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이대로 있다가는 또 모래에 쓸려버릴 것이었다.
"커스텀!"
훌쩍 뛰어온 범이를 오토바이로 바꿔 잡아타고 김우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릴게요!"
원숭이들도 모래가 오는 걸 알았는지 소리를 질러대며 저쪽으로 피신했다.
"또 삼켰나 봐요!"
아니면 아까 먹은 모래가 넘어오는 걸 수도 있었다.
"우왓! 이런 것도 되냐? 대박!"
범이가 오토바이로 변할 걸 보면서 김우태가 감탄했다.
"뚫을게요!"
하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뒤에선 모래가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고 전방에선 원숭이들이 날뛰며 우릴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하하하! 좋다! 좋아!"
김우태가 내 뒤에 매달려서 인형을 빙빙 휘두르고 있었다. 본래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훌쩍 다가왔던 원숭이의 손을 인형으로 때렸다.
갸아아아악!
원숭이가 고통스러워하며 멀찌감치 달아났다.
"어딜! 하하하!"
웃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보잘것없이 생겼어도 저 인형은 상당한 타격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형! 숙여요!"
"이크!"
쌔애애애애액!
날아온 촉수가 우리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지겨운 자식들!"
스아아아아아아-!
뒤에서 모래가 점차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산사태에 떠밀려 내려오는 토사 같았다. 아까보다 몇 배는 더 높았고 모래로 된 쓰나미 같았다.
"범아! 더 빨리!"
나는 겨눈 활을 쏘며 외쳤다. 이제 범이와의 교감이 높아져서 이렇게 달리는 와중에서도 활을 쏠 수 있다. 물론 정확도는 상당히 떨어지고 원숭이도 엄청나게 빨랐지만, 촉수는 맞출 수 있었다.
꿀렁, 꿀렁.
바닥이 움직였다. 그레이트 웜이 몸을 뒤트는 것 같았다.
그러자 둔덕이 생겼다.
"형! 왼쪽으로 갈게요!"
오토바이가 훌쩍 날아올랐다.
"으아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뛰어오르자 김우태가 놀라서 외쳤다. 하지만 나는 떨어지기 전에 화살 하나를 쐈다.
푸욱!
저 아래 촉수가 날아오는 걸 봤다.
"형! 괜찮아요?"
"어! 달려!"
불화살을 다시 겨누면서 범이를 달렸다. 모래 쓰나미가 바로 뒤까지 접근했고 원숭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리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김우태를 노렸다.
'놈들을 따라가면 돼.'
원숭이들은 여기서 산다. 그렇다는 건 모래의 위협에 적응했다는 뜻일 거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범이가 점점 지켰는지 속도가 떨어진다는 걸 느낄 때였다.
【펫과의 교감이 높아졌습니다.】
【이제 수호자의 스킬을 펫과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펫이 해당 스킬을 사용할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돼라!"
내 소중한 양말에서 스킬이 터졌다.
【1분간 펫의 주력이 2배 상승합니다.】
"하아아아악?"
김우태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가자아아아아!"
빨라진 범이가 쭉쭉 치고 나갔다. 앞서 달리던 원숭이들이 놀라서 옆으로 비켰다.
"겁나 빠르다아아아!"
"꽉 잡으세요!"
1분이라지만 범이는 모래 쓰나미를 완전히 따돌릴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체감상 시속 150km는 넘길 것 같았다.
"헉! 야! 동굴, 좁아진다!"
"저도 봤어요! 범아!"
멈추든지 더 앞으로 나가든지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느 순간 원숭이들이 벽과 천장에 달라붙었다. 그 많던 촉수도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마침내.
"빛!"
저 앞에서 빛이 들었다.
"끝이다!"
김우태의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잔뜩 담겼다. 드디어 이 망할 벌레의 몸에서 탈출할 순간이 왔다.
두두두두두두-!
스킬 효과는 떨어졌지만, 오토바이는 넘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달렸다. 아마 내가 숙련된 배달 경험이 없었다면 몇 번이나 고꾸라졌을 거다.
마침내…!
투웅!
오토바이가 빛을 만끽하며 날아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허어어억!"
우리는 허공을 날았다.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김우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범이도 커스텀을 풀었다.
화악-!
뱀파이어 날개가 펼쳐졌다. 모랫바닥이라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긴 했지만, 날개가 있는데 써먹지 않으면 손해다.
그런데 이때였다.
푸우우우우우우웃-!
저쪽에서 우릴 향해 모래 폭탄이 날아왔다.
"하악! 저놈 똥 싼다!"
고래가 물을 내뿜는 것처럼 그레이트 웜이 모래를 뿜어댔다. 그 양이 얼마나 무지막지하냐면 순식간에 작은 동산을 만들 정도였다.
"젠장!"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솨아아아아아!
날아온 모래가 온몸을 때렸다. 범이는 이미 착지해서 저쪽의 까만 돌산을 향해 뛰고 있었다.
"…."
"…."
잠시 후 우리는 하늘을 보며 대자로 뻗어있었다.
"하아, 하아…."
믿지 못할 경험을 했다. 거대 벌레한테 먹혔고 뒤로 나왔다.
"쩌네. 뭐 저딴 게 다 있냐. 큭큭."
김우태도 방금 겪은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웃었다.
옆에서 범이가 몸을 부르르 털었다. 모래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여긴 안 올 것 같아요."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린 까만 돌로 이뤄진 산의 아래쪽에 있었는데 얼마나 높은지 아무리 그레이트 웜이라도 이걸 삼킬 순 없을 것 같았다.
"아앗?"
"왜요?"
"잊고 있었어!"
김우태가 벌떡 일어나더니 저쪽으로 걸어가서 바지를 내렸다.
"아…."
볼일을 보고 온 김우태가 뒤통수를 손으로 긁으며 물었다.
"뭐 먹을 거 없냐? 비웠더니 허기지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여기 온 것도 8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굶주림에 익숙했지만 그는 적응하기 힘들 거다.
"앞으로 형도 이렇게 물품을 챙겨서 다녀야 해요."
가방을 열며 김우태에게 이것저것 설명했다.
"흠, 전투식량으로 꽉 채우면 되겠는데?"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초콜릿류가 더 나을 것 같더라고요."
"니가 전투식량을 어찌 아는데? 군대 문턱도 안 밟아본 놈이."
"아…. 뭐, TV에서 봤어요."
대충 둘러대고 초코바를 건네줬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제가 원숭이 관련 베네핏이 있거든요. 아니었다면 꽤 힘들었을 거예요."
그놈들이 물불 안 가리고 싸우려 했다면 더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을 거다.
"그런데…."
초코바를 입에 하나 넣고 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돌산.
"여기가 어디쯤일까요?"
"올라가 보면 더 잘 보이지 않겠냐?"
등산로 따윈 없다.
"…가실 수 있겠어요?"
"날 뭘로 보고!"
나는 등반엔 이골이 난 사람이다. 각종 필라테스로 다져진 육체는 이런 돌산도 오를 수 있게 단련됐다.
"내가 말 안 했냐? 아버지 덕분에 내가 4살 때부터 등산을 다닌 사람이야. 이 정돈 껌이라고."
"아…."
"슬슬 움직이자. 저것들 또 온다."
모래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독충들을 보면서 김우태가 치를 떨었다. 이 넓은 사막에 저런 게 몇억 마리가 있을지 모르는데 애초부터 다 때려잡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형이 먼저 올라가세요. 혹시 모르니까."
미끄러져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잡아줘야 할 거다.
"그래, 근데 너. 아까 그런 날개도 재능마켓에서 산 거냐?"
"아뇨. 그건 괴물 잡고 얻은 거예요."
"오…. 그렇단 말이지?"
김우태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변할 때 나는 몸을 돌렸다. 모래에서 나온 뱀이 이쪽으로 열심히 기어 오는 걸 본 거다.
"끄응, 차!"
김우태가 먼저 올라갔다. 두 손으로 먼저 돌을 잡고 발을 디뎌야 한다. 아직은 경사가 완만하지만, 손을 이용하는 게 안전하다.
범이는 아래에서 모여든 독충을 잡아먹고 있었다. 녀석 걱정은 안 한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올라올 표범이니까.
"형! 저쪽 봉우리까지만 가요!"
"오케이!"
애초에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필욘 없었다. 시야가 확보되는 곳까지만 가면 된다. 이게 사막에 있는 돌산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는 못 해도 남산보단 높을 거다.
둔덕이 있으면 쉬면서 생수도 마시고 1시간쯤 올랐을 때 목적했던 곳에 도달했다.
"와아…."
김우태가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모래밖에 없네."
"그러게요."
베이스캠프가 어느 쪽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길 벗어나면 또 아까 그게 우릴 먹어버릴지도 몰라요."
"여기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거지?"
"24시간을 버티는 것도 해야 하니까."
"좋아."
김우태가 양반다릴 하고 앉아서 저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시간 좀 때우자. 이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가냐?"
"강해져야죠. 무엇보다…. 죽지 않아야 하고요."
"섬뜩하네. 죽는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
"실제로도 그래요. 살얼음판이거든요."
"하아…. 그 괴물들이 우리 세상에도 살고 있다고 했지?"
"네. 얼마 전에 저희 학교에서 일어난 일 보셨어요?"
"대충은."
"그런 식이에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앞으로 형한테도 수많은 미션들이 나올 거에요. 그것들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만."
"네가 있어서 다행이네. 이렇게 꿀 빨 수도 있고."
이게 꿀인지 똥인진 나중에 가봐야 알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좋은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은 힐러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딴 거 하는 건데."
지팡이 들고 얍! 하면 파티원을 치료하는 형태의 힐러는 아닌 것 같았다. 저 무식한 재생력을 기반으로 해서 자기가 상처를 옮겨 받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특히 모든 적들이 일단 그를 적대하니까 가장 많은 공격에 노출될 것이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어그로 허수아비?
"형도 공격 능력을 더 갖춰놓으면 지금보단 나을 거에요. 포인트 모아서 적절한 아이템부터 맞추죠."
"템빨도 좋지만 일단 나는 갖고 싶은 게 있어."
"그 오십오만은 당장은 무리에요…."
"아니, 그거 말고. 큭큭. 내가 바보냐?"
지난 8시간이 그를 조금은 변화시킨 것 같았다.
"호오, 좋은 거라도 봐뒀어요?"
"어! 투명망토부터 살 거야!"
"…형.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죠? 채린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거나…."
"야, 너. 그 눈빛 뭐야? 아니거든? 목욕탕이나 훔쳐보고 그럴 거 절대 아니거든!"
"…목소리 떨지 마시고요."
"커허허험! 아니라고! 모래가 들어가서 그래! 들어봐. 내가 투명해지면 괴물들이 날 못 찾을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그러면 내가 멍 때리는 놈들을 뒤에서 파바박! 해결할 수도 있고!"
왜 그게 전부로 들리지 않을까.
"비슷한 효과의 드링크도 있어요."
"그, 그래? 하지만 계속 써먹으려면 망토가 좋지 않을까?"
"일단은 재능마켓에 가서 자세히 더 보죠. 형은 격투 기술이 충분하니까 힘만 늘릴 수 있어도 웬만해선 당하지 않을 거예요."
간만의 여유가 생겨서 냉정하게 우리 팀원의 전투력을 생각해봤다.
나는 공격에 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범이까지 내 카테고리에 두면 기동력과 공격력은 내가 가장 좋다. 도화지는 탐지와 방어력이었고 김우태는 아직 애매하지만 후방 지원을 하면서 한 방을 노려야 하는 캐릭터다.
'뭔가 좀 뒤바뀐 것 같긴 하지만….'
꽤 그럴듯한 팀이지 않나?
'혼자보단 훨씬 나으니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동료가 생긴다는 거. 싫진 않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