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꼭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근처에 있는데도 놈들은 제 할 말만 했다.
"왜요? 냄새나요?"
"…저 해골이 찬 칼에서."
"칼이요?"
"응."
도화지가 얼굴을 찌푸렸는데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드리트리 경께서 이번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어요.
-과찬이십니다.
-저쪽 세상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세상엔 몬스터도 없고 항상 젖과 꿀이 흘러넘친다던데.
'저쪽 세상'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흠칫했다.
"지금 뭐라는 거야? 저거 혹시 우리 쪽 말하는 거냐?"
"잠깐 들어보죠."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겠네요.
-고대 문헌에 따르면 다른 세계엔 미개한 인간들만 있다고 했습니다.
-좋아요. 출정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공작가는….
두 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설득할게요.
칼을 든 해골이 끄덕 머릴 숙이더니 물러났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잠깐만요."
20분쯤 기다렸다.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토벌에서 아주 진귀한 것을 발견하셨다고요.
-어머, 소문이 이렇게 빨리 났나요?
연극이 반복되고 있었다.
"…."
"…."
우리는 말없이 테이블을 보다가 아까 그 드리트리라는 해골이 또 나타나는 걸 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저 짓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김우태가 혀를 내둘렀다. 2천 년이나 이걸 반복했다는 게 어이가 없다.
"가요. 더 볼 것도 없겠어요."
"저놈은?"
김우태가 드리트리를 보며 물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날뛰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까 패스하죠. 언제든 다시 와도 여기 있을 것 같은데."
"그러네."
드리트리가 나왔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복도에 시녀복을 입은 스켈레톤이 막대를 들고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먼지라도 털어내는 걸까?
나는 그걸 보면서 말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던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 같아요."
귀부인들은 차를 마시고 경비병은 경계를 한다. 시녀는 일을 하고 있었고 왕궁은 냉기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비슷해…."
"네?"
도화지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때, 로드의 성에 갔을 때도 시녀들이 이랬어.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우리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공격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와자작,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은 유지되고 있었다. 놈들이 돌변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빨리 찾아서 나가야겠어.'
그렇게 복도를 걷는데 범이가 옆으로 몸을 돌려 뛰었다.
"아앗! 범아! 막 돌아다니면 안 돼!"
도화지가 그런 범이의 뒤를 쫓았다.
"야!"
나도 급히 범이의 뒤를 따라 뛰었는데 범이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훅훅-! 이동하더니 한 곳에 멈췄다.
그리곤 얼굴을 비볐다.
"…어?"
"…에엥?"
얼어붙은 키 작은 나무에 범이의 털이 달라붙었다. 비비적대던 범이는 혀로 나무를 핥기까지 했는데 그래봐야 두꺼운 얼음에 혀만 시릴 뿐이었다.
【하층 은행나무를 발견했습니다. 하층 은행나무 열매는 강력한 독성과 약성을 모두 가졌습니다. 열매가 익을 때 나는 냄새는 고양잇과 동물을 매혹합니다. 열매를 가공하면 다양한 마법 재료로 쓸 수 있습니다.】
"호오…."
이런 걸 두고 득템이라고 하던가? 일단 재료 수집망 말고 삽을 꺼내 들었다.
"왜?"
"떠가려고요."
"통째로?"
"금방 해요."
언 땅도 내 삽질이면 문제없다.
파파파파팍!
난도질당한 땅은 나무뿌리를 드러냈는데 나무가 기울기 시작하자 나는 수집망을 썼다. 사실 이게 될지 안될진 나도 모른다.
【동사한 하층 은행나무를 수집했습니다.】
【동사한 나무는 특별한 방법으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좋아."
나는 아쉬워하는 범이의 머리를 손으로 만져주며 웃었다.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규우우웃?
얼굴을 갸웃갸웃하는 범이를 뒤로하고 우린 다시 걸었다. 은행나무가 꽤 귀한 것이었는지 한 그루밖에 없었다.
"하, 난 언제 이런 집에서 살아보냐."
"한국에선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성의 규모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컸다. 복도도 많고 방도 셀 수 없었다. 이걸 다 뒤질 순 없을 것 같아서 큰 복도를 중심으로 잡고 깊은 곳으로 걸어가는 중인데 도화지가 또 냄새를 맡았다.
"저기야!"
"예압!"
중간중간 시녀를 마주쳤지만, 이들은 우릴 의식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시녀는 허리를 숙이고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강한 저주라니.'
이들이 단순히 얼어 죽었다면 이런 모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조차 거스를 수 있는 무언가가 냉기와 함께 이들에게 깃들었다.
'그 매개를 찾는 게 미션인가?'
도화지가 자기 코를 손으로 만졌다.
"왜 이러지? 내 코가 얼어버렸나?"
"방해하는 뭔가가 있어서 그럴 거예요. 여긴 여기만의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런가?"
킁킁.
코를 벌름대던 그녀가 팔을 쭉 뻗었다.
"오오! 저거!"
열린 문은 거대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샹들리에는 어떻게 매달려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크고 화려했다.
"예쁘다아…."
위를 바라보며 걷는 도화지와 달리 김우태는 나를 보며 말했다.
"많은데…? 들어갈 거냐?"
대전엔 수많은 스켈레톤이 양쪽으로 패를 갈라 서 있었고 길의 끝엔 거대한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저들을 자극하지만 않으면…."
밖에서 본 것들을 종합해보면 여기도 연극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우리 세계와 관련이 있다면 정보를 얻어야 했다.
"범아. 이리와."
아까처럼 범이가 또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서 녀석부터 챙겼다.
-우리가 왕궁을 비웠을 때 적이라도 몰려오면 방비는 어찌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더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 출정으로 이미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오른쪽에선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설의 세상을 찾았는데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전군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옳아요! 이제 이런 척박한 땅은 버릴 때가 됐습니다!
-차라리 온 국민이 다 이동하는 건 어떻습니까?
왼쪽에선 찬성하는 괴성이 크게 대전을 울렸다.
'저자가 왕인가.'
의자에 앉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멈췄다.
-우리가 찾았다는 건 다른 놈들도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보물을 발견하고도 빼앗길 수 있다는 얘기겠지. 나는 이주에 찬성한다. 침략이나 약탈이 아닌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 말에 곧장 반응하는 사내가 있었다.
-하오나 우리에게 그럴 병력이….
왕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뻗었다.
-병력이라면 있다. 너희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강력한…
이때 연극이 멈췄다.
"이놈들이 흑마법 어쩌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 건 보통 지하에 있고 그렇잖아?"
김우태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비밀공간이라던지."
도화지가 말을 받았다.
"맞아요! 영화에서 보면은 비밀문안에 음침한 녀석들이 모여있고 하잖아요!"
"그렇지! 그 비밀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 않아? 어쩌면 보물창고라던지!"
"오오! 보물이요?"
"설마 이만한 왕국이 보물창고도 없었겠어?"
"우와, 그거 찾으면 우리는 부자예요?"
"당연!"
"오빠, 빨리 찾아봐요!"
"하하! 내가 촉이 좀 있지! 딱 기다려! 찾아줄 테니까!"
둘이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나는 그 분위기에 탑승하지 못했다.
"…."
내 시선은 왕에게 가 있었다.
'뭐지? 이 느낌?'
모든 스켈레톤이 멈춰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꼭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스켈레톤은 안구가 없다. 당연히 눈동자가 없으니 시선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감각은 부정할 수 없는 익숙한 것이었다.
꿈틀!
이때 내 눈썹의 일부가 움직였다. 위기를 감지하는 더듬이가 작동한 것이다. 이게 발동한다는 건 그만큼 좋지 않은 일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었다.
스윽.
왕의 얼굴이 살짝 돌아갔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략자구나.
"…?"
"…!"
"아앗?"
왕이 팔을 뻗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눈을 떠라!
왕의 음성이 앙칼지게 터지자 멈춰 있던 스켈레톤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놈들의 눈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며 서로의 몸에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고 턱을 딱딱 움직이며 파르르 떨어대기도 했다.
-이런 답답한 놈들! 드리트리! 거기 없느냐! 드리트리!
"형!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나도 봤어! 튀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우리가 몸을 돌리려고 했는데 얼음처럼 단단하던 창문이 깨지며 스켈레톤 한 마리가 난입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괜찮으십니까?
-누가 있다! 드리트리! 암살자일 수도 있고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드리트리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느껴집니다! 피하십시오! 놈들은 제가 막겠습니다!
-우리가 보물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
-네!
드리트리의 눈에 시퍼런 광채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움직였다.
콰앙-!
"…크윽."
"민준아!"
"괜찮냐!"
놈이 얼마나 빨랐는지 뛰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내 앞에 도달해 있었다. 활로 놈의 칼을 막긴 했지만, 그 힘에 뒤로 튕겨 나갈 정도였다.
-암살자라고!
-꺄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놈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스켈레톤들이 패닉에 빠져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형! 누나! 왕을 따라가세요! 거기에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 놓치면 숨어버릴 거에요!"
"너 혼자 괜찮겠어?"
"해볼게요! 어서요!"
새애애애애액!
이러는 사이에 또 검이 날아왔다.
카앙!
놈의 검에 활대를 휘둘러 쳐내며 옆으로 뛰었다. 내 힘도 무식할 정도인데 놈은 뼈밖에 안 남은 팔로도 그걸 상쇄할 만큼 강했다.
"알았다! 죽지 마라!"
"정말 우리만 가요?"
"그게 녀석을 도와주는 거야!"
김우태가 왕의 뒤를 따라 뛰어가자 도화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동했다.
나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드리트리를 떨쳐내려고 스켈레톤 사이에 뛰어들었다.
'이놈들은 나를 보지 못해. 저 드리트리라는 놈만 내가 있는 곳을 짐작하는 것 같은데…. 모습을 본다기보다는 존재감을 포착하는 방식인가?'
2천 년 묵은 해골과 정면으로 붙어선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생전에 강했다는 증거겠지.'
스아아아악!
놈의 검이 또 날았다. 내가 막 뒷걸음질 치려는 찰나였는데 그걸 포착하고 공격한다는 건 감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냥 당할만한 수준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다.
스윽.
성체를 뒤로 빼자 내 앞에 있던 다른 스켈레톤의 목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투욱.
떨어진 머리가 또르르…. 굴렀다. 그런데 머리 없는 몸통이 쓰러지질 않았다.
-아악! 아파!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프다고!
떨어진 머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안 죽어….'
이 싸움, 쉽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