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나는 옆의 항아리도 뽑아보았다.
【사용한 병(레어): 저장 용기로 쓸 순 있지만, 숙성 효과는 없다.】
"허엇! 그거 어서 내려놓게! 그 안에 우리 일주일 치 식량이 들어있다고!"
촌장의 말에 나는 항아리를 다시 땅에 묻으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만들어?"
"말했잖나. 우리 종족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만드냐고."
"에헴! 그건 말일세…."
"짧게!"
땅을 파면 모래가 나온다. 그 모래를 이 꼬마들이 열심히 주무르면 유리처럼 변하는데, 그렇게 만든 용기엔 특별한 힘이 깃든단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못 만든다는 거다.
"…남는 거 좀 있어?"
"항아리가 필요한가? 흐음, 좋네! 자네가 저 산에서 차우를 완전히 몰아내 주면 우리도 자네를 돕지!"
그건 어려운 게 아닌데….
"몇 개나 있어? 이런 병, 아니 항아리가?"
"쓰려고 만들어둔 게 2개 있지만, 오늘부터라도 우리가 힘을 모아서 만들면 하루에 1개는 만들 수 있지!"
"허얼, 겨우?"
"겨우라니! 농사도 지어야 하고 가축도 돌봐야 하지만, 그걸 다 재껴 두고 모두 달라붙어야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리고 모래 빗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땅을 파내는 것도 엄청난 노동이 든다고!"
땅이라….
"파면 모래가 나와?"
"이 근처는 다 그렇지."
나는 씨익 웃었다.
"좋아. 그건 내가 도와주지."
삽질하면 또 내가 기똥차게 하지 않나?
.
.
.
함정은 계속해서 나왔다.
"꺄아!"
바닥에서 송곳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히이이익!"
벽에서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다.
"싫어어어어!"
그런데 그 모든 게 도화지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어떻게…."
실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언니, 저기에 아주 중요한 게 있나 봐요! 아니면 이렇게 많은 트랩을 깔아뒀을 리가 없어요!"
계단 위에 왕좌가 있었다.
왕들이 앉는 그런 커다란 의자 말이다. 거기까지 약 10미터 정도 남았는데, 도화지가 또 뭔가를 밟자 천장에서 통나무가 뚝 떨어져 내렸다.
"우앙! 무서워! 그만 좀 해!"
도화지가 옆으로 뛰며 피했는데, 애초에 피할 수 있게 설계되었으면 그게 함정이겠나.
퍼억!
결국 아래에서 솟구친 철봉에 배를 얻어맞은 도화지가 데구르르 굴렀다.
"아오…. 진짜…."
하지만 벌떡 일어난 도화지가 옷을 툭툭 털었다.
"…."
그걸 보면서 실비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도화지가 이룬 +10 이상의 방어력에 대해 모른다. 기본적으로 어떤 하나의 수치가 5를 넘어가면 초인이 되고, 10이 넘으면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마법의 영역이었는데, 당연히 그걸 알 리가 만무했다.
"하아, 하아, 하아…."
결국, 도화지는 왕좌 앞까지 갔다.
"성공했다아아아!"
폴짝폴짝 뛰며 자축하는 그녀를 보면서 실비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도화지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요?"
의자 주변을 돌아다니던 도화지가 대답하자 실비아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허탕을 친 것이다. 이 시각에도 자매들은 친위대에게 계속 죽어가고 있을 텐데!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아유, 조금만 쉬었다 가요. 1분만요!"
도화지에게 가혹한 일정이긴 했다. 여기까지 뛰어오는 것도 그랬지만, 수많은 함정을 상대하느라 정신적으로 녹초가 됐다.
그녀가 왕좌에 앉아 종아리를 손으로 주물렀다.
"보물상자도 없는데, 왜 트랩을 깔아놓은 거야? 변태야 뭐야?"
투덜거릴 때, 갑자기 진동이 일었다.
"어?"
후드득!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지진이다!"
도화지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후욱-!
-…끼아아아아아아아…. 언니이이이이!
의자가 아래로 꺼졌다.
"아, 아아아?"
실비아가 왕좌를 향해 뛰어갔지만, 이미 도화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구멍으로 사라진 후였다.
.
.
.
마을보다 더 큰 구덩이 몇 개를 파주고, 차우산에 올랐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달이 뜨길 기다렸다. 차우가 있으면 사냥하려고 했지만, 어디로 도망갔는지 개 짖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빈 병을 만드는 종족이라니….'
봉우리로 올라가면서 나는 주변을 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서 아까완 다른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하긴, 만드는 이가 있으니 물건이 있는 거겠지만….'
내게 빈 병은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포인트로도 구입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막대한 포인트가 쓰였다.
'언젠간 만나게 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여길 나가는 순간 단절될 텐데.'
이제 문제였다.
훗날 도화지 미션으로 다시 올 수 있다고 한들 그 뒤엔 기약이 없었다.
"음…."
이런저런 가정을 해보면서 주변 변화를 주시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우우우우!
차우인가?
아주 먼 곳이라 위협적이진 않았다.
"…."
좀 더 기다렸다.
그러자 마침내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사라라라락.
"…호오…."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대지에 내리쬐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수많은 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을 추듯 움직였는데, 너무도 아름다웠고 꿈결 같았다.
메밀밭에 꽃이 피면 이럴까?
하지만 너무 작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내 발치에 핀 꽃들을 보았다. 키 작은 코스모스 정도의 꽃은 열매를 맺으려면 한세월 걸릴 것 같았다.
"이런…."
꽃을 발견한 것까진 좋았는데, 촌장의 말처럼 이게 자라려면 최소 보름은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다간 다 죽을 건데.'
맛있는 초코바도 씹어 삼킬 의식이 없다면 병든 어른들은 곧 전멸할지도 몰랐다. 사실 다른 마을을 발견했으니까 그들이 다 죽는다고 해도 열매가 맺길 기다리면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러면 상당히 찝찝할 것 같다.
나는 앉아서 기다렸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을 보았다. 달빛에 자란다고 했지만, 1시간을 지켜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이래선 늦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30분.
또 30분….
단순히 미션과 치료가 목적이라면 앞마을은 잊고 두 번째 마을에 병이 퍼지길 기다리면 된다. 겸사겸사 이 산의 차우나 사냥하면서 버티다 보면 기회는 또 올 거다.
'아니야.'
하지만 나는 미션만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다. 배달만 하면서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똥만 생산하다가 죽어가는 그런 삶은 이제 싫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내가 정해놓은 삶의 범위 내에서 가치 있게 살아가고 싶다.
'이 모든 건 연관되어 있어.'
재능마켓에 들어갔을 때부터 차분히 떠올려보았다. 설원에서 부패의 주인과 싸웠고, 정글에서 원숭이 왕을 만났다. 병아리의 도움으로 토룡을 잡았고, 어르신을 만나 망치질을 배웠다. 이 모든 과정이 나를 강하게 했다.
때론 좌절하고 고독했으며 아프고 치가 떨렸지만, 모든 걸 이겨내면서 하나하나 아이템도 갖췄다.
"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어어어?"
번뜩 머리를 강타하는 한 가지가 나를 일으켰다.
"있잖아!"
나는 가방을 뒤졌다.
남은 꿀물과 대체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고, 초코바도 우르르 쏟아냈다. 그렇게 이것저것 빼낸 가방 안엔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 꽤 있었고, 나는 병 하나를 발견하곤 크게 웃었다.
"찾았다!"
【자라나라! 얍! 드링크: 식물에 뿌리면 성장을 촉진한다. 동물에게 뿌리면 털이 자란다.】
나는 두 손으로 가방에서 드링크를 빼내며 웃어 재꼈다.
"…하하하!"
이걸 잊고 있었다니!
달밤에 미친놈처럼 혼자 웃고 있으니 누가 보면 쯧쯧 손가락질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기쁜데!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이 드링크를 얻었을 때는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탈모인을 만나면 기부하는 셈 치고 주려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유용한 드링크였다.
만약 그렇게 사용했다면….
으으!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후회하고 있었을지 감도 안 온다.
"후…. 좋아. 죽으란 법은 없다니까."
나는 쪼그려 앉아서 꽃들을 보았다.
일단, 실험을 해야 하니까 드링크를 막 낭비할 순 없었다.
'이놈으로 하자.'
그나마 튼실해 보이는 꽃을 점찍고, 뿌리 부분에 드링크를 아주 조금 흘렸다. 촉촉하게 젖어가는 땅에서 꽃의 뿌리가 수분을 흡수했다.
그리더니,
볼록!
"오?!"
순식간에 5cm나 자랐다.
스프링이 튕기는 것처럼 자랐는데, 보고 있었지만 참으로 놀랍다.
"된다. 돼…."
나는 드링크를 소중히 들고, 다시 땅에 조금 부었다.
그러자 또 볼록!
꽃이 솟아났다.
"좋아, 좋아!"
이번엔 좀 더 부었다.
왈칵!
쏟아진 액체가 뿌리에 닿자 순식간에 줄기가 한 뼘이나 자라났다. 이제 내 허벅지까지 올라온 꽃봉오리는 혼자 자라서 다른 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흐흐…. 이래서 화초를 키우나?"
새로운 재미에 눈을 떠가면서 조심해서 또 드링크를 부었다. 애초에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이미 절반 이상을 소모했다.
불룩!
허리까지 자란 꽃은 이제 줄기도 꽤 굵어졌다. 해바라기처럼 커다란 꽃을 달고 굵은 줄기를 가진 멋진 녀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됐나? 드링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남은 드링크를 모두 뿌리에 부었을 때였다.
번쩍!
꽃에서 빛이 났다. 그러더니 메시지가 들렸다.
【달꽃이 신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금세 썩어버립니다. 온전한 열매를 수확하려면 충분히 익었을 때 따야 합니다.】
"오호!"
【달꽃의 신성한 열매는 여러 가지 재료로 쓰입니다. 특히 면역력을 높여주며 가벼운 병도 낫게 합니다.】
"그러취!"
이거야! 이래야 제맛이지!
나는 일어서서 꽃을 자세히 보았다.
어느새 봉오리를 맺은 꽃 머리는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었는데, 저기서 열매가 만들어지고 있나 보다.
'땅에 떨어지면 안 된다고 했지.'
어쩐지 이렇게 많은 꽃이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이라지만 땅에 열매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긴 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조심히 두 손을 모아 꽃봉오리 아래를 받혔다.
하지만 세상 참….
한번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아우우우우우우우!
아까보다 울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그러더니 불길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달꽃 수호자가 깨어납니다. 달꽃 수호자는 달꽃이 열매를 맺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뭐?"
【달꽃의 향기는 수호자에게 아주 강력한 마약과도 같습니다.】
-아우우우우우!
울음소리에 저쪽 봉오리를 바라봤다.
달이 아주 그림같이 떠서 봉오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을 등지고, 개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으드드드득!
차우였다.
아깐 그렇게 꽁지 빠지게 도망쳤던 녀석이 나를 빤히 보면서 네 발로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뒤틀며 두 발로 일어났다.
"헐…."
이내 놈의 다리가 길어졌다. 얼굴 형태도 변했다. 큰 아가리는 비슷했지만, 사람처럼 코가 짧아졌다. 앞다리가 팔로 변했다.
아, 저게 그 뭐시기….
-아우우우우우우우!
【달꽃 수호자가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늑대인간, 뭐 그런 거냐?
"제기랄!"
나는 급히 활을 빼 들었다. 사람처럼 변한 차우가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하는 걸 본 거다.
"어림없어! 내가 어떻게 키운 꽃인데!"
꽃을 등지고 활을 겨냥하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안 줘!"
버럭 외쳤을 때, 이미 차우는 순식간에 거릴 좁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