돌을 갈무리하고 부산하게 움직이자 왕이 의자에 앉았다. 피곤해 보였지만 흥분이 가시질 않는 낯빛이었다.
"…."
"…."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우태와 도화지는 눈으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데?'
'수호자의 돌이잖아요! 설마 저걸 이용해서 넘어가려는 걸까요?'
'2천 년간 멈춰있던 일을 이제 하려나 봐. 우리가 막아야 해. 이것들이 우리 세상으로 넘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영화 찍는 줄 알겠죠.'
'….'
도화지가 범이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저쪽을 주시했다.
'어떻게 할까요?'
'치자. 이놈들은 우릴 못 보는 것 같은데.'
'제가요? 오빠가요?'
김우태가 고민했다. 스켈레톤들은 어지간한 공격으론 죽지 않는다.
'저주는 먹힐까?'
'그럴 것 같은데요? 애초에 저주에 걸려서 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김우태가 인형을 들고 스윽 안으로 접근했다. 그가 노리는 건 후작이었다.
이때 왕이 움찔했다.
-후작, 느낌이 좋지 않소. 아무래도 놈들이 여기까지 온 모양이오.
-허! 암살자입니까?
-방비하시오!
-알겠습니다!
후작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뭉클!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갔는데 김우태가 폭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뒤로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오빠, 괜찮아요?"
"젠장…. 걸렸어."
"저 대왕 해골은 감이 좋은 것 같아요."
놈들의 방이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마법사가 문제야. 놈들이 수호자의 돌을 쓰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네."
"저긴 오빠가 방법을 찾아보세요. 저는 여기, 얼쩡거리는 놈들부터 해볼게요!"
로브 입은 마법사 스켈레톤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도화지가 망치를 들고 따라갔다. 한 놈의 뒤로 가더니 두 손으로 망치를 들고 힘껏 후려쳤다.
빠악-!
머리가 산산이 조각난 스켈레톤이 널브러졌을 때 다른 스켈레톤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습격이다!
-누구냐!
-어디 있는 거야?
【아르펠의 스켈레톤을 사냥했습니다.】
【3,000P를 얻었습니다.】
"오! 잘했어!"
"머리를 완전히 날려버리면 되는 것 같아요!"
"다 잡자! 이것들 포인트도 많이 줘!"
"네엡!"
도화지는 후다닥 뛰어다니며 스켈레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화살이나 칼엔 강해도 둔기엔 약한 특성이 있는 두개골이었다.
빠악! 빡!
그냥 머리만 날아가면 다시 붙일 수 있겠지만 도화지의 망치질에 가루가 되어버리니 복구조차 불가능했다.
"두 마리! 세 마리!"
도화지는 신이 나서 망치를 휘둘렀다. 놈들이 이쪽을 인식하질 못하니 이렇게 쉬운 사냥이 또 없었다.
그녀가 하나씩 스켈레톤을 줄여갈 때 김우태는 왕이 있는 방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마법이라는 건가. 전혀 들어갈 수가 없네.'
분명 눈에 보이는 건 없는데 어떤 힘이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왕과 후작은 저쪽에서 작당을 하고 있었는데 더 놔뒀다가는 수호자의 돌이 균열을 열어버릴 것 같았다.
'혹시?'
김우태가 인형을 내려놓았다.
【스킬: 꼭두각시 저주!】
'가라!'
인형의 등을 두드려주자 인형이 뚜벅뚜벅 방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풀썩 쓰러졌다. 강력한 마법력을 버티지 못하고 구속이 사라진 것이다.
'젠장!'
후작이 그걸 감지한 것 같다.
-놈들이 침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빨리 발동해보시오! 보물을 빼앗길 순 없소!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들은 어떻게 은신하고 있는 겁니까?
-모르겠소! 엘프들의 마법은 다양하니 꾀를 내었겠지!
-왜 이렇게 우리를 핍박한단 말입니까?
-남이 강해지는 게 싫은 거요! 이 위기만 지나면 우리는 최강의 왕국으로 거듭날 거요! 어떤 희생이라도 좋으니까 시작하시오!
왕과 후작이 서두르자 김우태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하지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에잇!"
그는 들고 있던 지네 고치를 던졌다. 그가 가진 가장 단단한 것이었고 후작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쩌엉-!
-허엇! 방어막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여긴 위험합니다! 대피하시지요!
뚫진 못했지만, 경각심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던 것 같았다. 김우태는 지네 고치를 집어 들고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방안으로 던졌다.
쩌엉-!
-제길! 드리트리 경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요!
-이미 발각됐으니 여긴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소! 앞장서시오!
후작이 밖으로 나오려고 지팡이를 들었다.
-뭔가 상당히 기분 나쁜 게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랬소. 사방이 온통 개똥으로 뒤덮인 것 같지 않소?
-강력한 정신계 마법을 같이 사용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뚫겠습니다.
고치를 든 김우태가 울컥하며 던질 준비를 하는데 지팡이에서 빛이 터졌다.
화악-!
폭풍 같은 기운이 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꺄아! 뭐얏!
저쪽에 있던 도화지까지 영향을 받을 만큼 강력했는데 출구를 향해 뛰어가던 후작이 반색했다.
-오! 드리트리 경!
왕궁에서 가장 강한 조력자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소!
왕이 말했다.
-보물을 노리는 놈들이 이곳까지 따라온 게야!
말을 하는 사이에 드리트리가 더 가까이 다가섰다. 후작의 마법과 드리트리의 무력이라면 탈출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스아아악!
드리트리의 검이 움직였다.
그게 왕의 머리를 정확히 뚫어버렸다.
"…!?"
"…!"
지켜보던 도화지와 김우태의 턱이 빠질 만큼 놀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