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ㅋㅋㅋ
"큽…."
-미안해요…. 오빠. 나도 모르게 그만….
하마터면 나도 웃을 뻔했지만, 김우태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았다.
'미치겠네. 매력 아이템을 줄 수도 없고.'
김우태의 능력은 그 강한 어그로에서 기반한다. 그가 적의 시선을 붙잡아둘수록 내 화살이 놈의 뒤통수에 박힐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저녁에 봐요.
마지막 톡을 끝으로 집에서 나왔다. 학교에 그 일이 있는지 얼마 안 됐는데 내 체감으론 몇 달은 지난 것 같았다. 재능마켓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몇 년씩은 늙어서 나오는 기분인데 그간 아마도 사지를 건너면서 내 정신력이 성장해서일 거다.
교문에 다다르자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기자들인가.'
우리 학교 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기에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었다. 이런 큰일을 당했는데 벌써 학교에 나와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보다 더 극성인 학모부들은 아이들의 학업에 지장이 생기는 걸 더 우려했다.
"…."
운동장에서 본관 건물을 바라봤다. 화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끔찍하다.
기다리면서 나는 주머니 속 돌을 만졌다.
수호자의 돌.
무려 '레전드' 아이템이다. 이걸 얻었을 때는 너무 흥분해서 난쟁이 마을과 통하는 균열을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무엇이 더 내게 이득이 될지 계산을 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난쟁이 마을에선 달꽃 열매를 얻어서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는 드링크를 만들 수도 있고 빈 병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매력적인 것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용암지대의 어르신은 이곳에서 만들 수 없는 아이템을 제련하게 도와준다. 물고기 맛도 대박이었고….
'병아리를 데려오면 전투에도 도움이 되겠지.'
물론 그 병아리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가 문제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선생님들은 단상에서 부랴부랴 아이들을 확인했는데 얼마나 시달렸으면 다들 얼굴이 반쪽이었다.
"…."
나 때문에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지켰고 그 괴물들이 설치고 다녔다면 더 큰 피해가 났을 것이다.
'앞으로가 문제야.'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얘길 어제 했었다. 도화지는 로드가 넘어온 것이 확실하다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었다.
'놈들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최대한 우리는 우리를 감춰야 해.'
하층과 이곳의 시간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로드가 언제 넘어온 지 확인할 수 없으니까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이나 더 높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어.'
벌레가 들끓는 걸 보면 퀸이란 자도 넘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20분쯤 지나자 교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의 선배들은 항상 위기가 기회라고 말했었습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목격한 세대입니다. 학생 여러분도 혼란스럽고 힘드시겠지만, 이 또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일이니….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중에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살펴보는 습관이 들어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
'어, 어머니?'
어머니가 왜 저기 있는 거지?
마침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함께 극복하고자 몇몇 학부모께서 자발적으로 우리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봉사를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그저 머엉,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를 발견한 어머니가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놀랐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본관이 복구될 때까지 우린 원격 수업과 등교수업을 병행하면서….
1학년은 월요일, 2학년은 화요일, 3학년은 수목금요일에 등교해서 체육관에서 수업을 받는다.
'일주일에 하루만 나오면 된다는 건가?'
이건 내게 희소식이었다. 더 많은 외부활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긴급소집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머니께 달려갔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아까까진 아무 말도 없었잖아."
"호호호! 어제 연락받고 고민 많이 했는데 이게 맞을 것 같아서. 걱정 마. 급식 일 조금 도와주는 거야."
이번 일을 겪으면서 꿋꿋하게 이겨낸 사람도 있었지만 그만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때였다.
-어? 예원이다!
-예원아! 안녕!
-예쁘다! 우왕!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어오던 예원이가 나를 발견했다.
"미안! 빨리 온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
예원이가 어머니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누구?"
어머니가 놀란 눈치다.
"민준이 같은 반 친구예요! 진예원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 민준이한테 이렇게 예쁜 친구가 또 있네?"
또…? 라는 말에 예원이가 움찔했다. 그러면서 나를 묘하게 바라봤다.
"호호호! 그럼 엄마는 먼저 가게로 갈 테니까 천천히 얘기하다 와. 오늘도 독서실 가니?"
"으응…."
"그래, 예원이도 나중에 또 보자."
"네!"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예원이가 내게 말했다.
"바쁘니?"
"아니야. 괜찮아."
"그러면 나랑 나갈래?"
"그래도 돼?"
"아직은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가 아쉬워서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저녁까진 시간이 있었기에 예원이와 함께 번화가로 나갔다.
"힘들지 않아?"
거리를 걸으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미션을 할 땐 그렇게 치열했는데 예원이랑 이렇게 있으니까 평범해진 것 같았다. 이 평화가 너무도 낯설면서도 포근하다.
"재밌어."
"다행이네. 채린… 은?"
"여전하지."
채린에 대해서 이 정도로 끝낸다는 것도 대단한 거다. 생각보다 예원인 강한 애였다.
"민준아."
"응?"
"나, 어쩌면 콘서트에 나갈지도 몰라."
"콘서트?"
"응, 우리가 메인은 아니고 선배님 공연인데 같은 소속사라서 끼워주는 거야."
"아…. 잘됐네? 언젠데?"
"확정돼봐야 알겠지만 되면 다음 주 토요일!"
"그렇게 빨리?"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니까."
이쪽은 잘 몰라도 콘서트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건 안다.
"대단하네."
"채린 언니 덕분이지. 난 아무 힘도 없어."
"네가 있으니까 팀이 되는 거야."
팀이란 말에 김우태가 생각났다.
"혹시…. 나도 가도 돼?"
"당연하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는 형이랑 같이 가도 될까?"
"아는 형?"
"있어, 같이 체육관 다니는…."
"그럼! 되지! 확정되면 티켓 보내줄게."
"고마워."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라도 김우태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다.
예원이와 번화가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딱히 할 건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살인적인 삶을 살다가 이런 무료한 시간을 보내면 심신이 늘어지는 기분이다.
애써 이런 휴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예원이와 헤어져서 강남역으로 왔다.
문을 열었는데 땀 냄새가 훅! 풍겼다.
"어…? 벌써 와 있었어요?"
김우태가 바지만 입은 채 운동 중이었다.
"벌써는 무슨…. 38시간째다."
"아, 필라테스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좀 이상하다. 스쿼트나 팔굽혀펴기가 아니었다.
"…."
김우태는 방 중간의 원형 출발점에 섰다가 벽으로 전력 질주했다. 그러더니 어깨로 들이받는다.
퍼억!
"…헉…."
보는 내가 다 아프다.
"크으으으…. 8,311개!"
저게 무슨 필라테스냐….
"형, 괘, 괜찮아요?"
"어, 이제 할만해. 처음엔 죽을 것 같았는데 부러진 뼈도 다시 붙어. 강철 어깨 스킬도 얻었어. 이거 하면 고통 감소+1 준대."
오, 그건 잘됐는데?
"학교는 어떻게 됐냐?"
"당분간 월요일만 나가요. 나머지는 원격수업이고요."
"나, 안 쓰는 태블릿 있는데 줄까?"
"정말요?"
그게 있으면 어디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김우태가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어차피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더 강해져서 빨리 끝내버려야 하는 게 좋겠더라고. 너한테 민폐 끼치기도 싫고. 나도 어려서부터 운동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놈이야. 한다면 한다. 이제 재능마켓에 올인할 거야."
"형…."
"미안해할 거 없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나는 고독한 영웅이 될 거다. 원래 배트맨은 그래."
배트… 맨?
"어제는 생각이 정리 안 돼서 그랬지만 나도 속엔 이런 날이 오길 기다렸던 걸지도 몰라. 헬스장 카운터나 보는 것도 지겨웠었고. 아버지도 내겐 눈길도 안 주니까…."
김우태가 설움을 참으며 또 벽에 어깨를 들이박았다.
"큭… 흙."
고통을 참으면서 말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떳떳할 수 있게 다시 태어날 거다."
"혀엉…."
"말리지 마! 난 이제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나! 나의 길을 간다! 이 세상 사람들과 사회를 위해 살아갈 거라고!"
황소처럼 또 벽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보며 나는 쯔읍,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채린, 콘서트 한다는데…."
벽 앞에서 김우태가 우뚝 멈춰 섰다.
"뭐어? 팬클럽 공지엔 그런 얘기 없었는데?"
김우태가 무섭게 달려와서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언제?"
"다음 주 토요일에요."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서, 설마 둘이 연락이라도 하는 사이야? 그런 거냐?"
"아니거든요? 예원이한테 들었어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결정되면 티켓 보내준다고. 형이랑 같이 가려고 했죠."
"채, 채린 콘서트 티켓?"
김우태의 동공이 폭풍처럼 흔들렸다.
"근데 아직 모르는 거고 형도 재능마켓에 올인한다고 했으니까…."
그가 내 말을 뚝 끊었다.
"야."
"네?"
"여기서 나가면 나는 브루스 웨인이야. 배트맨은 이 안에서만이라고. 오해하지 마라."
"아니 조금 전까지는…."
"뭐? 내가 뭐, 뭐?"
김우태는 말까지 더듬으면서 옆을 봤다.
"근데 너 저건 어떻게 할 거냐?"
"아, 음…."
어제 데리고 나온 메뚜기가 방구석에 박혀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먹을 거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혹시라도 필요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데려오긴 했는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표범도 모자라서 메뚜기까지 키워야겠네.'
범이처럼 귀여운 맛은 없었지만, 저 메뚜기는 하늘을 날 수 있다. 이건 굉장한 장점이다.
'지푸라기라도 줘야 하는 건가?'
메뚜기가 뭘 먹고 살지?라는 어이없는 질문을 속으로 하면서 있는데 문이 열렸다.
"모두! 하이루!"
오늘도 경쾌한 모습으로 입장하는 도화지가 흠칫했다.
"오빠…. 꼭 옷 벗고 그래야 해요?"
인형이 아니었다면 김우태의 몸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벗고 설치는 사내였다. 매력의 영향이 이렇게나 무섭다.
"아으…! 짜증 나! 너, 여자니까 내가 진짜 많이 봐주는 거다!"
김우태가 벽으로 돌진했다. 그 옆으로 인형이 쪼르르 따라간다.
퍼억!
사정없이 들이박는 김우태를 보며 도화지가 입을 떡 벌렸다.
"왜 저래?"
"미션이래요."
"뭐, 저딴 미션이 다 있어?"
김우태가 우릴 보며 외쳤다.
"나는 하면서 들을 테니까 시작해!"
어제 방향을 정했다면 오늘은 구체적인 일정을 잡을 차례였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사용해서 단기간에 성장한다.'
이것이 1차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