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나는 그의 팔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도화지가 아니라 김우태라니! 나 역시 심각하게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두 번째라서 그런가? 일단 김우태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는 걸 알았다.
"야! 잠깐만! 뭘 하려는 건데?"
"이거 보이세요?"
유리 벽 뒤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면서 김우태가 눈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이게 다 뭐야…."
"오래 걸리지 않을 거거든요? 형,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하잖아요. 속는 셈 치고 10분, 아니 5분만요!"
일단 나는 빠르게 안쪽을 눈으로 훑었다.
'있다!'
내가 만들었거나 경험했던 드링크는 드링크 자체로 팔거나 레시피를 구입할 수 있었는데 '자라나라! 얍! 드링크'가 필요했다.
【레시피를 구입하시겠습니까?】
5,000p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이번 미션을 하면서 결정적인 효과를 봤던 드링크라서 만들어두긴 해야 했다.
【이제 '자라나라! 얍! 드링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단 레시피를 산 뒤 벽장으로 달려갔다. 이번에 미션을 하고 난 후 보상을 확인하지 않았었다.
벌컥!
열었더니 수많은 돌이 반짝였다. 당연했다. 내가 사냥한 차우가 대체 몇 마리였던가? 늑대인간으로 변한 차우까지 합치면 200마리가 넘었다.
【빈 병을 얻었습니다.】
【차우의 세포x180.】
각종 빈 병과 소재들이 가득했다. 아이템도 몇 개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드링크부터 만들어야 했다.
"형!"
"어…."
나는 빈 병과 재료를 가지고 김우태에게 갔다.
"잘 보세요. 제가 이제 이걸로 드링크를 만들 건데 이게 효과가 확실하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걸려요."
【'자라나라! 얍! 드링크'를 제조했습니다.】
【드링크가 숙성합니다.】
"형, 무슨 소리 안 들려요?"
"페널티가 있다는데…."
"무슨 페널티요?"
"내가 여기로 너무 늦게 들어왔대."
"으음…. 다른 건요?"
"몰라."
"알겠어요. 일단 알아야 하는 것들이니까 제가 설명할게요."
나는 벽장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재능마켓 시스템을 빠르게 알려주었다. 그리곤 이번 미션에서 얻은 돌을 확인하면서 아이템을 얻는 방법도 차근차근 보여주었다.
【두꺼운 늑대 망토(레어): 혹한에 버틸 수 있는 발열 망토.】
"형은 모든 게 낯설겠지만 이런 거 하나하나가 나중에 목숨을 하나 더 여벌로 두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하…. 이게 다 뭐냐. 무슨 게임도 아니고."
"맞아요!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는 게임이라는 거에요. 만약 형이 더 늦게 들어왔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거든요."
【차우 뼈로 세공한 반지(레어): 재생력+1. 방어력+1.】
쓸만한 아이템이 2개나 나왔다. 이번 미션에서 재생력과 방어력의 효과를 체감했었기에 내겐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재생력이 올랐습니다. 방어력이 올랐습니다.】
내가 반지를 끼고 망토를 개인 벽장에 넣는 것을 보며 김우태가 물었다.
"왜 저기에서 거기로 옮겨?"
"저 장롱은 아이템 회수용이고 여긴 제 개인 공간이에요."
김우태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진정되어 보였다.
"…이게 뻥이 아니라고 치고. 저 진열장 안의 물건들이 다 실화면…."
김우태가 침을 꿀꺽 넘겼다.
"러브러브 매혹 팔찌라는 것도 진짜냐?"
"…러브 뭐요?"
아무리 내가 지력+4라지만 관심 없는 것들까지 죄다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저기 있었어. 하나씩 나눠서 차면 없던 정도 생긴다고…."
"저 많은 물건들 중에서 왜 하필 그건데요?"
나는 기막혀서 유리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김우태가 말한 러브 뭐기시를 봤다.
"일십백천만십만…. 허억. 오십오만 포인트?"
어이가 없어서 김우태를 바라봤는데 김우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물었다.
"왜? 비싸?"
"당연하죠! 오십오만이면 몇 달을 모아야 할지 모른다고요!"
"몇 달이라…. 고작 그거면 되는 거냐?"
그래, 안 먹고 안 쓰고 죽을 고비 계속 넘겨 가면서 포인트만 악착같이 모으면 6개월 정도 걸리겠다. 하지만 이건 현실 시간 기준이지 재능마켓 내에서 대체 얼마의 시간을 보내게 될진 누구도 모른다. 그 어마어마한 고생을 한 뒤에 저걸 하나 사겠다고?
"…."
"…."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동자가 뭘 갈망하는지 번뜩 느껴졌다.
"…왜?"
채린이구나.
"…된다며?"
그 채린이를 위해서 오십오만을 쓰겠다니.
"하아, 건투를 빌게요."
자기가 번 포인트 자기가 쓰겠다는데 어쩌겠나.
'지내다 보면 더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되겠지.'
나는 그에게 몇 가지 규칙을 더 알려주었다.
"하루 한 번 이용하는 거예요. 일단 들어오면 밖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니까 명심하셔야 하고요. 어떤 미션들은 시작되면 탈출이 불가능하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요."
"너가 그래서 그렇게 강했구나. 어쩐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니까."
"형도 강해질 거에요. 꼭 그래야만 하거든요. 살아남으려면…."
김우태가 피식 웃었다. 이제 웃기까지 하는 걸 보면 진정이 된 것 같다.
"야, 난 이미 강해."
드링크가 숙성되길 기다리면서 많은 얘길 해 주고 있는데 메시지가 들렸다.
【파티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
우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파티 미션을 시작합니다.】
【대상이 고를 수 있는 두 가지의 직업이 있습니다.】
여기까진 도화지 때와 똑같았다.
【힐러: 강력한 재생력을 바탕으로 파티원과 고통, 상처를 공유할 수 있다.】
【무투가: 무기를 쓰지 않고 육체 강화를 통해 적을 멸한다.】
"도화지랬나? 그 여자애가 추적자랬지?"
"네. 신중하게 고르셔야 해요."
【직업을 선택하면 파티 미션이 시작됩니다. 미션을 완료하지 않으면 재능마켓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네 생각은 어떤데?"
"모르겠어요."
정말 어렵다. 뭘 골라도 우리에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한번 선택한 직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1분 안에 선택하지 않을 시 베네핏이 소멸합니다.】
"그러면 나는…."
김우태가 말했다.
"힐러 할래."
"엥?"
"왜?"
"아, 아니요."
의외였다. 그의 성격상 파이터가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힐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10분 후 필드로 이동합니다. 힐러를 위한 베네핏을 수령하세요.】
김우태를 이끌고 장롱으로 갔다.
"진짜 신기하네. 이거. 아까는 분명히 없었는데? 누가 넣어두고 간 거냐?"
"몰라요. 여긴 상식으로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일단 이 물건들이 형 거에요."
【힐러의 내복: 재생력+4. 고통 분담+4. 매력-1.】
【힐러의 하의: 재생력+3. 고통 분담+3. 매력-1.】
【힐러의 상의: 재생력+3. 고통 분담+3. 매력-1.】
어마어마한 스텟들이 붙어 있었다.
"…."
그런데 나는 차마 김우태에게 어떤 말을 하지 못했다.
'왜 마이너스가….'
이제까지 재능마켓을 이용하면서 마이너스 스텟은 처음 봤다.
"입으면 돼?"
"네,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알았어. 근데 디자인이 너무 구린데? 우리 할머니 바지 같다."
디자인만 그러면 다행이지. 저 마이너스 매력이 어떻게 작용할지 벌써 겁이 난다. 심지어 다 합치면 –3이다….
"나중에 커스텀하면 저처럼 바꿀 수 있어요."
"오! 그러냐?"
아직도 알려줘야 할 게 많았다. 매력-3은 일단 최대한 뒤로 미루자….
그가 옷을 모두 갈아입자 나도 그사이 장비를 챙겼다. 막 미션 끝내고 왔는데 또 떠나게 생겼다. 어차피 도화지가 오지 않았으니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쉴 틈 없는 하루다.
"형은 이 가방 잘 지켜주세요."
여분의 가방을 그에게 건네주고 나도 앞뒤로 멨다. 그간 밖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꽤 있어서 어떻게든 활용해서 써야 했다.
"어. 우리 이제 뭐 하냐?"
"가봐야 알아요. 범아! 가자!"
2층으로 올랐다.
【필드 입장까지 1분 남았습니다.】
"첫 미션이니까 난이도가 높진 않을 거예요. 제가 있으니까 긴장 푸세요."
"나 긴장 안 했는데?"
"…조금은 해주실래요?"
"킥킥. 빨리 가서 55만 포인트 모아오자. 팔찌 사야 돼."
"…."
진심이냐. 진짜?
"형,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반투명한 막 앞에서 내가 말했다.
"뭔데."
"왜 힐러였어요?"
"내가 많이 깨져봐서."
"네?"
"어렸을 때부터 하도 부러지고 다치다 보니까 그럴 때마다 누가 나 좀 살려줬으면 했었거든. 싸우는 거야 배우면 다 할 수 있지만 고치는 건 아무나 못 하는 거잖냐."
심오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가요."
나는 먼저 앞으로 나섰다.
【안전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파티 미션을 시작합니다.】
환경이 바뀌었다.
"보통 필드로 넘어오면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부터 시작해요. 저기 박스 보이죠? 저 안에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잘 챙겨야 해요. 근데 이번엔 제가 많이 챙겨왔으니까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늑대 인간으로 변한 차우 100마리까지 상대했던 나다. 이제 웬만해선 어떤 미션이 나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올, 자신만만한데?"
"제가 그동안 고생 좀 했거든요. 하하!"
베이스캠프에서 이렇게 웃을 일이 다 있다니.
일단 박스를 열었다.
【드링크 제조용 병X5를 얻었습니다.】
이건 항상 나왔던 거고.
【저주받은 인형(미션 아이템).】
또 처음 보는 단어가 등장했다.
'미션 아이템?'
김우태가 인형을 집어 들었다.
"참 기분 나쁘게도 생겼네. 이거 뭐 사탄의 인형, 그런 거냐?"
그가 말하자마자 미션이 떴다.
【재능마켓 입장 시간을 여겼기에 페널티가 발생했습니다.】
"어?"
페널티?
"뭐래?"
【파티 미션(레어): 필드에서 저주받은 인형 24시간 소지하기.】
【힐러는 고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저주받은 인형을 버리면 모든 힐러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확정 보상: 40,000P.】
【파티 미션에서 힐러가 사망하면 나머지 파티원은 탈출할 수 있습니다.】
"헉…."
첫 미션인데 난이도가 레어다. 심지어 확정 보상이 무려 40,000포인트란다. 도화지 때가 10,000이었는데 이건 얼마나 어렵다는 얘긴가?
"…."
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김우태를 보았다. 어떤 미션이 나와도 상관없다는 말 때문에 저주받은 인형이 나왔나?
"야, 이거 계속 들고 다녀야 하는가 본데?"
【저주받은 인형: 못생겼다. 아무튼 본능적으로 못생겨서 모든 생명체가 무조건 적대하는 인형이다. 소유자 역시 같은 취급을 받는다. 매력-3. 인형으로 공격 시 힘+3. 모든 추가 타격+3.】
어째 이런 일이….
"우와, 힘이 +3이나 된다는데?"
김우태가 인형을 들더니 신기한 듯 자신의 주먹을 쥐어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장난 아닌 것 같다! 샌드백이라도 쳐야 할 것 같아!"
김우태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빈 상자를 보더니 발로 냅다 걷어찼다.
"…커억…."
하지만 고통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아픈지 한 발로 통통 튀며 아야야! 소리치는 그를 보며 나는 문제를 지적해주었다.
"형, 그거 인형으로 공격하래요…."
"그게 무슨 말인데?"
하아, 어째 이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