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건 시간과 죽음, 피가 흐른다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걸 거스르는 존재도 있었다.
피를 이용해 시간에 대항하며 죽음을 미룬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일족의 우두머리가 없으면 정상적인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계신다면 모든 권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퀸도 로드도 사라진 세상.
이곳에서 뱀파이어들은 더욱 강대해지고 있었다.
할짝.
남자는 손톱 끝의 피를 혀로 핥으며 만족스럽게 자신이 저지른 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어 있었다.
피부색이 검은 엘프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고 생동감 넘치던 나무들은 칙칙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루하군. 큭큭."
뱀파이어는 영원히 사는 일족이다. 그 무료한 시간을 이겨내려면 이런 자극이 항상 필요했다.
"쥐새끼들…."
그의 눈이 바닥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을 훑었다. 도망친 놈들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아직 냄새가 난단 말이지. 큭큭.'
숨은 놈들을 찾아 씨를 말리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두려움이 절망으로 바뀔 때의 그 순간을 그는 가장 사랑했다.
백작의 지위를 받은 지도 어언 100여 년.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곳으로 가기 전에 최대한 강해져야 한다.'
퀸과 로드가 사라졌다. 둘이 싸우다 죽은 게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모두가 흥분했다. 이들에게 최상층의 전설은 곧 천국이라는 개념과 비슷했고 그곳에 가면 젖과 꿀, 피가 철철 흘러넘친다고 했다.
"꼭꼭 숨어라."
그가 움직이며 웃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그분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니 그 전에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서야 했다.
"귀 끝이 보인다."
능글능글하게 노래하는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한때 번성했던 이 엘프 일족은 이제 모두의 놀림감이다. 귀를 자르고 악의 화신이 된 로드. 그 개인적인 힘은 강대했지만 그가 거물이 될수록 엘프들은 쇠약해져서 이렇게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가 몇 개의 나무를 돌며 안쪽을 살펴보았다. 숨어있는 놈이 갑자기 화살을 날릴 수도 있겠지만 그딴 건 상관없었다. 마법을 잃어버린 엘프 따위는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좀 더 걸었다.
그러다가….
"흐으음?"
그가 큰 나무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뭐지?"
나무 안쪽에서 어떤 마법의 힘이 느껴졌다. 푸르스름한 그 막은 과거 엘프들이 사용하는 쉴드 같기도 했는데 그 생각이 미치자 그의 입술이 더 붉게 물들었다.
"여기 숨은 것이냐."
그가 손을 뻗었다. 이 막 뒤에 뜨거운 피를 가진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으으으?"
훅! 빨려든 뒤의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뭐지?'
검은 엘프들의 마을이 아니었다.
그는 의식이 있었지만, 육체가 없었다. 진창처럼 붉고 보잘것없는 덩어리에 불과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의식이 세상을 보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은 불빛이 온 세상에 반짝이고 있었다. 시궁창 한 덩어리가 꾸역꾸역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엘프들이 수작을 부린 건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3시간쯤 지났다.
-와하하하하! 거봐! 내가 뭐랬냐?
-벌 받은 거지!
-그놈이 그날 죽었어야 했는데! 그게 아쉽단 말이지!
벤치에 모여 술을 마시는 학생들.
남자 다섯과 여자 셋이었는데 이미 술병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꺼억, 나 오줌 타임.
한 녀석이 무리에서 떨어졌다.
백작은 뜨거운 피에 이끌렸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움직였다.
솨아아아아아.
얼큰하게 취한 녀석이 산비탈을 보며 오줌을 쌌을 때 백작은 놈의 뒤까지 바짝 접근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놈의 몸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서, 설마 이곳이 최상층이란 말인가!'
붉은 오물 덩어리가 바르르 떨렸다. 감정이 그만큼 격해진 것이다.
'내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그분보다도 먼저 최상층의 땅을 밟았다. 심지어 바로 앞엔 싱싱한 육체의 인간도 있었다. 흥분과 환희로 정신까지 아득해졌다. 이제 놈의 몸에 닿기만 하면 된다.
'빌어먹을! 움직이라고!'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녀석은 바지를 치켜올리며 벤치로 돌아갔다.
'…제기랄!'
아쉬웠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아직도 저기엔 8명의 먹이가 있었다. 백작은 벤치를 향해서 꾸역꾸역 기어가면서 생각했다.
'호오, 꼭 남자일 필욘 없는 건가?'
모든 생물이 언젠가 한 번쯤은 했을 고민. 다음 생엔 남자로, 여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아닌가?
'왜 내 몸이 이렇게 됐는진 몰라도 이 또한 기회일 수도 있겠어.'
이제 10미터도 안 남았다.
'저 녀석이 가장 강해 보이긴 한데.'
-영준아, 근데 진짜 이대로 포기할 거냐? 그 자식, 밟아줘야지!
-그래! 그 XX가 아무리 잘 쳐도 약점이 있을 거야!
취해서 충혈된 눈으로 영준은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도화지, 그 X부터 처리하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 모든 일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어. 분명 둘이 아는 사이일 거야.
-듣고 보니까 그러네!
-맞아! 그 X이 호박씨 깐 거 아니야? 설마 둘이 사귀나?
-사귀면 더 잘됐지.
그 말에 남자애들의 눈빛이 포악하게 변했다. 학생으로서 절대 해서 안 되는 상상을 떠올리는 것이었는데 술기운에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 X. 치매 걸린 할머니랑 둘이 산다며? 차라리 지금 갈까? 기다릴 필요 있냐? 쳐들어가서 해버리자!
-맞아! 동영상 찍어두면 신고도 못 할걸?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술의 힘을 빌려서 말만 이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백작이 영준이의 발아래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것이다.
-너네 생각은 어때?
영준이가 여자애들에게 물었다.
-마음대로 해.
-우린 걔, 친구로 생각했던 적 한 번도 없어.
-동영상 찍으면 돈도 벌고 좋겠네! 그 X. 반반해서 껌뻑 죽는 아저씨들 널렸을걸?
영준이는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오케이!"
반쯤 남은 소주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셔버린 영준이가 크으! 병을 던져버리며 말했다.
"가자! 그 X. 조지러!"
남산 중턱 벤치에서 그렇게 아이들이 막 자릴 뜨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들은 갱생이 안 되네."
익숙한 목소리가 이렇게 소름 끼친 적도 없었을 거다.
"형, 저는 냄새 나는 것부터 처리할 테니까 형이 누나 좀 말려줘요."
"저게 아까 그 균열에서 나온 거냐?"
"그런 것 같아요."
민준이 벤치로 걸어갈 때 어둠에서 스윽 가로등 아래로 도화지와 김우태가 나타났다.
"헉…."
"저, 저 새끼가 또 여기엔 왜…."
"미친…."
"설마 우리 미행하냐?"
민준을 본 애들은 치를 떨었지만, 오늘은 그들의 상대가 도민준이 아니었다.
"도화지…."
"역시 우리 생각이 맞네! 너네 한 패였어!"
애들이 뭐라뭐라 떠들었지만 도화지는 망치를 들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 도화지의 팔을 김우태가 움켜쥐었다.
"그걸로 치면 쟤들 죽어."
근처에서 녀석들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처음엔 녀석들 중에 괴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도화지는 망치를 내려놨다. 악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했지만 그보다도 더 화가 나는 건 한때 친구였던 저 애들이었다.
"도와줄까?"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는 얼굴을 흔들었다.
"…."
"…."
아이들은 술에 취해 있었지만, 도민준의 등장으로 한번 정신이 들었고 김우태의 거구를 보며 또 한 번 머리에 찬물을 뿌린 것 같았다. 특히 김우태에게는 본능적으로 계속 시선이 갔는데 두려움과 싫은 감정이 뒤섞여서 토할 것 같았다.
"우왜애애애액!"
한 녀석이 참지 못하고 허리를 접었다.
도화지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영준에게 걸어갔다.
"나 여기 있어."
"…X발…."
영준이도 이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강남역에서, 한강에서도 모자라 남산에서까지 마주친단 말인가?
"해봐."
"…."
"해보라니까!"
미물은 본능으로 김우태를 공격할 때 목숨을 건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면 얘기가 다르다. 압도적인 피치컬을 보며 적대감을 가질 땐 마음이 얘기한다.
너, 그러다 죽어.
하지만 이 이중적인 마음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앞에서 도화지가 떠들어대는 대도 저 뒤의 김우태를 공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공황장애에 걸린 것처럼 든다.
동물은 이런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달려들지만, 정신적으로 고등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지에 놓인다. 버텨내거나, 붕괴하거나.
"우왜애애애애액!"
"시, 싫어어어어어어! 히이이이이익!"
토하는 애,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애, 혼절하는 녀석까지 있었다.
그걸 보며 도화지가 화낼 기분도 안 난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내가 한 게 아니야. 이게 문제지."
김우태가 인형을 들어 보이며 웃자 도화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와중에도 술을 마셔서 그런지 속이 뒤집힌 애들을 바닥에 엎드려 꺽꺽댔다.
"이런 놈들은 상대할수록 너만 손해야."
김우태가 도화지의 등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가끔은 모른 척할 때도 필요한 게 인생이다."
김우태가 씨익 웃으면서 인형을 던졌다.
"이번에 산 스킬이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한번 볼까?"
【스킬: 꼭두각시 저주(힐러 전용)
종속된 인형이 공격할 때 저주를 걸 수 있다. 저주는 인형의 능력에 비례하며 스킬을 사용할 때는 인형을 원거리에서 부릴 수 있다.】
"술 취해서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분도 못 하겠네. 쯧쯧."
김우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때쯤 영준이의 앞엔 이미 인형이 걸어와 있었다.
"이게 뭐…."
엎드려서 헛구역질을 하던 영준인 솜뭉치 같은 인형 팔이 자신의 얼굴에 날아오는 걸 봤다.
술도 취했고 경황도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던 영준이는 인형의 팔이 닿았을 때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걸 느꼈다.
퍼억-!
영준이의 몸이 옆으로 2미터나 날아가 처박혔다. 10cm밖에 안 되는 작은 팔에 담겼다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힘이었는데 정작 더 중요한 건 다음이었다.
【대상이 공포에 걸렸습니다.】
저주는 오래 지속될 수도 있고 찰나의 순간에 풀릴 수도 있다.
퍼억-!
두 번째 녀석이 인형의 발에 차였다.
"아아아악-!"
자지러지며 날아가는 녀석에게도 저주가 날아들었다.
【대상이 공황장애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 무서운 건 길든 짧든 저주가 무조건 걸린다는 거다.
퍼억-!
인형이 날아차기를 먹였다.
【대상이 섭식장애에 걸렸습니다.】
"으으으으…. 시, 싫어어어어! 저리가! 꺄아아아아악!"
야심한 밤에 가로등 밑에서 악마의 인형 같은 게 살아 움직이며 다가오자 애들은 그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이었다.
도화지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김우태를 바라보았다. 꿈에 나올까 무서워서 잠도 못 자겠다.
"내가 때린 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