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크르르르르.
범이가 위협적인 울음을 냈다.
"뭔가 있어요."
나는 활을 들고 저 앞을 봤다.
"이번에도 형을 공격할 거예요."
"젠장. 나도 알아."
김우태가 인형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나는 그를 보며 과연 인형 때문인가?를 잠깐 고민했다. 어쩌면 매력이 마이너스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여길 탈출해도 계속될 거란 뜻이다.
'그건 심각한데….'
나가면 그의 매력을 올릴만한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 계세요."
놈들의 목표가 김우태여서 내가 앞장서서 싸우기 편했다. 하지만 아무리 김우태라도 모든 공격을 다 버텨낼 순 없을 것이다.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터져버리면 그의 재생력도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줌마렵네. 긴장해서 그런가?"
"잠깐만요. 저기 뭐가 있는지만 확인하고요."
눈썹이 움직인다는 건 더듬이가 위협을 감지했다는 뜻이다.
"알았어. 참아볼게."
나는 좀 더 앞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있는 게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판단은 내려야 했고 저쪽에서 도사리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시간이 더 흐르면 적이 더 늘어날 수도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거리를 줄여가며 걸었다. 그렇게 50미터쯤 걸었을 때 우린 보았다.
"저거였나 봐요."
"으으…. 더럽게도 생겼네."
"아까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 맞죠?"
"그런 것 같아."
갯지렁이 같은 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이가 무려 10미터가 넘었고 바닥과 벽에 붙어서 꿈틀거렸는데 멀리서 보면 잡초처럼 보였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살아 움직이는 게 확실했다.
"완전히 피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제거하면서 가죠."
"알았어."
나는 활을 겨눴다. 본능적으로 저게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가면 채찍처럼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항인 건 내가 화살을 날릴 수 있다는 거다.
그그극!
시위가 당겨졌고 첫 번째 화살이 놈에게 날아갔다.
푸욱!
놈의 가운데에 정확히 박혀든 화살은 구멍을 뚫고 더 나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명중! 잘 쏘네!"
구멍이 난 몸통이 꿈틀거리면서 바닥으로 숨었다. 고통을 느끼는지 파르르 떨어댔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제거했다면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숨었다. 그건 다시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저쪽으로 붙죠."
"오케이!"
우린 오른쪽으로 가닥을 잡고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흔들흔들.
앞으로 갈수록 오징어 다리 같은 것들이 더 많아졌다.
핏핏핏핏핏!
나는 그것들을 향해서 계속 화살을 날렸다.
콰르르르르!
회전하는 화살촉은 녀석의 몸통을 헤집으면서 날아갔는데 다친 녀석들은 바닥과 벽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오, 기분 나빠. 끝도 없이 나오네."
김우태가 투덜거리며 놈들을 봤다. 굵기는 우리 팔뚝만 했는데 눈코입이나 팔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방심하면 안 돼요."
"알아…."
그가 대답할 때였다.
슈욱!
뭔가가 옆에서 날아왔다.
"헛! 조심!"
나는 곧장 그걸 향해 화살을 쐈다.
푸욱!
빗맞아 들어간 화살이 그걸 찢으며 회전했다.
"히익!"
촉수 같은 것의 끝부분이 김우태의 얼굴 바로 앞까지 바닥 다가왔다. 이제까지와 다른 점은 그 끝부분이 장어 입처럼 쩌억, 벌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들도 문다!"
어른 손바닥을 쫙 편 것처럼 벌어진 입은 빼곡하게 작은 이빨들이 나 있었다.
철푸덕.
화살에 찢겨 땅에 떨어진 촉수가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저쪽으로 슬금슬금 당겨졌다.
나는 놓치지 않고 화살을 또 쐈다.
푹푹!
두 발의 화살이 놈의 중간 부분을 찢어발겼다.
"주, 죽었냐?"
"모르겠어요."
나는 떨어진 부분을 손으로 잡고 들었다. 나머지는 저쪽으로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다.
"우웩. 이게 뭐야."
가까이에서 본 촉수는 혓바닥처럼 흐물거렸다.
"이번에도 죽지 않았어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쩌면…."
나는 땅을 보았다.
"한 몸일 수도…."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여기까지 왔는데 위장이 없잖아요? 그러면 이놈은 뭘로 영양분을 흡수할까요?"
모래와 함께 들어온 생물들을 거르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나?
"호오, 그러면 이게 그…. 뭐라고 해야 하냐?"
"저도 몰라요."
장기의 일부랄까? 만약 그렇다면 희망이 조금 보였다.
"끝까지 가보죠.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도 있을지 몰라요. 조심하세요. 이거, 물리면 그냥 아픈 걸로 안 끝날 것 같으니까."
"그래 보인다."
물리는 순간 쪽쪽 흡수되어 버릴 것 같다.
우리는 더 걸었다.
일단 촉수가 보이면 최대한 많은 화살을 쏴서 놈들이 더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멍청한 놈들이네. 숨어있다가 튀어나오면 될걸."
"그건 아마 형 때문일 거예요."
"내가 왜?"
"느껴지면 견딜 수 없나 보죠."
"나 때문이 아니거든? 이거 때문이라고 해줄래?"
인형을 흔드는 김우태를 보면서 나는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이놈들이 바닥에 숨어있다가 한꺼번에 공격해오면 우리도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우태가 다가가는 순간 촉수들은 뭐에 환장한 것들처럼 튀어나왔다.
"후…. 그래도 시간은 잘 간다. 그치?"
【17시간 11분 남았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벌써 7시간 가까이 지나고 있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눈썹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레어' 미션인데 나오는 괴물들 수준이 내 기준에선 별거 없다는 것도 그랬다.
'내가 너무 강해져서 상대적으로 이놈들이 약하게 보이는 건가?'
피핏!
화살을 쏘며 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계속 생각했다.
'뭘까.'
이 찝찝함은.
'기분 탓인가?'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수 있었다.
"야, 좀 쉴래?"
"그래요."
나는 범이의 몸을 손으로 붙잡으면서 저 앞의 촉수들을 봤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범이에게 먹여주었다.
김우태도 한 병 마시면서 감탄했다.
"캬아! 이거 우리 짐에서 팔면 대박 나겠는데?"
"저도 항상 그런 생각 했어요."
한 병이면 세상 모든 피로가 싹 가셔버린다.
"형."
"왜?"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
"형이 재능마켓으로 온 거.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왜 너 때문인데?"
"도화지 누나도 그렇고…. 제게 연관된 사람들이 초대받는 것 같아요."
"흠. 걔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이 썩 나쁘지 않아."
"네?"
"지루했었거든. 맨날 짐이나 지키면서 손님들 상대하는 것도 그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뛰어날 수 없다는 벽에 막혀서…. 그런 나를 기대 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눈빛도 견디기 어려웠어. 이렇게 의미 없이 살다가 죽나 했는데."
그가 인형을 보며 웃었다.
"완전 두근두근 하잖냐?"
김우태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투명망토도 있고 사람 마음을 읽는 향수도 있더라. 대박이지 않냐?"
"그걸로 뭐 하려고요."
"흠흠,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출발하자. 이놈 똥구멍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인 것 같은데."
피로도 회복했겠다, 다시 움직일 때였다.
크르르르!
범이가 움직였다.
"허엇? 범아!"
말릴 틈도 없었다.
캬아아아!
은빛으로 변한 범이가 저쪽으로 뛰어갔는데 그 앞엔 촉수가 아니라 뭔가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어둠에 숨어서 우릴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헉? 저게 뭐야!"
"모르겠어요! 촉수는 아니에요! 조심하세요!"
범이는 무척 빠르다. 그런데 그런 범이가 지금 놈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형체로 보면 네발짐승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범이처럼 고양이나 개는 아닌 것 같았다.
'원숭이?'
그래, 차라리 그런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구부정한 등으로 폴짝폴짝 뛰는데도 엄청나게 날렵했다.
"헉! 야! 저기도 있다!"
저 앞 촉수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는 두 번째 녀석이 보였다.
"흐읍…."
나는 활을 겨누며 놈을 주시했다. 확실히 원숭이처럼 생겼는데 몸에 털은 없고 얼굴엔 송곳니가 위쪽을 향해 돋아나 있다.
【흡혈 기생 원숭이를 발견했습니다.】
【흡혈 기생 원숭이는 자이언트 웜의 몸속에 기생하는 생물입니다. 매우 귀해서 흡혈 기생 원숭이의 피는 다양한 마법에 사용되지만 구할 수 없어 값비싸게 거래됩니다.】
'흡혈 기생 원숭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놈들의 눈동자는 맹인처럼 허옇다. 내가 불화살을 들고 있으니 환하지만, 평소라면 여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놈들은 청각이나 후각으로 우리를 탐지하나?'
모르겠다. 지금 중요한 건 김우태를 지켜야 한다는 거다.
【원숭이 사냥꾼의 등장으로 원숭이가 두려워합니다.】
【원숭이를 공격할 시 추가 타격 효과를 발휘합니다.】
'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원숭이 사냥꾼이었다.
"형! 제게 바짝 붙으세요! 절대 혼자 떨어지면 안 돼요!"
"그러라고 해도 안 갈 거야!"
촉수 뒤에 있던 녀석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놈은 나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김우태를 어떻게든 공격하려는 이중적인 마음에 갈등하는 것 같았다.
'자이언트 웜이라고 했어.'
우릴 예상대로 아주 큰 뭔가에 먹힌 거다. 이 자이언트 웜이 얼마나 큰지 그 몸에 기생하는 원숭이까지 있을 정도다.
'끝까지 갈 수밖에.'
24시간을 버틴다고 해도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려면 여길 나가야 했다.
"갑니다!"
"마음대로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곤 시위를 놓았다.
피잉-!
왼쪽 벽에 바짝 붙어 있던 녀석이 내 화살에 기겁하며 뛰었다.
'그걸 피해?'
화살은 눈으로 보고 피하려고 하면 이미 화살촉이 가슴을 파고든다. 한데 이놈은 지금 내가 시위를 놓자마자 반응했다.
'확실히 예민하다는 거야.'
시력이 퇴화한 만큼 다른 감각이 발달했는지 원숭이는 저쪽으로 후다닥 도망쳤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도 아니었다. 아주 멀리서 김우태를 응시하고 있다.
"으으으, 저것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그나마 다행이에요. 쟤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으면 그것도 골치 아팠을 거니까."
달꽃에 미쳤던 차우들보단 훨씬 양호했다.
'이름의 힘이 이렇게나 강하구나.'
끼이이이익!
끼이익!
점차 놈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핑! 핑핑!
나는 계속해서 활을 쏘며 김우태와 천천히 이동했다. 이상하게도 촉수는 원숭이들을 공격하지 않았는데 어떤 원숭이는 촉수를 타고 올라가서 훌쩍 뛰어내리기도 했다.
"진짜 빠르다! 이놈들, 장난 아니야!"
원숭이들은 우리 바로 앞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그 얼굴이 끔찍할 정도로 기괴했는데 김우태를 낚아채려고 손을 뻗었을 때 화살 한 발이 놈의 가슴에 명중했다.
키에에에엑!
널브러지는 원숭이를 보면서 김우태가 외쳤다.
"저기! 또 온다!"
【흡혈 기생 원숭이를 사냥했습니다.】
【500p를 획득했습니다.】
한 마리에 500포인트라니. 역시 상당히 위험한 놈들이었다. 무엇보다 저 섬뜩하게 자란 송곳니가 절대 물려선 안 될 것을 암시했다.
슉슉!
화살이 계속해서 날았다. 지그재그로 뛰며 다가오던 녀석이 옆으로 물러나며 다시 기회를 노렸다.
"많아! 더 많아졌다아아아!"
김우태가 외칠 때였다.
꿀렁!
바닥 전체가 움직였다.
그리곤 솨아아아아아. 우리가 왔던 방향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왔다.
"형! 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