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이게 다 뭐야….'
도화지는 어떤 방에 들어와 있었다. 방은 50평 정도로 넓었고 빼곡하게 책장이 들어차 있었으며 실험대와 책상도 많았다. 뭘 하던 곳인진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이거, 눈알인가? 에이, 아니겠지?'
유리병 속 물건을 유심히 보다가 도화지는 애써 현실을 회피했다. 수많은 병엔 이것저것 들어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것들이었다.
이때 복도를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도화지를 봤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네. 혹시요…."
시녀들은 영혼이 없는 인형들 같았다.
"제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집이 어디신데요?"
시녀가 다가와 두 손을 모으고 도화지의 얘기를 경청했다.
"일단 여긴 아니에요. 최상층이라는 것 같았는데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이거든요?"
"차원을 이동하는 연구에 관해선 로드께서 활발하게 진행하고 계셨었습니다. 저 자료들이 다 그와 관련한 것들이고요."
스녀를 따라 도화지가 책상으로 걸어갔다.
수상한 약병들과 굉장히 많은 책이 널려 있었다.
"그러면 언니가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저는 로드께서 하시는 일을 도울 뿐 그 방법이나 구체적인 마법을 다루진 못합니다."
"아…."
"제가 듣기론 로드께선 어떤 매개체를 이용해서 차원을 이동하는 연구를 하셨는데 이것들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시녀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나가버렸다.
"우움…."
도화지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아무리 봐도 이 자료들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침 실비아가 돌아왔다.
"언니!"
"응?"
"로드가 여기서 차원 이동을 연구했대요!"
그 말에 실비아가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와서 책들을 뒤적거렸다.
"뭘 좀 알겠어요?"
"대강은. 본래 이 마법은 우리 종족 것이었었어. 하지만 우린 어떤 대상의 목숨이나 피해를 매개로 삼는 끔찍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지. 지금 이 경우엔 대량의 저주가 쓰였을 가능성이 커."
"로드가 갔다면 저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론 그렇게 볼 수 있지만, 그가 사용했던 매개처럼 너에게도 최상층에서 너를 끌어당길 만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
"그런 것 없는데…."
"잠깐만. 더 찾아보자."
실비아도 집중했다. 만약 로드가 떠났다면 최상층도 무척이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최상층을 위해 그녀가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로드에 원한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언니, 이건 어때요?"
"고마워."
"이것도요!"
도화지는 실비아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갖다줬다. 실비아는 빠르게 책과 자료를 뒤지며 로드가 어떻게 차원을 건널 수 있었는지 연구했다.
"단서가 있어요?"
도화지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돌아가지 못하면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건데 그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로드는 마법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의 머릿속에서 이 마법이 어떻게 작용했는진 모르겠지만 그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언니, 마법사였어요?"
"우리 종족은 기본적으로 마법력을 가지고 태어나. 그건 사람에 따라 총량이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큰 축복을 받았지. 공격 쪽으론 젬병이어도 기초 학문은 내가 다루지 못하는 마법은 없어."
"와아…. 대단해요!"
"대단하긴. 내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로드를 이길 수 없었는걸."
그녀가 처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도화지는 더 심을 실어주려고 노력했다.
"언니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자!"
응원이 귀여웠는지 실비아는 피식 웃곤 다시 책을 보다가 생각했다.
'신기한 애야.'
자매들은 솔직하지만 저렇게 직설적이질 않았다. 또한 태생부터 위험에 노출된 삶을 살아서인지 저 아이처럼 밝게 웃질 못했다. 그건 실비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로드 때문이야.'
그래서 로드를 제거해야 한다. 로드가 있으면 마물들의 세력이 더욱 강력해지고 자매들은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가 떠났다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거야. 결국엔 그를 죽어야만 해.'
실비아가 움직였다.
"몇 가지 재료만 섞으면 이쪽에서 뭔가를 해볼 순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최상층으로 갈 수 없어. 내게 연관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침 여기에 로드가 그려놓은 마법진이 있으니까 이걸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정말요?"
"응,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쪽에서 너를 끌어당길 만한 강력한 원동력이 필요해. 그 누구도 너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냥 이렇게 잊혀지는 거고."
"로드는요? 그도 저쪽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을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갔죠?"
"그는 고통과 상처의 로드야. 그걸 이용해서 씨앗을 심었을 거고."
"아…."
"나 또한 그렇게 그의 흔적을 추적해서 잡으려고 했는데…."
"제가 와버렸네요."
"그래. 하지만 네 잘못은 아니야. 덕분에 로드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이 궁을 차지하는 것도 큰 수확이거든."
"아, 맞다. 그릇이라는 건요? 찾았어요?"
"아니. 없어. 이 큰 궁에서 그걸 찾는 것도 애초에 무리였을지도 몰라. 자매들이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실비아가 도화지를 이끌었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마법진 중앙에 도화지를 앉게 했다. 어지러운 도형이 가득했는데 그걸 보면서도 도화지는 눈만 끔뻑거렸다.
"된 거예요?"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내가 마법진을 활성화하면 너는 움직일 수 없어. 저쪽 세상에서 너를 바라는 간절함이 이 마법진에 흘러와야 해."
"아…. 얼마나 걸리는데요?"
"몰라. 1년일지, 10년일지. 아니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허억…. 그렇게나요?"
"쉬웠다면 누가 여기 남아 있겠니? 다 최상층으로 넘어갔겠지?"
"그건 그렇네."
"자, 이제 마음 편하게 가지고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길 기도해. 의식의 흐름은 시공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 물질은 시간에 갇힐 수밖에 없지만, 의식은 그 어느 것보다도 위대하거든."
"그 의식이란 게 뭔데요?"
"사랑, 행복, 우정, 상상, 꿈과 희망. 혹은 반대로 고통과 상처, 마음의 파괴와 저주. 그런 것들이야."
"아…."
"시작할게. 뭔가 느껴지거든 내게 말해줘."
"네!"
.
.
.
【미션 완료까지 19시간 33분 남았습니다.】
"하악, 하악…. 다 잡았나?"
김우태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봤다. 장장 4시간을 싸웠다. 재료 수집망으로 생물들을 넣으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형, 아무래도 저쪽으로 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까처럼 모래가 다량으로 흘러들어오면 또 이런 것들이 잔뜩일 테니까요."
"알았어. 조금만 쉬고 가자."
우리가 지금 어디쯤인진 모르겠지만 입구에서 가깝다면 모래가 또 들이닥칠 게 분명했다. 흘러든 독충이 내게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김우태에겐 달랐다.
생각해보라. 세상 모든 생물이 나를 적대하는 광경을.
"아, 따가워…."
김우태가 힐러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4시간 전에 죽었을 거다. 하지만 그의 재생력은 무지막지할 만큼 놀라웠는데 아무리 물리고 쏘이고 베여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체력이 떨어진 것까지 복구할 순 없었다. 흘린 피까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이곳엔 수혈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었으니까.
"형. 앞으로도 이런 괴물들을 수없이 마주치게 될 거예요. 아까 보니까 형은 습관적으로 주먹이나 킥을 쓰는데 이런 놈들에겐 무기가 더 잘 먹혀요. 사람들이랑 싸웠던 걸 빨리 잊어야 해요."
"나도 알아. 근데 주먹이 먼저 나가는 걸 어떡하냐."
평생 그걸 배웠으니까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뱀을 주먹질로 잡는 건 비효율적이다. 날아오는 전갈을 잘못 쳤다간 독에 쏘일 것이다.
"아? 근데 형, 진짜 아무렇지 않아요?"
나는 바닥에 있는 전갈 한 마리를 집어 들면서 물었다.
"이거 딱 봐도 독 전갈인데요? 아까 맞지 않았어요?"
"그랬지. 뱀한텐 최소 50번은 물렸을걸?"
그가 힐러라서 그런지 아니면 재생력이 독까지 이겨내는진 모르겠지만 김우태는 멀쩡했다.
"흠.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당연하지! 원래 힐러는 어느 게임에서나 귀족이라고!"
"이건 게임이 아니잖아요."
"내 생각엔 비슷해. 이 시스템 자체가 아주 인위적이고 작위적이야."
"…네?"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내가 느낀 건, 이 미션도 그렇고…. 전부다 누가 만든 것 같지 않냐?"
"누가요?"
"모르지. 아무튼 그래. 만일 내 생각대로 이 시스템을 누가 기획했다면 내가 그 정점에 올라서지 말란 법도 없어."
"정… 점이요?"
"당연하지! 이왕 시작했는데 최고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포인트도 쉽게 벌지! 오십오만 포인트! 음하하하하!"
김우태가 일어나며 말했다.
"가자. 또 모래 홍수가 나기 전에. 이것들이라면 지긋지긋해."
뱀, 전갈, 개미, 도마뱀 따위를 최소 500마리는 죽였다. 그나마 놈들의 공격성이 다 김우태에게 몰렸으니 빨리 처리한 거다.
김우태가 저쪽으로 걷는 걸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더 강한 사람이야.'
그렇게 물리고 깨지고 다쳤었는데 태연하게 걷는다. 아무리 상처가 재생되었다지만 그때 느꼈을 고통은 만만치 않았을 거다. 원래 자동차 사고가 나면 다 회복되어도 트라우마가 남아서 운전대를 잡기 힘들다. 그처럼 김우태는 최소 500번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도화지랑 합류해서 셋이 함께하면 전보다 더 강해지겠지?'
문득 도화지가 생각났다. 그녀는 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방어력은 수준급이지만 재능마켓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은 그녀여서 걱정이 된다.
"형! 천천히 가요!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너무 서두를 건 없어요!"
마지막 전갈을 재료 수집망에 넣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오케이! 근데 너, 저거 보이냐?"
"뭐요?"
내가 따라잡으면서 그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들었다.
"…."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 뭔가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뭐 같냐?"
"넝쿨?"
"아니야. 그런 게…. 내가 시력이 꽤 좋거든?"
시야를 확보할만한 건 내가 든 화살 횃불밖에 없었다. 저렇게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일 순 없었다.
"저거…. 살아 있어."
"헉. 뭔데요?"
"그건 몰라. 근데 저 움직임이 나를 향하잖아. 하아,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냐. 이것 때문인가?"
김우태가 인형을 들어 보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분 나빠. 미션만 끝내면 불태워버리자. 나도 너처럼 근사한 무기 하나 장만해야지."
"네…."
왠지 또 다른 시련이 김우태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애써 웃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20분가량 걸었다.
"뭐가 이렇게 크냐. 가도 가도 끝이 없네."
아까도 느꼈지만, 우리가 들어있는 이곳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살아 있는 무언가일 확률이 높다는 거다.
"형."
"응?"
"잠깐만요."
나는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곤 범이의 등에 손을 올렸다.
"쉿."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