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미션 완료까지 14시간 22분 남았습니다.】
최근 들어서 이토록 시간이 안 가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김우태는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편히 앉아서 사막 저 끝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히어로로 산다는 건 어때?"
"저 히어로 아닌데요?"
"뭘 아니야. 맞구만."
김우태가 피식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괴물 죽이고 사람들 지키고. 아니야?"
"그렇긴 한데…."
지금까지의 나는 내 한목숨 보전하려고 죽을 둥 살 둥 달려온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미션들은 그만큼 가혹했었으니까.
"언젠가 나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어. 데자뷰라고 해야 하나? 그 꿈에서 너는 없었지만…."
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그렇게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에요. 진짜 죽는다고요."
"어차피 사람은 죽어."
김우태가 으쌰! 일어나며 허리를 빙빙 돌렸다.
"자, 이제 말해봐.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려면 뭘 해야 하는지."
그냥 살아있으면 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많은 걸 얻었다.
이 말을 좀 더 줄여서 담백하게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김우태의 뒤로 무언가가 보였다.
"…어?"
저 하늘에 까마득하게 몰려오는 점들은 불길하고 음습했다.
"형!"
"어어?"
김우태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외쳤다.
"허어억! 저게 뭐야!"
"몰라요! 일단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제 손 잡으세요!"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나는 이제 이런 높이쯤은 두렵지 않았다.
"히이이익!"
그의 손을 잡자마자 절벽에서 뛰었다. 그와 동시에 뱀파이어 날개가 펼쳐졌고 내 의지에 맞춰 하강했는데 이 와중에도 하늘을 덮은 점들은 이쪽을 향해 곧장 날아오고 있었다.
"새, 새야?"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좀 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게 생겼고 말도 안 되게 컸다.
"메뚜기다! 메뚜기야!"
김우태가 소리칠 때 내 등에도 작은 땀방울이 오싹하게 흘렀다.
"젠장! 더 빨리 내려갈게요!"
이렇게 노출된 곳에서 저것들을 피할 순 없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수백 대의 헬리콥터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냥 감상하면서 '장관이네.'라고 평가했겠지만 수천만? 어쩌면 그것보다도 많을 것 같은 메뚜기떼는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다.
"미친! 이쪽으로 오잖아!"
"인형 때문이에요!"
"아! 환장하겠네! 버릴 수도 없고!"
김우태가 허공에 인형을 붕붕 휘두르면서 말했는데 나는 바닥에 닿기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너무 많아.'
메뚜기는 저쪽 하늘 전체를 덮었다. 심지어 놈들이 가까워질수록 그 크기가 남다르다는 걸 깨달았는데 팔뚝만 한 놈부터 김우태보다도 훨씬 큰 녀석도 있었다.
"여차하면 모래 속으로 숨어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
"이 돌산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진 마세요! 길을 잃으면 우리가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어요!"
광활한 사막에서 방향까지 잃고 미아가 되어버리면 끔찍할 거다. 게다가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밤이 오려는 거다.
"형! 우선 제가 뭐라도 해볼게요!"
나는 내려오자마자 나무 화살을 계속 뽑아내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뭐든지요!"
일일이 설명할 틈이 없었다.
와르르르.
내가 뽑아낸 화살들이 주변으로 수북하게 쌓였다.
"범아! 너도 이쪽으로 와!"
범이도 하늘을 보더니 무서웠는지 몸을 작게 하더니 내 발치에서 웅크렸다.
차르르륵.
화살을 더 뽑아냈다. 무한의 활 통이 가장 열 일하는 날이 바로 오늘일 것 같다.
"와, 거기에 화살이 얼마나 들어있는 거냐? 너 좀 짱인데?"
못해도 수백 대를 꺼내 앞에 쌓아두고 기름을 발랐다.
"쏠게요!"
그런 뒤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르르륵!
치솟는 불길에 화살 몇 개를 더 던져두고 나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메뚜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거다.
【스킬:철벽!이 발동합니다.】
방어력이 치솟고 첫 번째 화살이 '인내'를 머금은 채 하늘로 날아갔다. 놈들이 워낙 많고 메뚜기 크기도 커서 빗맞을 수가 없었다.
푸욱-!
내가 확인하려던 것은 바로 이거였다.
'박힌다!'
여차하면 강철 촉 화살을 써야 하나? 놈들의 외피가 너무 두꺼워서 화살이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생각했었는데 일반 화살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핏핏핏핏핏-!
순식간에 화살이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사이에 나는 불 기름을 먹인 나무 화살을 계속해서 불덩이에 던져넣는 것도 반복했다.
파라라라라라락!
놈들이 더 가까워지자 날갯짓 소리가 세상을 잡아먹었다.
"허어어어억!"
가장 먼저 도착한 메뚜기 몇 마리가 김우태에게 달라붙었다.
"죽어! 이 자식들아! 죽으라고!"
퍽퍽퍽퍽!
인형으로 메뚜기를 때리며 김우태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형! 불에서 떨어지지 마요!"
"알았어!"
놈들도 불은 무서웠는지 그걸 피해서 빙 돌아 내려섰는데 순식간에 몇백 마리까지 우리 주변으로 모였고 나는 미친 듯이 활을 쐈다.
"형! 괜찮아요?"
"어! 아직은 할만해! 이놈들 생각보다 안 빨라!"
퍼억, 퍽!
메뚜기 두 마리의 머리가 인형에 맞아 터져버렸다. 나는 그걸 보다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가서 메뚜기 다리를 잡고 불 쪽으로 던졌다.
그러면서 기름 먹인 화살을 메뚜기 시체에 또 쐈다.
타타타타닥!
아무리 기름을 먹인다지만 가느다란 화살로 불을 키우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녀석들의 날개는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어주었다.
"형!"
"오케이! 봤어!"
멀리서 보면 우리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주변에서 춤을 추는 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메뚜기는 계속해서 내려앉고 있었고 불길은 더욱 커져서 산불이 난 것 같았다.
【사막 메뚜기를 사냥했습니다.】
【80p를 얻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메뚜기는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
【축하합니다! 사막 메뚜기 100마리를 사냥했습니다!】
100마리를 죽여도 놈들의 수에 비하면 티끌 같았다. 아직 놈들의 본대는 우리 머리 위를 선회하며 돌고 있었다.
"오우야! 레벨 올랐다!"
"집중하세요! 형! 뒤에! 숙여요!"
나는 화살을 쏘며 김우태의 뒤로 접근하는 메뚜기 목을 뚫었다. 메뚜기들은 하늘에선 빨랐지만, 바닥에 내려오면 엉금엉금 걸었는데 이놈들이 조금만 더 빨랐으면 김우태는 몇 초 만에 뒤덮였을 거다.
"계속 뛰어요!"
죽은 메뚜기를 계속 불에 던지면서 김우태를 독려했다. 이때 범이도 메뚜기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몸집을 부풀리며 포효했다.
캬웅-!
그러더니 앞에서 얼쩡거리는 메뚜기의 얼굴을 앞발로 후려갈겼다.
철푸덕!
자빠진 메뚜기가 몸을 바르르 떨 때 나는 말했다.
"형! 물리지 않게 조심해요!"
"이미 몇 번 물렸어! 괜찮아! 이 정돈 버틸 수 있어. 으하하하! 죽어라, 이것들아!"
"헐…."
괜찮은 거냐.
'이빨이 날카로워.'
놈들 이빨은 톱날처럼 나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김우태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퍼퍼퍼퍼퍼벅!
인형 휘두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면 나보다 메뚜기 잡는 시간이 더 빨랐다. 그건 당연했다. 팔만 휘두르면 메뚜기는 사방에 있으니까.
"형! 더 빨리요!"
나도 질 수 없다. 김우태에게 모여드는 메뚜기를 계속 잡으면서 시체를 불로 던졌다.
화르르르르륵!
이제는 불길이 더욱 커졌다. 주변에 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이 번지진 않았지만, 팔뚝만 한 메뚜기가 계속 공급되니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갔고 메뚜기들은 그 연기가 부담스러운지 빙빙 돌았다.
'많아도 너무 많은데.'
위를 올려보면 힘이 쭉 빠질 정도다. 대체 얼마나 되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놈들 전체의 0.1%도 내려온 게 아니었다.
"와하하하! 또 레벨 올랐다!"
나는 직감했다.
'체력전이야.'
앞으로 남은 시간.
【미션 완료까지 14시간 1분 남았습니다.】
누가 버티느냐의 승부였다.
.
.
.
죽음이라는 건 어쩌면 모두에게 잊힌다는 거다. 살아있지만 아무도 찾지 않으면 그 또한 죽은 것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히잉…."
도화지도 그런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마법진은 활성화되었고 실비아도 그릇을 찾으러 떠났다.
"저기요오…."
1시간은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변화가 없자 도화지는 외로워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하나가 나타났다.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냥 저랑 같이 있어 주실래요?"
"업무를 봐야 해서 무한정 여기 있을 순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우리 얘기해요. 내가 질문하면 되는 거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시녀들은 인형 같다. 워낙 피부가 창백해서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도 웃으면 분위기가 바뀔 것 같다.
"로드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왜요?"
"제 주관적인 모든 판단과 감정은 제거되었습니다."
"허억…. 왜요? 언제요?"
"로드를 모실 때부터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요?"
"저는 로드의 여자입니다. 종속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유지합니다."
"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 나쁘네!"
시녀들은 로드가 떠났지만 계속 이곳에 남겨져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는지조차 모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도화지는 왠지 열이 받았다.
"언니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요?"
"성을 관리하는 자원은 280명입니다."
"하…!"
로드를 본 적은 없었지만, 도화지는 시녀들을 위해서라도 그를 혼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지 않나? 서로 사랑해서 함께하는 관계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종으로 살아야 한다니!
"성을 지키는 자원은 810명입니다."
"아, 그건 이제 됐어요."
도화지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시녀를 유심히 보면서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엔 뭐 했어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름은요?"
"없습니다."
"와…. 진짜 나빴네."
시녀의 눈동자는 한점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도화지는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번뜩이는 순간이 인생에서 몇 번쯤은 온다.
'할머니도, 민준이도, 선생님도….'
자신을 강력하게 원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문제고 민준이는 그만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언니, 로드. 보고 싶지 않아요?"
"…저는 로드의 여자입니다.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면 잠깐 이쪽으로 와볼래요?"
도화지의 말에 시녀의 몸이 움찔했다. 손님을 잘 모시라는 명을 받아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긴 하지만 손님의 명령을 따르는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란 게 생기는 걸 보며 도화지가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로드를 만날 수 있을지!"
"…로드."
그녀의 마음은 강제로 종속되었다. 이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증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로드의 곁에 있는 것이 사명이었다.
"그래요! 로드! 그를 만나러 가자고요!"
이게 될지 안될진 모른다. 하지만 시녀가 로드와 강력한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는 건 딱 봐도 알겠다.
도화지가 재차 손을 흔들었다.
"어서요!"
도화지가 크게 외치자 시녀의 발끝이 조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