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미션 완료까지 11시간 37분 남았습니다.】
"형! 멈추지 마요!"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무조건 메뚜기를 때려죽이는 것밖에 없었다. 아직도 상공엔 까마득하게 덮인 메뚜기 떼가 구름처럼 떠돌고 있었고 바닥에 내려선 것들은 김우태를 향해 엉금엉금 기었다.
"하아, 하아, 하아…."
김우태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이제 메뚜기를 공격하는 건 이골이 났다. 이제까지 몇 마리나 죽였지? 300마리? 500마리? 확실한 건 놈들의 대가리에 인형을 한 방 꽂아 넣으면 박살이 난다는 거다.
파악-!
또 한 마리의 메뚜기가 죽었다. 그간 상처도 많이 입었고 물리기도 했지만 그의 재생력은 괴물 같아서 뜯겨나간 살도 금세 아물었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체력은 고갈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생수로 목을 적시며 버텨냈다. 그러나 정신에 누적되는 피로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는 어려서부터 싸움엔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력이 더 빨리 소모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김우태를 보면서 계속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형! 왼쪽으로 돌아요!"
죽은 메뚜기를 불에 던져넣으면서 내가 그가 있던 자리에 섰다. 그리곤 활을 쐈다.
슉슉!
김우태에게 기어 오던 두 마리 메뚜기의 미간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상황 자체가 나쁜 건 아니야. 오히려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훈련이 되고 있어.'
활을 계속 쏘면서 김우태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당황하던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살생'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거리낌을 가지면서 그 틈으로 공격받기 일쑤인데 이젠 그런 게 없었다.
'레벨도 잘 오르고 포인트도 쌓이고 있으니까. 오늘만 견뎌내면 김우태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등급이 레어인 미션이라서 고되긴 하지만 김우태 같은 초보가 급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거다. 거구인 그가 작은 인형이나 휘두르고 있는 게 옆에서 보면 웃기겠지만 인형을 이용해서 적을 공격하는 방법도 이젠 능숙해지고 있었고 메뚜기의 속도나 패턴을 파악한 건지 다치는 횟수도 부쩍 줄었다.
범이는….
-캬앙!
여전히 잘 논다. 처음엔 메뚜기 숫자에 질겁한 것 같았는데 이젠 놈들이 자기한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파악했는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면서 메뚜기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륵!
불길은 더 커졌다. 메뚜기를 죽이면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불이 꺼지면 안 되니까 주기적으로 모닥불에 던져넣거나 남은 놈은 곧장 수집망으로 회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메뚜기들이 바닥에 잔뜩 깔려서 우리가 움직이기 불편했다.
【축하합니다! 사막 메뚜기 400마리를 사냥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 벌써 그렇게 됐나?'
1분에 한 마리씩 죽여도 5시간이면 300마리밖에 사냥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400마리나 죽였다는 건 시간이 그 이상 흘렀다는 거다.
반짝, 반짝!
바닥엔 메뚜기가 흘린 작은 돌들이 많다. 그걸 주울 시간조차 없이 전투를 치르고 있었는데 앞으로 11시간을 더 이렇게 버텨야 한다는 것이 암담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동안 이것보다 힘든 상황도 여러 번 견뎠었다. 만약 이게 처음이었다면 나도 좌절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글에서 몇 달은 보내고 용암지대에서 망치를 두드리던 시간들이 끈기를 남겨줬다.
'김우태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
나는 그에게 또 외쳤다.
"형! 레벨이 오를수록 더 편해질 거니까 어떻게든 집중력을 유지하세요!"
"알았어!"
인형을 휘두르며 저쪽으로 빙 돌아가는 그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션 완료까지 9시간 5분 남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싸웠다.
【미션 완료까지 7시간 남았습니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났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도 멈추지 않았다.
【미션 완료까지 5시간 10분 남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것도 된다.
찌릿!
메뚜기를 바라보면서 놈과 눈을 맞춘다. 어느 놈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사전에 파악하는 거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때 전황이 크게 변했다.
【사막 메뚜기 1,000마리를 사냥했습니다!】
【메뚜기 사냥꾼 명성을 얻었습니다!】
【메뚜기 사냥꾼: 이제 모든 메뚜기는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어어어…?"
김우태가 먼저 반응했다.
아직도 수십만 마리의 메뚜기가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일순간 우뚝 멈춰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야?"
"이제 된 것 같아요!"
근처 메뚜기가 김우태를 공격하고 싶다는 본능과 나를 적대하면 안 된다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게 보였다.
"끝났어?"
김우태가 헐레벌떡 내게 다가왔다.
"미션 자체는 남았겠지만 이놈들은 이긴 것 같아요."
"와! 잘됐네! 죽는 줄 알았다!"
그가 주저앉으려고 하자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아이템부터 회수해야 해요."
그러면서 나는 메뚜기들의 동향을 살폈다.
파르르르르르르륵!
날갯짓 소리가 폭풍처럼 온 세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때까지 우리를 중심으로 모였었는데 이젠 바뀌었다. 저쪽 하늘을 향해 긴 띠가 만들어지며 메뚜기들이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메뚜기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메뚜기가 당신을 보며 다리를 떨었습니다.】
'호오, 이거 어쩌면?'
하늘 높이 있는 메뚜기들이야 관심도 없었다.
슬금, 슬금….
내 앞에 있던 녀석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든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아마 녀석에게 범이 같은 꼬리가 있었다면 잔뜩 말려 있었을 것이다.
"어딜?"
놈이 날아오르기 전에 나는 빠르게 뛰어가서 놈의 더듬이를 손으로 덥석 잡았다. 인근에 있는 놈들 중에 가장 몸집이 큰 놈이었다.
파르르르….
녀석의 날개가 살 떨리는 것처럼 진동을 만들었다. 아까까진 동료가 내 손에 죽어도 무시하던 것들이 이제는 내 존재 자체를 꺼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스킬의 힘이다. 이 원초적으로 위대한 능력은 이놈들처럼 지능이 낮을수록 더 잘 먹혀드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나는 녀석의 더듬이를 꽉 잡고 기 싸움을 했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몸을 뒤트는데 나도 지지 않고 힘겨루기를 했다. 이렇게 큰 메뚜기는 처음이었고 아직도 놈의 얼굴을 보면 징그러운 기분이 들지만 몇 시간이나 보다 보니까 적응이 된다.
【사막 대왕 메뚜기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사막 대왕 메뚜기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공포와 사랑을 닮은 구석이 있다. 대항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메뚜기는 체념한 듯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렸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씨익 웃었다.
"이래야 착하지."
파르르르르르륵!
메뚜기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녀석들이었는데 갑자기 왔던 것처럼 허무하게 떠났다.
"하아! 이제 좀 쉬자!"
아이템을 다 회수한 김우태가 바닥에 누워버렸다. 파티라서 그런지 그가 획득한 아이템도 내게 계속 메시지로 떴었다.
【빈 병을 얻었습니다.】
【사막 메뚜기 진액을 얻었습니다.】
재능마켓으로 돌아가도 아이템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렇게 필드에서도 드랍한다. 어차피 다시 올 수 없으니 무조건 다 챙겨야 했다.
【미션 완료까지 4시간 41분 남았습니다.】
"형."
"말해."
김우태는 일어나지도 않고 누워서 대답만 했다. 완전히 탈진해버린 거다.
"이제 5시간도 안 남았어요."
저쪽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우린 밤새도록 싸웠다는 뜻이다.
"여기서 남은 시간을 버티고 미션을 완료한 다음 베이스캠프를 찾아도 되고요. 아니면 지금 미리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래요?"
"넌… 지치지도 않냐?"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코어 덕분인지 나는 과거에 비하면 놀랍도록 체력이 늘었다.
"형도 필라테스 꾸준히 하면 저처럼 돼요."
"필라테스…. 하! 아버지가 아시면 고추 떼라고 난리 치실 거다."
"하하! 그건 우리가 어떤 필라테스를 하시는지 모르셔서 그렇죠."
스쿼트 1만 개 같은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니까.
"후…."
김우태가 일어났다.
"차라리 가자. 여기 있다간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어. 기분 나빠."
"그럴까요?"
"어, 근데 저건 왜 잡아둔 거냐?"
김우태가 메뚜기를 보며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메뚜기에게 걸어가서 직접 보여줬다.
"타세요."
메뚜기의 목은 무척 두꺼웠다.
"이걸… 타고 가자고?"
김우태가 입을 떡 벌렸다.
"걸어갈 순 없잖아요. 또 먹혀버릴지도 모르는데."
"으으… 그래도…."
나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여차하면 제가 날개 쓸게요."
템빨이 좋아질수록 모든 일에 경우의 수가 늘어났다. 날다가 떨어져도 뱀파이어 날개를 쓰면 된다.
"범아!"
나는 범이를 부르며 녀석을 작게 커스텀했다. 내 품에 쏘옥 안기는 범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주면서 김우태에게 말했다.
"가요."
"하아…. 알았다. 알았어. 내 참. 별걸 다 해보네."
포기한 듯 걸어와서 메뚜기에 올라타는 그를 보면서 나는 상체를 숙여 메뚜기 더듬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
메뚜기와 소통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제까지 범이를 타고 다니면서 묘하게 느낀 게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꽉 잡으세요."
오른쪽 더듬이를 당기면 녀석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릴 거다.
'역시.'
이제 날게 하면 되는 건데.
"형, 조금 더 붙어보세요."
녀석의 날개가 펼쳐져야 하니까 더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손바닥으로 녀석의 몸을 툭툭 두드렸다.
"야, 근데 이 넓은 사막에서 그걸 어떻게 찾냐?"
"모르겠어요. 일단… 어디라도 가보는 수밖에…."
김우태와 말을 하면서 계속 메뚜기의 몸을 두드리자 슬슬 반응이 왔다. 녀석의 날개가 펼쳐졌다.
"좋아! 날아보자!"
녀석의 더듬이를 당기면서 채근하자 녀석이 움직였다. 혹시 우리가 너무 무거워서 날지 못하진 않을까 우려했지만 파르르르르륵! 떨기 시작한 날개는 그런 기우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오오! 뜬다! 떠!"
김우태의 말에 나는 더듬이를 꽉 잡고 말했다.
"너무 높이 날 필욘 없어! 우선 저쪽으로 가자!"
녀석의 오른쪽 더듬이를 당기면서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목표로 잡았다. 이런 곳에선 뭐든 목표를 잡고 다니는 게 좋다.
"으아아아악! 높아! 너무 올라왔다고!"
김우태가 뒤에서 발광했지만 나는 웃으며 메뚜기를 더 높이 유도했다. 더 멀리 봐야 뭐라도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션 완료까지 4시간 25분 남았습니다.】
우린 그렇게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날아갔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온통 모래뿐이었지만 메뚜기는 빠르게 날았고 걷는 것보다는 훨씬 기동력이 좋았다.
그렇게 1시간쯤 날았을까?
'저건?'
내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설마…?'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