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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128화 (128/277)

#128화

의자가 아래로 푹 꺼졌다.

"꺄아아아아!"

도화지는 소리쳤지만, 곧 그리 위험하진 않다고 느꼈고 입을 다물었다. 추락하는 게 아니라 의자 자체가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그그그그긍!

100미터쯤 내려왔을까?

빠르게 내려가던 의자가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느려지더니 바닥에 닿으며 멈춰 섰다.

"와아…. 이게 다 뭐야…."

위에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성이었지만, 이 아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온통 황금빛이 찬란했고 아름다운 문양들이 벽과 천장에 각인되어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곳이었는데, 도화지는 흠칫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손하게 손을 모은 여자가 펑퍼짐한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여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눈동자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형처럼 서서 여자가 말했다.

"로드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로드라는 말에 도화지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시녀들인가?'

복장이나 행동을 보면 맞는 것 같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으음…."

도화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건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둘러봐도 돼요?"

"뜻대로…."

시녀가 옆으로 물러서며 말하자 도화지는 침을 꼴깍 삼키고 걸었다.

긴 복도는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수많은 방이 있었고, 시녀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청소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드가 사라진 걸 모르는구나.'

몇 명은 도화지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것도 못 본 사람들처럼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기분으로 도화지는 계속 이동했는데, 누구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와…."

천장엔 어마어마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마치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 온 것처럼 벽과 천장에 그림이 그려있었다.

이때였다.

"히이익?"

누가 자신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에 도화지가 기겁하며 돌아섰다.

"…어, 언니?"

실비아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화지가 사라진 구멍으로 내려온 실비아는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혹시 도화지가 잘못된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었다.

"확실히 로드는 최상층으로 떠났어."

"저도 그래 보여요."

두 사람은 홀을 둘러보며 끄덕거렸다.

"저들은 우릴 공격하진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릇을 찾아볼게!"

밖에선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다급한 실비아가 저쪽으로 뛰어가자 도화지는 반대편으로 뛰었다. 뭐라도 찾고 싶었다.

'여기 어딘가에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그녀의 마음도 실비아처럼 다급하긴 마찬가지였다.

.

.

.

【축하합니다! 늑대인간 100마리를 사냥했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늑대는 당신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100마리의 늑대인간을 죽였을 때, 더는 살아서 움직이는 게 없었다.

"하아, 하아…."

나도 온몸에 상처투성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이겨냈고, 잡은 늑대인간을 재료 수집망에 넣었다.

"진짜…. 힘들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범이가 도왔고, 뱀파이어 날개와 철벽 스킬을 적절하게 쓰면서 위기를 넘겼다. 하나라도 없었다면 내 옆구리에서 내장이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옆구리를 만지면서 침을 삼켰다.

'재생력이 이런 거구나.'

피부 안쪽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찢어졌는데,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흥건한 핏자국이 얼마나 위험한 상처였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늑대인간을 수집했습니다.】

내가 지나온 싸워왔던 길을 거스르며 늑대인간 시체를 수집하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1초도 쉴 틈 없이 싸웠었는데, 이젠 달빛 아래 꽃밭을 걸으며 유유자적한다.

"하아…끝났다."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늑대인간 시체를 회수한 뒤 나는 마을로 내려갔다.

-오오오오오오!

-거인이 왔다!

-그가 왔어!

촌장이 구부정한 허리로 마을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살아 돌아왔구먼."

나는 그에게 열매를 내밀며 웃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자네가 할 건 없고, 우리가 약을 만들어야지."

"시간이 별로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간 위급할 거라고."

"알았네, 알았어."

자기 몸집만 한 열매를 수레로 운반하면서 부랴부랴 움직이는 그들을 보곤 나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불쑥 촌장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차우들은 모두 물러갔나?"

"몰라. 다 죽었는지. 더 있는지."

몸의 상처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적어도 10곳 이상 치명적으로 베었고, 20곳 이상의 타박상이 있었다. 이런데도 살아있는 게 용하다. 철벽과 재생력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약을 쓰면 병은 치료할 수 있을 거네. 자네가 고생해서 따왔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데 지금, 열매가 맺을 시기가 아닐 텐데, 어떻게 열매를 따온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식물을 성장하는 드링크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촌장이 감탄하며 물었다.

"오오오오! 그런 효과도 있는가?"

마을에서 병을 제작하긴 하지만, 이들이 모든 드링크를 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는 약국이 아니라 병을 만드는 공방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새끼 차우들은 달빛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어디엔가 숨어있을 거네. 그들이 다 자라면 또 악몽이 시작되겠지만 한동안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테니, 자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평소엔 차우들을 어떻게 막지?"

"차우는 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네."

달꽃의 경계가 녀석들의 감옥이 되었다.

"보답하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나?"

"나는 빈 병이 필요해. 아주 많이. 너희가 만드는 저거."

"모든 마을에게 자네가 차우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치료할 약을 구해온 사실을 알리면 꽤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을 거네. 더 필요하다면 계속 만들어 둘 테니 다음에 가지러 오겠나?"

"글쎄,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음에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과정만 보면 도화지가 미션을 할 때 같이 오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직 미지수였다.

그런데 그때, 촌장이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자네…."

"…?"

"그 전설을 들어보았나? 아깐 반신반의했는데, 차우를 물리치고 열매를 따온 자네를 보고 있자니 생각이 나서 말이네."

"무슨?"

"어떤 수호자는 다른 세상과 이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고 하네. 과거에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했어."

"…수호자라고?"

눈이 번뜩 뜨였다.

"아주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 수호자는 분명 그런 말을 했다고 했네. 다시 올 방법을 찾았다고. 꼭 돌아오겠다고."

"그래서? 그가 돌아왔어?"

"아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수호자도 분명 자네처럼 몸집이 아주 큰 거인이었다고 하지. 차우도 쉽게 상대했다고 하고."

"으음."

그가 20년 전의 수호자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라는 말이 거슬렸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는 최대 확률은 많아 봐야 1번이 남았다. 도화지가 미션을 하고 나면 더는 올 방법이 없는 것 아니었나?

'근데 다시 온다고?'

그가 괜한 말을 했을 것 같진 않다. 허언증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다른 세상까지 와서 그런 거짓말을 떠벌릴 이유가 있을까?

"아까 자네에게 모질게 군 건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가 다시 오게 된다면 우리 종족은 자네를 무조건 반길 거네."

약이 완성되는 동안 소문이 퍼졌는지 인근 마을에서 수레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릴 구해준 거인이다!

-고맙습니다!

연신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들을 보며 가슴 한켠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우와…. 대박."

그들이 모아온 빈병들로 가방을 가득 채울 수 있었는데, 보답이라며 마을 곳곳에서 가져온 빈 병은 2가지 재료 조합 병부터 4가지 조합 병까지 다양한 병이 무려 30개가 넘었다.

약이 완성되자, 나는 마을로 향했다. 이미 아이들도 소문을 듣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거인 만세!

약을 광장에 내려놓자 아이들은 그걸 떠서 각자의 집으로 속속 돌아갔다.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효과는 확실했다.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이번 미션도 쉽진 않았지만, 나는 해냈다.

"고마워. 또 올 거지?"

내 앞에서 입을 삐죽이며 선 꼬마를 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등을 톡 밀었다.

"건강해라."

그리곤 가방에 남아 있던 모든 초코바와 비상식량을 다 꺼내주었다.

【축하합니다!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도화지는 돌아왔으려나?'

그건 여기서 나가면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서 재능마켓으로 넘어왔다. 그리곤 잠시 기다렸지만, 인기척이 없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쉬며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인가….'

【재능마켓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했습니다.】

가방을 벽장에 넣고, 샤워실부터 직행했다.

솨아아아아아.

본랜 옷을 벗어야겠지만,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고치려면 물을 맞아야 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범이의 몸을 손으로 슥슥 닦아주면서 한참을 씻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끼이이이익.

몸이 현관 쪽으로 획! 돌아갔다.

"…?"

누나가 왔나? 아니면 난입 미션?

두근, 두근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활을 소환했을 때, 열린 문 사이로 피 묻은 손이 쑤욱 들어왔다.

"허엇?"

구울인가? 아니면 뱀파이어?

이때, 범이가 현관을 향해 날아올랐다. 벌컥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려던 누군가가 벌러덩 넘어졌다. 그 위를 범이가 올라탔다.

"…하악?"

그도 놀랐고,

"어억?"

나는 더 놀랐다.

"혀, 형?"

김우태가 왜 여기에 있나?

활을 치우면서 그에게 달려갔다. 앞가슴과 팔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지금도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단 이러고 있을 여윤 없었다. 복도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진짜 이상할 거다.

"빨리 들어오세요!"

내가 나가면 오늘은 다시 못 들어온다.

"어? 어어어?"

김우태가 어버버 말도 못 하고 있자 범이가 그의 옷자락을 덥석 물더니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콰앙.

문이 닫혔다.

"…."

"…."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그의 코에서 피가 멎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혀, 형. 머리가…."

성성한 머리는 꼭 누군가에게 사정없이 잡아 뜯긴 것처럼 숱이 없었다. 그것 때문인지 3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니가 왜…."

김우태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이해한다. 누구라도 재능마켓에 처음 오면 이럴 거다. 나도 더하면 더했었지….

"형, 침착하고요.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아셨죠?"

"어? 어어어…."

그의 양쪽 팔을 손으로 붙잡고 나는 천천히 말했다. 내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김우태는 목각인형처럼 얼굴만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물었다.

"다했냐?"

"네?"

"다했냐고."

"…?"

그가 내 팔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나 지금 심각하게 짜증 나 있거든? 몰래카메란지 뭔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만 하자."

그가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 나는 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형! 바로 나가면 안 돼요!"

"…그만 하라니까?"

그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게 생각났다.

"아! 형! 잠깐만요! 5분만요! 직접 보시면 믿을 수 있을 거예요!"

"…뭘?"

"형, 머리요! 제가 다시 자라게 해드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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