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매우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늘었다.
'재방문할수록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
지네 고치를 버리러 온 것일 뿐이었는데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아니지. 아직은 마냥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순 없었다. 난이도를 모르니까 극도로 주의가 필요했다.
"뭐였어? 방금?"
"민준아! 비궁이 열렸대!"
도화지와 김우태도 이쪽으로 달려왔다. 범이는 눈밭이 신나는지 계속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는 이런 거 없었잖아?"
도화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갱신되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차우산에 갔을 때도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 갔을 때 내가 수호자의 돌같이 중요한 아이템을 놓쳤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반복해서 올수록 새로운 무언가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이걸 안 이상 앞으론 더 주의 깊게 봐야겠어.'
나는 김우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비들은요?"
"다 처리했어. 별거 아니더구먼."
"형이 강해서 그래요.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얼마나 떨렸다고요."
"하하! 내가 좀 하지!"
그가 어려서부터 몸을 단련한 덕분도 있겠지만 좀비라는 생물을 두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신력을 높이 평가해야 했다.
"다들 준비됐죠?"
내 말에 두 사람이 살짝 긴장하는 듯 얼굴을 끄덕거렸다.
비궁.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숨겨진 궁전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그렇다면 왜 숨겨져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접근해야 했다.
"일단은요. 우태형 미션부터 해결하고 찾아보죠."
"알겠어!"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부패의 주인이 우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쿠오오오오오오!
거대한 괴물을 앞에 둔 김우태는 우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턱을 들었다.
"저거냐?"
"네."
"훗."
김우태는 보란 듯 코웃음 치더니 그대로 전력 질주를 했다.
-워어어어어어어?
본래는 부패의 주인이 이성을 잃고 먼저 날뛰어야 하는데 김우태가 먼저 어깨로 태클을 시도했다.
퍼억!
무릎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버린 부패의 주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을 때 김우태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인형으로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대상이 시력 감퇴에 걸렸습니다.】
"…."
"…."
그 후론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도화지가 말했다.
"쟤가 원래 저렇게 약했었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기보단 우태형이 방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래요. 사람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힘의 절반 정도는 상대의 공격을 대비하려고 아끼는데 우태형은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무식하다는 말이잖아?"
"아, 뭐…."
괴물 위에 올라타서 인형으로 사정없이 때리는 김우태를 보고 있자면 아래 깔린 부패의 주인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1분쯤 지났을까?
【부패의 주인을 사냥했습니다.】
얼굴이 완전히 으깨진 부패의 주인이 절명하자 김우태가 씩씩대며 일어났다. 이미 페널티 미션을 수행하면서 꽤나 좋은 무기를 얻었던 그였기에 별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부패의 주인이 파란색 돌을 떨어내자 그의 눈빛이 변했다.
"아싸! 레어다!"
후다닥, 그가 아이템을 집어 들 때 나는 그에게 다가가 재료 수집망을 꺼냈다.
"목걸이네요?"
그 말에 도화지도 후다닥 달려왔다.
"우와! 목걸이? 나 줘! 오태 오빠! 저 주세요오오!"
한껏 관심을 보이던 도화지였는데 들려오는 메시지에 안색이 굳었다.
【부패의 해골 목걸이(레어): 재생력+1, 매력-2.】
"허업…."
도화지가 한걸음 물러났다. 아주 많은 해골들을 엮어 만든 목걸이는 그 작은 해골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이빨을 딱딱 부딪칠 것 같았다.
"달라고…?"
"아, 아뇨! 싫어요!"
일단 생긴 것도 기분 나빴지만, 매력이 –2나 깎이는 물건이었다.
"하아…. 그래도 뭐. 재생력이 붙었으니까 써야겠지?"
나는 부패의 주인을 수집망에 넣고 김우태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매력은 포기했잖아요."
"…안 했거든?"
김우태가 투덜거리며 목걸이를 착용했다.
"내가 언젠가 이것들 다 모아서 불태워버릴 거야."
일단 이렇게 김우태의 미션은 끝이 났다.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했고 소소하지만, 아이템과 포인트도 얻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형."
"응?"
"저기 봐요."
김우태가 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이미 냄새를 맡은 범이가 저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거인 것 같죠?"
부패의 주인이 죽었을 때 저쪽에서 작은 소음이 났었다. 원래는 없었던 작은 문이 생겼는데 아직 열리진 않았지만 희미한 빛이 그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햐, 넌 눈도 좋다. 언제 저걸 봤대?"
사방이 빙벽이라서 문 형태의 뭔가가 나타났다고 해도 얼핏 보면 모르고 지나칠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주의해야 해요."
도화지가 내 뒤로 바짝 붙었다.
나는 문을 향해서 걸어가며 주변을 보았다. 갑자기 바닥이 꺼져버리거나 천장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
뭔가 생각나서 우뚝 멈춰 섰다.
"왜?"
"이따가 그 지네 고치를 여기로 가져와야겠어요. 비궁이라는데 꽁꽁 숨겨둘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나가면 한동안 닫혀있겠죠?"
"오! 그거 좋네! 혹시라도 그놈이 깨어나면 완전 당황하겠는데? 나가지도 못하고! 큭큭!"
어쩌면 훗날 '비궁의 천년 지네' 같은 미션으로 재탄생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의 위협부터 없애버리는 게 중요했다.
"생각난 김에 내가 가져올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도화지가 뛰어갔다.
"도와줄까요?"
"아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녀가 떠나가자 우린 벽에 다가가서 최종적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안에 뭐가 있을까?"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면 좀비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부패의 주인이 살던 곳이었잖아요. 밖에도 좀비가 있고."
"근데 전에 무리가 사막에서 탈출했을 때 말이야. 한참 날아갔더니 차우산이 나왔잖아. 혹시 여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다음엔 메뚜기도 데려오자. 그 녀석, 하는 일 없이 사료만 축내고 있었는데 그렇게라도 써먹어야지."
내가 생각 못 했던 것을 김우태가 해냈다. 이래서 백지장도 맞들어야 한다는 거다.
'미션이 나와야만 하층으로 넘어오는 게 아니라 한번 오면 지역을 이탈해서 계속 다닐 수도 있다는 거야.'
전엔 '탈출'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우리의 성장'에 초점을 맞췄으니 더 많은 모험을 시도해야만 했다. 미션 해결만 생각하던 수동적인 플레이어가 이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길을 뚫는 능동적 자원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거다.
이러는 사이에 도화지가 돌아왔다.
김우태가 서둘러 고치를 받아들었다.
"작전은 짰어?"
도화지의 질문에 나는 생각해둔 것을 말했다.
"뭐가 나오든 일단은 각자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게 좋아요. 공식처럼 정형화 해버리면 오히려 당황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 범아! 나랑 같이 다니자!"
도화지가 범이의 목을 끌어안자 나는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손을 가져갔다.
스르륵. 힘을 주면 밀릴 것 같았다.
【비궁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메시지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궁(유니크)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유니크…."
레어 등급이었던 사막 지역에서 그레이트 웜을 만난 걸 생각해보면 유니크 등급이 어떨지는 예상조차 불가능했다.
"워…. 이거 좀 쩌는 거 아니냐?"
김우태가 말할 때 나는 도화지를 보며 물었다.
"괜찮겠어요?"
"나는 콜! 이번엔 예쁜 반지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할머니 치료약도!"
한결같은 도화지를 보면서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할짝이곤 손에 힘을 주었다.
까짓거, 유니크도 뭐고 이제 우리에겐 뒤가 없다.
그그그그긍.
육중한 것 같았지만 내 힘과 근력으로 문이 밀렸다. 드드득, 얼음 가루들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긴장감이 엄습할 때 뒤에서 도화지가 말했다.
"냄새는 안 나는데?"
닫힌 공간이 열리면 안에서 냄새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음 같은 거에 갇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뭐가 튀어나오든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언제든 활을 들 준비를 했다.
"뭐 없네."
"더 가야겠는데?"
우리 앞으로 복도 같은 공간이 주욱 나왔다. 외길이었고 넓었다. 번들거리는 빙벽이 우릴 비추고 있었고 우리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쿠웅!
【비궁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제 미션을 수행하기 전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하, 심장 떨리네."
【비궁(유니크)
2천여 년 전 고대 왕국 아르펠은 흑마법을 연구하다 대마법사 가드웬에 의해 영원히 녹지 않는 눈 폭풍에 갇혀버렸다. 아르펠의 흑마법사들은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을 지녔는데 자신의 육체를 직접 불사의 몸으로 바꾸는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장 떨린다던 김우태가 피식 웃었다.
"수작 부리다가 대마법사한테 처맞았다는 거네?"
참으로 깔끔한 요약이었다.
【아르펠의 흑마법은 매우 강력해서 수천 년의 봉인에도 힘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불사의 존재를 만들어냈다. 봉인을 찾아 파괴하라.
확정 보상: 50,000P
추가 보상: 유니크 아이템 및 소재.】
"워…."
김우태가 씨익 웃었다.
"오만 포인트란다. 흥미진진한데?"
오만 포인트면 스킬이나 완제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는 큰 액수였다. 거기에 유니크 아이템 확정 지급이라는 것도 엄청났다.
"이러니까 우리 꼭 현상금 사냥꾼 같지 않아?"
도화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렇게 긴장감 없는 친구들이 다 있나. '유니크' 등급의 위험성보다는 보상부터 생각하고 있다.
"후딱 하고 나도 템 좀 갖추자."
손에 든 인형을 흔들어 보이던 김우태가 앞으로 나설 때 나는 미소 지으며 선두에 섰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활을 들고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인내 스킬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얼음알갱이가 밟혀서 자박자박 소음을 냈다. 300미터쯤 걸었을 때 처음으로 환경의 변화가 나타났다.
"어?"
"우와…."
외부로 통하는 길이었다.
"저게 뭐냐…."
"예쁘다아아…."
반응은 갈렸다. 김우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도화지는 동화책에서 보던 걸 실화로 마주한 표정이었다.
"저게 그 비궁인가 봐요."
저 앞에 커다란 성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고풍스러운 성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외부가 전부 얼음이었다.
후우우우우우웅!
밖은 눈보라가 끊이질 않고 있어서 시야가 탁했다.
"일단…. 외관으론 보이는 게 없네요."
"들어가 봐야지."
"유리성 같아."
점차 가까워질수록 얼어붙은 성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었다. 눈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벌써 수북하게 쌓이는 범이의 등을 도화지가 손으로 털어주며 말했다.
"민준아."
"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범이를 썰매 같은 거로 커스텀 해도 좋을 것 같아!"
픽 웃으며 그것도 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새애애애애애액!
성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빠르게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