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시간이 흐를수록 아비규환이었다.
'오른쪽, 왼쪽, 대각선, 아래!'
놈들의 수는 더 많아져서 이젠 사방에서 놈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퍼억-!
한 놈의 주먹이 등을 때렸다.
"크윽!"
절로 신음이 터졌지만, 버틸 수 있다. 철벽 스킬 덕분에 놈들의 공격력이 상당히 상쇄되었다. 그렇지만 놈들의 손톱은 조심해야 했다. 아무리 철벽이라도 놈들이 할퀴면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다.
퍼억, 퍽! 퍼버버버벅!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갔다.
내 주변으로 놈들의 시체가 계속 쌓였다. 나는 쓰러진 놈의 몸을 밟고 훌쩍 뛰어올랐고, 내가 있던 자리에 들어온 놈의 정수리를 향해 활을 쐈다. 그러면서 시체 하나를 걷어찼다. 설 자리가 없는 거다.
'철벽이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주고 있긴 하지만, 계속 이렇게 하다간 버틸 수 없어.'
죽은 녀석들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꽃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고민은 잠깐이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 성큼!
죽은 놈들의 몸을 밟고 힘껏 뛰었다. 그러면서 저 아래를 향해 활을 쐈다.
【뱀파이어 날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리 높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가 시야를 넓게 했고, 본래 활이란 무기는 위에서 쏠 때 더 위력적이었다.
퍼억-!
창처럼 위에서 내리꽂히는 화살에 한 녀석의 몸이 수직으로 꿰뚫렸다.
착지하자마자 옆으로 또 뛰어올랐다. 아주 잠깐이지만 날개가 펼쳐지는 그사이엔 허공에서 멈출 수 있었고, 이때 쏘는 화살은 높은 지점에서 발사된다.
'멀리 벗어날 순 없지만, 확실히 편해졌어.'
나는 계속해서 놈들의 몸을 밟고 뛰며 화살을 쐈다. 이제 꽃은 놈들의 시체 때문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지만, 놈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더 높이 뛸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좀 더 가까이 와라.'
이 얼마나 놀라운 적응력인가?
나는 일부러 2초가량 참았다. 미리 맞출 수 있었지만 한 놈이 다른 놈의 몸을 밟고 올라서길 기다렸다가 활을 쐈다.
퍼억-!
놈이 쓰러지며 데굴데굴 아래로 굴렀다. 그게 계단이 되어 주었고, 나는 곧장 더 높은 곳으로 밟아 올라가면서 뛰었다.
날개가 펼쳐질 때, 몸을 돌려면서 또 한발!
컹!
여기저기 할퀴었는지 내 피가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아드레날린 덕분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상처가 재생합니다.】
【출혈을 멈춥니다.】
【피부가 아뭅니다.】
중급 필라테스로 획득한 재생력+3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놈들처럼 배가 뻥 뚫려도 달릴 수 있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수 없이 당한 공격들이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아직도 저렇게 많은가….'
그러나 낙관할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아우우우우우우!
꿈에 나오면 몸이 절로 바르르 떨릴 것만 같은 저 울음소리는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사아아악!
또 한 녀석의 발톱에 내 허리를 쓸었다. 철벽 스킬과 수호자의 코트, 셔츠가 먼저 막아주는데도 살이 갈라진다.
'윽.'
하지만 살을 내어줬으니 이제 뼈를 취할 차례.
핑!
쏘아진 화살이 녀석의 두개골을 꿰뚫었다. 간신히 녀석을 쓰러뜨렸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 있을까?
1시간?
설마 밤새 이럴 건 아니겠지? 생각이 스칠 때였다.
【달꽃이 열매를 맺습니다.】
"아앗!"
정신이 번쩍 드는 메시지에 나는 급히 움직였다. 지금도 녀석들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5미터 앞에 하나 8미터 앞에 또 하나가 가깝다. 그 뒤론 10여 마리가 거리를 좁히고 있다. 한마디로 쉴 틈 따윈 없다는 뜻이었지만, 이 모든 고생이 저 열매 때문이었으니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
찰나였다.
봉오리가 열리면서 그 안에 우윳빛 동그란 열매가 맺혀있는 게 보였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는데, 나는 아마 평생 이 순간을 못 잊을 것 같았다.
'됐어!'
열매에 손을 뻗으며 나는 외쳤다.
"범아아아아아아!"
튀자!
덥석 잡은 달꽃 열매가 주는 감촉은 굉장히 차갑고, 반질반질했다.
갸르르르르릉!
불쑥 놈들의 시체를 밟고 선 범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순간,
"이크!"
나는 후욱 몸을 숙였고, 범이의 앞발이 늑대인간을 후려쳤다. 내 뒤를 노리던 놈이었다.
나는 훌쩍 범이의 몸에 올라탔다. 그리곤 말했다.
"여길 벗어나야 돼!"
열매를 땄으니 이곳을 고집할 필욘 없었다. 나는 범이의 몸에 올라탄 채로 활을 쐈다. 정확도는 떨어졌지만, 놈들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범이 역시 무작정 달리는 게 아니라 앞에 늑대인간이 있으면 앞발로 후려치면서 퇴로를 뚫었다.
"저쪽으로 가자!"
열매를 얻었지만, 마을로 갈 수 없었다. 저놈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밤이 끝나기 전엔 계속 따라올 거다.
다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핑-!
경계하며 쏜 화살이 한 놈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늑대인간 71마리를 사냥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범이의 몸에서 마구 쏜다고 화살이 맞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명중률 보정이 있다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조준으론 빗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범이의 발이 내려서는 순간이나 방향을 바꿨을 때, 잠시 주어지는 멈춤을 이용해서 시위를 놓았다.
'흔들림에 익숙해져야 해.'
그나마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암벽등반 훈련으로 악력뿐만이 아니라 몸의 균형을 잡는 것도 숙련되어서였다.
-아우우우우우우!
놈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었다. 아까는 사방에서 몰려와 방어가 힘들었는데, 그나마 이젠 따라오는 놈들을 맞추는 거라서 훨씬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지킬 대상이 사라져서 자유도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핑-!
【늑대인간을 74마리 사냥했습니다.】
범이와 나는 계속해서 산을 달리며 놈들을 쓰러뜨렸다. 늑대인간이 느린 건 아니었지만, 범이가 더 빨랐다.
【펫과의 교감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중급 궁술을 얻었습니다!】
【중급 궁술: 이제 탈것을 이용하여 활을 쏠 때 조준이 정밀해진다. 또한 탈것에서 이탈할 확률이 줄어든다.】
"호오오!"
스킬이 또 생겼다.
"범아, 달려!"
.
.
.
"이명이요?"
그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그래요. 아무래도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 것 같은데, 잠시 쉬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약은 없어요? 고칠 순 있는 거죠?"
의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명 환자가 자주 오지만, 이렇게 젊은 친구는 드문데 안타깝다.
"이명의 상당 부분은 정신적인 문제에서 기반하기 때문에 약을 써도 듣질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고쳐보려면 다양한 시도는 해봐야겠죠."
"허억…. 그러면 평생 못 고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벌써 낙담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해봅시다. 말했잖아요. 정신적인 문제로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줄여야 돼요. 흐음, 어때요? 지금도 들리나요?"
"네."
"뭐라고 들리죠?"
"9분 안에 재능마켓에 입장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 거라는데요?"
"하아…. 심각하군요. 보통, 이명은 그렇게 선명한 단어나 문장이 들리기 어려운데. 혹시 어렸을 때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정신과 상담부터 받아보는 것도 이명을 없애는데 좋을 겁니다."
의사는 차트를 보면서 환자를 안심시켰다.
"아버지께서 체육관을 하신다고 하셨죠? 혹시 어렸을 때 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었나요?"
"그거야 뭐…. 항상 있는 일이라서."
유치원보다도 체육관을 먼저 다녔으니 폭력은 그에게 특별한 이슈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으음…. 그게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아팠던 기억이 뇌에 충격으로 남아서 이명이나 환청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모든 병엔 원인이 있는데 이명은…."
의사가 더 큰 한숨을 쉬었다.
"김우태 씨의 정신적인 어떤 부분 때문에 발생했을 확률이 높아요. 일단 약을 처방해드릴 건데, 무기력해지거나 졸릴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복용하실 때 과격한 운동은 삼가시고 안정에 좋은 활동을 해보세요. 음악을 감상한다든지…."
"음악은 지금도 매일 들어요."
"무슨 음악인가요?"
"주로 채린이 부른 거요."
"채린이 누군가요…."
"우주 대스타 채린을 모르세요? K오디션에도 나왔었고 이번에 정식으로 데뷔도 했는데요!"
산적처럼 생긴 남자가 아이돌 얘길 하자 의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거 말고 클래식이나 피아노 연주 같은 걸 들어보세요. 심신을 안정해주는 효과가 검증된 곡들이 있을 겁니다."
"채린 노래 들으면 저는 심신이 안정되는데요?"
이 건에 대해선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표정에 의사는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곤 말했다.
"최대한 푹 주무시려고 노력하시고, 일주일 후에도 차도가 없으면 다른 약을 써보죠."
"아, 네. 이제 가면 되나요?"
"일주일 후에 뵙겠습니다. 그사이에 증세가 심해지면 정신과도 꼭 방문해보세요."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김우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막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허억?"
그의 코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화, 환자분? 괜찮으세요?"
"어? 어어어어?"
김우태도 손등으로 스윽 코밑을 쓸었다가 깜짝 놀랐다.
의사가 벌떡 일어나 김우태에게 다가와 응급조치를 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커헉-!"
갑자기 피를 토했다.
그 피가 책상 위에 뿌려지자 의사가 기겁했다.
"가, 갑자기 왜?"
코피와 각혈을 동시에 하다니?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아이돌 얘길 하던 건장한 젊은이가 이럴 수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던 김우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잔뜩 겁에 질린 그를 보며 의사가 급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김우태 씨!"
하지만 김우태는 겨우 말했다.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몸을 돌린 김우태가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곤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환자분! 계산하셔야죠!"
김우태는 지갑을 통째로 간호사에게 던지며 더 빠르게 달렸다.
우수수수수수.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허억-!"
목숨보다 소중한 머리카락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지자 김우태는 미칠 지경이었다.
'주, 죽는다!'
【1차 입장 기한을 어겼습니다. 탈모와 발기부전, 출혈이 시작됩니다. 입장한다고 해도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타, 탈모? 시, 싫어!'
【58분 남았습니다.】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뒤론 이명이 맞는 것 같았다. 오래 격투기를 한 사람들 중에서 이명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꽤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그게 아닌 것 같다.
주륵, 주르르륵.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냥 달리기만 했는데 머리칼이 빠졌다. 채린과 결혼하는 게 꿈인 그에게 이건 하늘이 무너지는 일과도 같았다.
"아, 안돼애애애애애!"
차에 올라탄 그가 비명을 질렀다. 앞머리가 통째로 사라락 빠져서 눈 앞을 가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