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내 뒤로 붙어!"
순간적으로 김우태가 지네 고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퍼억-!
날아온 게 고치에 맞아 튕겨 나갔다.
"허억-! 저기다! 저게 쏜다!"
성의 3층쯤에서 창문 뒤로 뭔가 얼쩡거렸다.
새애애애애액!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화살이에요!"
나무로 만든 화살이 아니었다.
'꼭 뼈를 깎아 만든 것 같은데?'
저렇게 생긴 화살은 처음 봤다.
위력이 상당해 보였지만 지네 고치를 뚫진 못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고치를 여기까지 가져오지도 않았을 거다.
팅.
고치에 막혀 화살이 떨어지자 나는 그걸 냉큼 집어 들었다.
【뼈화살(레어)을 얻었습니다.】
【뼈화살: 뼈로 만든 화살. 마법력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화살로 알려져 있다.】
레어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대는 적이 성에 있었다. 뼈화살은 앞을 뾰족하게 갈아 만들었는데 시위에 걸 수 있게 뒷부분은 홈이 파여 있었다.
"뛰자! 으아아아아아!"
김우태가 돌진했다. 든든한 방패 덕분에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는데 모든 화살 공격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거칠 게 없었다.
"형! 화살이 닿지 않는 곳까지만 가세요!"
"알았어!"
팅팅팅!
고치 방패에 맞아 떨어지는 화살을 주워가면서 나도 김우태의 뒤를 따랐다.
'화살이 빠르진 않아.'
나도 활을 다루니까 안다. 뼈화살은 그저 시위의 힘만으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정확도도 그리 높지 않아서 절반은 옆으로 빗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눈먼 화살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아자자자자자자!"
김우태가 성벽으로 붙었다. 그러면서 고치 방패를 위로 들었다. 각이 나오지 않는지 화살이 멈췄는데 우리도 김우태에게 다가가서 벽에 나란히 몸을 붙이고 섰다.
"봤냐?"
"네! 이상한 놈이 있어요!"
"뼈밖에 없던데?"
나와 도화지가 말하자 김우태가 인상을 썼다.
"아니, 내 활약을 봤냐고. 이런 걸 영상으로 찍어뒀어야 하는 건데! 크으. 일억뷰 짜리라고!"
아쉬워하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방금 본 적의 모습을 떠올렸다.
'스켈레톤? 그런 건가?'
활을 든 손엔 살점이 하나도 없었다. 얼핏 본 얼굴은 두개골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목과 어깨 또한 뼈밖에 없었다.
'활 자체는 위협적이진 않았는데…정면으로 들어가기엔 위험할 것 같단 말이지.'
안에 몇 마리나 있는질 몰라서 그렇다.
"누나, 형. 일단 정찰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려고?"
"저게 밖에선 안 열릴 것 같아서요."
성문이 가까이 있지만 굳게 닫혀 있다.
"그래서?"
"올라가야죠."
"엥? 이 벽을 올라간다고?"
나는 화살 두 개를 뽑아 들었다.
"지금의 저라면 할 수 있어요."
강철 촉 화살을 벽에 콱! 박아보았다. 암벽등반으로 다져진 데다가 근력과 힘이 인간의 범주는 아득히 넘어섰으니 혼자라면 가능했다. 혹시라도 추락하면 날개까지 있고.
"출발할게요."
화살로 콱콱 벽을 찍어가면서 훌쩍 몸을 띄웠다.
"와…. 스파이더맨이냐…."
"민준이 멋있다!"
순식간에 성큼성큼 올라가는 나를 보며 도화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홈이 많아.'
긴 세월 눈보라가 만들어낸 얼음벽은 울퉁불퉁한 곳이 도처에 있었고 그것들은 모진 바람에 견디며 견고하게 굳었다. 그런 곳을 공략해서 화살을 대각선으로 박아넣으면 쑤욱 몸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단순히 힘만 사용하면 금세 체력이 고갈되었겠지만, 그간 필라테스로 기른 순발력과 균형감각은 20미터 높이도 문제가 없었다.
'세 놈인가.'
일단 보이는 스켈레톤은 셋이었다. 일반적인 성이었다면 우리가 등장하자마자 우르르 놈들이 모였겠지만 저놈들은 각자의 자리만 지킬 뿐 드라마틱한 반응이 없었다.
성벽 위에 올라선 나는 자세를 낮추며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우리가 왔다는 걸 알아. 그러면….'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나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활을 들었다. 그리곤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그그극!
팽팽한 시위가 끊어질 것처럼 당겨졌다.
'일단 하나.'
가장 가까운 창문 뒤에 있는 녀석을 노렸다. 이런 저격을 자주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자신감은 충분했다. 게다가,
휘이이이이이잉!
엄청난 눈보라가 치고 있었지만 내겐 아주 특별한 스킬이 있지 않은가?
【바람을 무시합니다.】
피잉!
화살이 곧장 날아갔다.
퍼억-!
정확히 맞은 화살은 놈의 두개골을 뚫고 지나갔다. 그 힘이 워낙 강력해서 놈의 몸이 날아가며 사라졌다.
'맞았다!'
그런데 환희도 잠깐이었다.
'허얼….'
두개골에 구멍이 난 스켈레톤이 다시 창문에 나타나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죽일 수 없다는 건가?'
무려 유니크 등급의 미션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까다로울 것 같다.
'목을 잘라야 할까?'
왠지 다시 붙여서 살아 움직일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일단은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슉, 슈욱!
내 화살에 맞았던 스켈레톤이 뼈화살을 날려댔다. 그걸 피하면서 나는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활을 다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 바람과 놈의 위치, 촉의 각도만 봐도 나는 화살이 어디쯤으로 날아올지 바로 보였다.
'역시 정확도는 상당히 떨어져.'
내 옆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뼈화살을 빠르게 챙겨서 성문으로 뛰었다.
"땡큐!"
나중에 어떻게 쓸지 모르니까 알뜰하게 챙겨서 무한의 화살통에 저장했다.
빗장이 보였다.
그걸 풀자 쩌저적! 바람에 문틈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민준아!"
"해냈구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끄으으윽!
문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김우태가 고치 방패를 번쩍 들며 말했다.
"어땠어?"
"세 놈 있는데 제 화살에 맞아도 안 죽어요."
"흠, 방어력 승부인가? 내가 해결해야겠군."
고치 방패까지 든 김우태가 든든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서로에게 통하지 않는 공격만 주고받아서는 싸움을 끝낼 수 없다.
'그 뭔가를 찾아서 부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막 안으로 들어온 도화지에게 물었다.
"누나, 느껴지는 거 없어요?"
"응, 아직."
서울 전역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모른다는 건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게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놈들, 정상이 아니라서 안쪽으로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저기 분수 쪽으로 돌아서 가요."
"앞장서!"
화살이 최대한 닿지 않는 각도로 뛰며 우리는 분수를 지나쳤다. 오래전 이곳은 정원이었을 것 같다. 꽃이 피었을지도 모르고 새도 날았겠지만, 지금은 오직 얼음과 눈밖에 없었다. 이런데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저 기둥으로 돌아갈게요!"
무려 2천 년이라고 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붙박이처럼 한 자릴 지키던 놈들은 우리가 성에 들어왔어도 자릴 뜨지 않았다. 멀리서 픽픽 화살만 날려댈 뿐이었는데 건물 내부로 들어오자 그마저도 멎었다.
"이거, 묘하게 존심 상하는데? 저것들 왜 저래?"
한바탕 드잡이를 할 줄 알았는데 놈들이 싱겁게 굴자 김우태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저주를 받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
나는 기둥에 붙어서 저쪽을 보다가 말했다.
"형. 바짝 붙으세요. 여긴 창문이랑 사각이 많아요."
"알았어."
외부정원에서 이어진 실내정원이 나타났다. 당연히 너무 한그루도 없었지만 공간 형태를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곳을 보며 멈췄다.
"…."
"…."
"허…."
기괴한 장면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
.
.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장미가 그 특유의 매혹을 한껏 풍기고 있었고 아름다운 정원 중앙엔 고풍스러운 원목 티테이블이 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두 여자가 예쁘게 미소 지으며 서로를 보고 있었다.
두 시녀가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는데 시녀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번 토벌에서 아주 진귀한 것을 발견하셨다고요."
차를 홀짝이며 마리안느가 물었다.
"어머, 소문이 이렇게 빠르게 났나요? 저도 오늘 아침에나 들었는데요. 꼭 훔쳐보고 계셨던 것 같잖아요? 호호호!"
"볼 게 있어야 훔쳐보기라도 하죠. 호호호! 궁이 워낙 좁으니 자연스럽게 들렸을 뿐이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냉기가 풀풀 났다.
"음유시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세상이 정말 존재하나 보네요.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시죠?"
"우리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긴답니다."
"전쟁이네요?"
"그만한 힘은 충분하니까요. 평화도 너무 오래되었었고."
전쟁은 남자들이 한다지만 왕국에서 가장 강한 두 남자를 조종할 수 있는 두 여인은 기세가 대단했다.
"칼은 쓰지 않으면 녹이 슬죠."
"무뎌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병력은요?"
"오만으로 잡고 있답니다."
"오만이라면 정규군만으론 힘들 텐데요?"
"공작가에서 도와주면 충분하겠죠?"
"어머? 저는 이제 막 얘길 들었는걸요?"
"들었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둘의 시선이 얽혔다.
"아시다시피 우리 공작가가 변경의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어서 병력을 빼면 놈들이 왕국으로 기어들어 올 수 있어요. 그건 아시죠?"
"알죠. 하지만 그만한 희생을 치를 만큼 저쪽 세상이 매력적이라고 하던데요?"
"전설에 의하면 이죠?"
"네, 전설에 따르면요."
"확인되지 않는 일로 모험을 감행하자는 건가요? 만약 실패하면 왕국의 기강이 흔들리고 신뢰가 추락할 텐데요."
"그렇다고 해도 공작가가 같이 움직이면 반역을 꿈꾸는 작자는 없을 거예요."
너만 아니면 위기 시에도 왕국은 건재할 거란 얘기였다.
"…."
"…."
잠깐 말이 없어졌다.
'요 앙큼한 것이…. 끝내 흑마법을 연구한다는 걸 숨기고 우리 병력을 요구하네.'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흥! 백날 머릴 굴려도 너는 나는 넘어서지 못해.'
정치에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이었지만 곧 벌어질 일까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음?"
드레스 밖으로 노출된 살결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소름이 돋았다.
"한기가…."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안색이 별로네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소리와 동시에 몰아친 한파는 쓰나미처럼 왕궁을 덮쳤다. 피할 틈도 없었다. 오죽하면 치켜뜬 그녀의 눈이 채 감기기도 전에 앉은 채로 얼어붙었다. 세상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극저온의 냉기!
스으으으으으.
일차 폭풍이 지나자 추운 바람이 불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차를 즐기던 두 여인은 이렇게 뇌까지 얼어붙은 채로 아주 오래도록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 시간이 무려 2천 년이 넘길 줄은 두 사람은 꿈에도 몰랐다.
.
.
.
-그러니까 마리안느…. 이번은 양보하세요.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잖아요.
-왜 항상 당신은 양보만 하라고 하죠? 좋지 않은 습관이랍니다.
드레스를 입은 두 스켈레톤이 의자에 앉아서 대화 중이었다.
"으, 기분 나빠."
옆의 스켈레톤들이 주전자를 들고 그녀들의 잔에 차를 따르는 시늉을 했다. 물론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미친 것들은 재끼자."
김우태가 얼굴을 흔들며 돌아설 때였다.
-왕비님….
오른쪽에서 허리춤에 칼을 찬 스켈레톤이 나왔다. 화려한 갑옷에 망토까지 둘렀다.
철컥, 철컥.
-오! 드리트리 경!
"윽…."
놈의 등장에 도화지가 손으로 코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