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지리산,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산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모든 산은 같은 게 하나도 없고 높이부터 생김까지 다 다르다. 거기에 기후까지 겹쳐지면 자생하는 나무도 천차만별이다.
"저기로! 저기!"
저 멀리에 산이 보였다. 그리고 이때 내 머릿속에 뭔가가 스쳤다.
-메뚜기 다리보다 훨씬 맛있는 건 처음이야!
분명 그런 말을 한 꼬마가 있었다.
-자네는 모르나? 이곳을 벗어나면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네. 우리는 갈 곳이 없어. 그건 저 차우들도 마찬가지겠지.
촌장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차우산!"
점차 산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확신했다.
"차우산이잖아!"
하늘에서 보면 차우산은 사막 한복판의 오아시스 같았다. 오아시스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긴 해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기로 가자! 내려가!"
"뭔데?"
김우태가 물었다.
"제가 아는 곳 같아요! 저게 차우산이면 우린 돌아갈 수 있어요!"
직전에 내가 미션을 했던 곳이니 당연히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메뚜기다!
-아니야! 저걸 봐! 누가 타고 있어!
-허억! 거인이다! 그 거인!
내 기억 속 그 마을도 있었다.
'지척에 있었다니….'
거대 지렁이에게 먹혀서 한참을 이동했으니까 우리의 시작점은 상당히 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메뚜기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 다시 왔다.
"오오오오! 자네! 오는 방법을 찾은 건가?"
촌장이 버선발로 튀어나왔다. 여길 다시 올 수 있을지 나조차도 몰랐는데 기막히다.
메뚜기에서 내리며 나는 촌장에게 걸어갔는데 나와 함께 온 김우태를 촌장이 보며 말했다.
"큼큼, 자네의 친구…인가? 저렇게 기분 나쁜 친구는 처음이로군."
촌장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다.
-우와아아아앙! 저 거인은 무서워!
-싫어!
-차우보다 더 끔찍해!
-못생겼어!
"…."
작은 것들이 자길 보며 손가락질하는 걸 보면서 김우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서러워하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머리를 흔들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주곤 촌장에게 물었다.
"내가 다녀간 지 얼마나 된 거지?"
"사흘 됐네."
"으음…."
재능마켓에 가자마자 김우태를 만나 다시 미션을 시작했으니 저쪽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3일이 지났다고 한다.
'양쪽이 다른 거야.'
이걸 잘 이용하면 뭔가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모호하다.
"차우는?"
"자네 덕분에 성체는 없는 것 같으이. 우리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 촌장들도 자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네."
이 난쟁이들은 빈 병을 제작할 수 있기에 내겐 무척 소중한 존재다.
'하층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도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미션을 할 때마다 여길 종종 들어서 빈 병을 수거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이들을 협박하거나 강제로 노역을 시킬 생각은 없다.
인생은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 아니던가?
【미션 완료까지 3시간 39분 남았습니다.】
와르르.
가방 속 비상식량을 광장에 쏟아놓았다.
"오오오오오오!"
"맛있는 거다!"
"와아아아아아!"
온 마을 사람들이 다 튀어나와 만세를 불렀다. 미션이 3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겐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교역이라도 하는 거야?"
김우태가 말했다.
"내 거도 줄까?"
그 말에 촌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커허허험! 저자의 물건은 받기 싫다네! 괜히 먹었다간 배탈이라도 날 것 같군!"
"…."
김우태가 울컥하며 돌아앉았다.
-인형을 패고 있어!
-저렇게 끔찍한 인형은 처음 봐!
-역시 이상한 거인이야!
-기분 나빠!
큰 키와 우람한 피치컬, 강남에도 짐이 있을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이런 취급은 굉장히 서러운 것이었다.
'식욕도 이기는 저주인가.'
촌장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웃었다. 내가 내려놓은 초코바 주위로 삽을 들고 모이는 꼬마들은 벌써 입에서 침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니면 절대 이 세상에선 맛볼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데도 김우태의 것은 필요 없단다. 이 얼마나 강력한 거부감인가?
"덕분에 그날 이후로 병이 퍼지지 않았다네. 저쪽 마을 사람들도 다 멀쩡해졌고 혹시나 자네가 오길 오매불망 기다렸으니 한번 들러보게나. 자네가 준 귀한 음식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김우태와 함께 산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에 늑대인간이 있었어요."
"그런 게 진짜 있냐?"
"이걸 보면 뭐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내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는데 메뚜기가 우릴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하긴, 이딴 것도 있는데."
김우태가 자신의 인형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거의 끝났어."
옆 마을로 가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걸으면서 김우태에게 그간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해줬다. 혹시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고 재능마켓의 미션들은 작은 정보가 목숨을 좌우하게 한다.
"나가시면 뭐부터 하실 거예요?"
분위기도 환기할 겸 농담처럼 웃으며 물었다. 삼겹살에 소주? 아니면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어느 쪽이든 평소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더 소중해지는 법이었다.
"당연! 채린이 노래부터 들어야지. 아직도 저 메뚜기들 날갯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죽겠어. 귓구멍을 씻어내야 돼."
"…아. 네…. 그렇군요."
채린에 대해선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정상에 오르자 저 아래 작은 마을이 보였다.
"저기예요. 근처에 베이스캠프도 있고요."
"와…. 일 년은 지난 것 같네."
엄청난 모험을 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24시간도 안 됐다. 몇 달을 정글에서 보냈던 때와 비교하면 이건 내게 고난이도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겪는 김우태에겐 충격이었겠지?
【드링크가 숙성되었습니다. 재능마켓에서 수령하세요.】
"아앗?"
"왜?"
"형, 탈모약이 완성된 것 같아요."
"오! 그래? 빨리 가자!"
"어차피 시간 좀 남았으니까 저 마을만 들렀다가 가요."
우리가 접근하자 이미 마을에선 소란이 일었다.
-거인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차우 사냥꾼이야!
-그가 또 왔어!
조금씩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난쟁이들은 김우태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지만, 나에 대한 믿음이 워낙 절대적이었기에 전처럼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다.
이 마을에도 촌장이 있다.
"은인께서 이렇게 빨리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중년의 난쟁이는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기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마을 사람들도 뭔가 내게 자랑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댔는데 무심코 고갤 돌려보니 광장 중앙에 작은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하하! 범이도 있네?"
범이와 나를 구세주처럼 조각해놓았는데 이들이 병을 만드는 걸 생각해보면 손재주는 탁월할 것이다.
"그리고 이거…."
"음?"
촌장이 뭔가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에겐 아주 큰 물건이었지만 내겐 테니스공만 했다.
"차우 성체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마을 어른들이 한동안 차우산을 뒤졌습니다. 본래는 새끼 차우를 찾아서 박멸하거나 길들여보려고 했었는데 놈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더군요."
아마 박멸은 힘들 거다. 그러면 더는 미션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니까.
이때 문득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들은 미션 때문에 계속 여기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이런 환경에서 사는 이들을 궁극적으로 구해 내는 게 주된 목적인가?
'알아봐야겠는데.'
후자라면 몰라도 전자라면 너무 가혹한 운명이었다.
중년 촌장이 말했다.
"그러다가 발견했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챙겨뒀는데 뭔지 아시겠습니까?"
"이건…."
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템으로 변환이 되는 재능마켓 전용 돌이다.
'내가 흘린 게 있었나?'
그때 워낙에 정신없이 싸웠으니 회수하지 못한 게 있었을 수도 있다.
고갤 갸웃하며 돌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까만색의 돌은 처음 봤다.
'어?'
그래서 별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수호자의 돌(레전드)을 얻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초로 레전드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레벨이 큰 폭으로 오릅니다.】
"헉…!"
레전드?!
【수호자의 돌
하층에 존재하는 무척 귀한 돌. 균열을 만들 수 있다. 1회용. 균열을 이용해 수호자 포인트를 지정할 수 있다.】
"와…대박…."
내가 놀라서 입을 못 다물자 김우태가 뒤에서 물었다.
"왜? 뭔데 그래?"
"아무래도 우리…. 여기 자주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천으로 널린 달꽃과 빈 병을 만들 수 있는 난쟁이. 내겐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
.
.
후와아아아악-!
마법진에 빛이 터졌다.
"아? 아아아?"
도화지는 시녀의 손을 꽉 잡고 뾰족하게 외쳤다.
"뭔가 되고 있어요!"
강렬한 빛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가 일순간 소멸했는데 그와 함께 도화지와 시녀도 함께 사라졌다. 빛에 잡아먹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풍경이 바뀌며 시력이 돌아왔고 도화지는 주저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에에에?"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니?"
시녀가 없었다. 그녀 혼자 야산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그녀가 실비아의 손에 이끌렸던 바로 그 균열이 있던 장소였다.
"언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사라진 시녀에 대한 걱정이 몰아쳤는데 도화지는 벌떡 일어나서 산을 내려가면서도 주변을 계속 둘러봤다.
'왜지?'
분명히 함께 마법진에 있었는데 왜 시녀는 사라진 걸까?
일단 도화지는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민준이에게 전활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재능마켓에 있나?'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코를 벌름댔다.
'특별한 건 없는데….'
그녀는 시녀의 냄새를 기억한다. 시녀뿐 아니라 실비아와 괴물들의 냄새도 모조리 저장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들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민준이를 만나야 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건 재능마켓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거였다.
'죽지 않았다면….'
그런 최악의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지워버리면서 도화지는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리곤 서둘러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파티원이 재능마켓에 입장해 있습니다. 시간이 동기화됩니다.】
휙!
문이 열리자마자 범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범아!"
그르르릉.
범이도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런데….
민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이의 곁에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망치를 소환했다.
"아, 그게 나는…."
190cm가 넘는 거구에 우람한 근육.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성 벗겨진 머리는 몹시도 수상했고 그의 손에 들린 기괴한 인형은 그녀의 얼굴을 와락 찌푸리게 했다.
"변태! 괴물이구나!"
이건 김우태의 잘못이 아니다. 도화지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단어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