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22화 (122/277)

#122화

좀 더 남은 뒷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하지만 앞에서 들려온 소음 때문에 끊겼다.

-악마다!

그 소리에 실비아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뛰어갔다.

"궁에 거의 다 왔어! 조심해!"

도화지도 열심히 뒤따라 뛰었다.

그녀는 왠지 실비아가 마음에 들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저 앞에 있는 악마를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히에에에에엑?"

꽃봉오리처럼 생겼는데, 지네처럼 다리가 수없이 많았고, 잎 대신 흐느적거리는 촉수 같은 게 수십 개나 있었다. 그것들이 슉슉! 주변을 찌르기도 하고, 화살을 쳐내기도 했다.

봉오리의 중심엔 칼날 같은 이빨이 원형을 이루며 숨 쉬듯 뻐끔대고 있었다.

"징그러웟!"

-거리를 유지해! 촉수에 닿으면 안 돼! 몸이 마비될 거야!

수십 발의 화살이 악마에게 날아갔다.

슈슈슈슈슉!

벌집처럼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악마는 계속해서 촉수를 날렸다. 그러나 그녀들은 강했다. 초조해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기다릴 줄 알았다.

구우우우우우우!

악마의 목구멍에서 소처럼 긴 울음이 났다. 그리곤 쿠웅! 엎어졌다.

-서둘러! 놈이 신호를 보냈어! 악마들이 모여들 거야!

천여 명의 여전사들이 저쪽으로 뛰어갔다. 도화지도 창을 들고 뒤따랐다. 그녀가 바위에 올라섰을 때, 저 멀리 커다란 성이 하나 보였다. 유럽풍으로 지어진 성은 엄청나게 커서 방이 100개쯤 있을 것 같았는데, 얼마나 오래됐는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도화지의 곁으로 실비아가 빠르게 붙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바람 같았다. 풀만 먹어서 그런지 가벼움의 극치였다.

"괜찮니?"

"네. 저게 로드의 성이에요?"

"아주 오래전에는 피의 일족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 그걸 로드가 빼앗았어. 그래서 피의 일족은 아직도 로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참…. 여기도 살기 팍팍하네요. 하나 더 만들어서 사이좋게 살면 되는걸."

심각한 얘기를 도화지는 간단하게 해석해버렸다. 실비아는 그런 도화지가 재미있었다. 자매들 중에선 이런 화법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악마다!

-이쪽은 우리가 맡을게! 전진해!

사방에서 일사불란하게 여전사들이 움직이며 악마들을 상대했다. 촉수 악마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는데, 멀리서 활을 쏘는 그녀들은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저건 상징과도 같은 거야. 로드라는 이름을 얻으면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이 생겨. 명성은 마법과 같은 거거든. 로드는 과거에도 그런 마법에 심취해 있었어."

"그러면 그 로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쎄요?"

그 말에 실비아가 풋! 웃었다.

"모든 게 상대적인데, 그렇게 정의할 순 없지. 하지만 문헌에 따르면 세 명의 절대자가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어. 그들도 서로를 견제하면서 세력을 키웠지."

"그게 누군데요?"

"상처의 로드, 벌레의 퀸, 피의…."

그녀의 말이 끊겼다.

-실비아아아아아!

저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급히 이동하는 그녀를 따라가며 도화지는 보았다. 성의 정문에서 이상한 것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으읏…. 여긴 정말 나랑 안 맞아."

딱 봐도 엄청 징그러웠다.

.

.

.

"거인이다!"

아니라니까.

"거인이야! 모두 도망가!"

너네가 작은 거라고.

"으아아아아앙! 무서워어어어어!"

무섭다면서도 손에 든 돌을 내게 던지는 꼬마를 보면서 나는 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루를 꼬박 마을을 지켜봤다.

그러고 나서 이 녀석들과 얘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거인이 나타났다아아아아!"

두 팔을 번쩍 들고 뛰다가 철푸덕 자빠지는 꼬마를 보면서 나는 녀석의 등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곤 들었다.

"아아아악! 잡아먹는다아아아아!"

안 잡아먹는다니까.

"그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질렀다.

"히이이익?"

"흐끄덕!"

딸꾹질하는 꼬마도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 녀석도 있었다.

나는 잡고 있던 녀석을 바닥에 내려주면서 무릎을 꿇고 녀석을 내려보았다. 이렇게 해도 눈높이가 안 맞는다.

"얘기 좀 하자. 나는 너희를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녀석들의 키는 내 손으로 한 뼘 정도였다. 내가 저쪽에서 마을을 봤을 때, 멀다고 느꼈던 것은 착각이었다. 마을이 심각하게 작았던 거다.

"어른들은 어디에 있지?"

또한, 이 녀석들은 모두 아이였다. 단순하게 키가 작아서가 아니다. 하루 동안 지켜봤는데, 이 녀석들은 마을이 유지되고 돌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있었다.

"히끅! 말해주면 안 잡아먹을 거예요?"

"…말 안 하면 잡아먹을 거다!"

"히이이이익! 먹지마요오오오오!"

발버둥 치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내가 거대 원숭이를 만났을 때 딱 저런 기분이었던가? 떠올랐다.

"진정하라고."

이때였다.

틱, 틱틱.

내게 모래 알갱이 같은 게 날아왔다.

-죠를 놔줘!

-악당!

-잡아먹지 마!

-미워!

돌을 던지는 꼬마들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그걸 공격이라고 해대는 거냐.

하지만 녀석들은 엄청나게 진지했다. 50명 정도 되는 꼬마들을 보다가 나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곤 껍질을 반쯤 까서 내려놨다.

"너네, 배고프지?"

움찔, 움찔!

"계속 굶었잖아. 다 봤다고. 먹어봐. 맛있는 거야."

-거짓말!

-이딴 거 우린 안 먹어!

-이게 뭐라고!

녀석들이 계속 돌과 모래를 집어 던졌다. 개미 오줌만큼.

야아…. 눈에 들어가도 안 아프겠다.

나는 쯧, 혀를 차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곤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먹든지 말든지."

녀석들을 놔두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집도 있고 광장엔 앙증맞은 나무도 자라 있었으며 뭐가 심겨 있는진 모르겠는데 밭도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

추릅….

츄르릅….

꼬마들이 입을 줄줄 흘리며 초코바에 모여들었다.

-이게 뭘까? 너무 좋은 냄새가 나….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땅에 떨어진 사탕에 개미가 꼬이듯 녀석들은 초코바에 덥석덥석 달라붙었다. 그러더니 와구와구 깨물어댄다.

-카하…! 뭐야, 이 맛은!

-맛있어! 너무 맛있다고!

-메뚜기 다리보다 훨씬 맛있는 건 처음이야!

-잠자리 날개 무침보다도 맛있어!

"…."

당연히 그딴 것보단 맛있지 않겠냐? 어쨌든, 녀석들은 내가 재능마켓에서 저세상 만두를 처음 먹어봤을 때처럼 감탄하며 와구와구 먹어댔다. 꼬마 한 녀석보다도 큰 초코바였지만, 50명 넘게 달라붙으니 절반이 금세 사라졌다.

-후아, 더 못 먹겠어!

-까맣고 기분 나쁘지만, 너무 맛있어!

배를 두드리며 널브러진 꼬마들 사이로 한 꼬마가 쪼르르 달려가서 바구니를 가져오더니 쟁기 같은 거로 초코바를 뜯어내서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그걸 본 다른 녀석들도 뭔가 생각난 듯 쪼르르 바구니를 가져왔다.

"…."

묘하게 귀엽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초코바를 캐내는 녀석도 있었다. 아까 '죠'라고 불렸던 꼬마가 한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이거 먹어봐! 응? 정말 맛있는 거야! 엄마!

다른 녀석들도 각자의 집으로 바구니를 들고 갔다.

-엄마!

-아빠!

꼬마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

마을이 너무 작아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뭉클 퍼져나오는 감정은 아주 컸다.

'병에 걸린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죠가 훌쩍이면서 집에서 나왔다. 소매로 계속 얼굴을 비비는 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녀석이 기운 없이 축 처진 어깨로 내 앞에까지 걸어왔다.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거인 아저씨,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흐윽, 흐으으윽, 흐으윽!"

거인….

하아, 말을 말자.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해봐. 왜 이렇게 된 건지."

"흐윽, 흑흑. 그게요…."

이 지역엔 오래전부터 아주 무서운 병이 전설처럼 내려온다고 했다. 그 병에 걸리면 어른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병이 한번 돌면 온 마을 어른들이 다 죽은 다음에야 진정된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몰라요."

"…."

얘들은 우리로 치면 7~8살 정도였다. 생긴 건 사람하곤 좀 달랐는데, 눈이 더 크고 입이 작았으며 턱이 뾰족했다.

"아는 사람 없어?"

내가 다른 꼬마들을 보았다. 어느새 꼬마들은 집에서 나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리도리.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흔들었다.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거인이 나타났다!

-저길 봐! 거인이야!

그런데 이때, 저 너머 다른 마을에서도 나를 본 모양이다.

"…환장하겠네."

졸지에 어린이집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때, 뒤에서 작은 그림자가 후욱! 튀어나왔다. 아. 물론 내겐 작았지만, 이 녀석들에겐 사자처럼 보일 거다.

-허억!

-호악? 흐이이이익!

범이었다.

지루했는지 숨어있다가 튀어나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비벼대는 범이를 부며 꼬마들이 기겁했다.

-차우다!

-차우가 나타났어!

-엄마! 으아아아아아아앙! 무서워어어어엉!

주저앉아 오줌을 싸는 녀석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죠."

"히끅?"

"차우가 뭐지?"

"차우는 악마야! 사람들을 물어가서 잡아먹는 악마!"

졸지에 악마가 된 범이가 꼬마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예원이와 도화지가 귀여워서 죽고 못 사는 범이인데, 꼬마들에겐 집채만 하게 보이는 거다.

'하긴 그 병아리도 귀엽진 않았지.'

녀석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물었다.

"그 차우가 어디 있지?"

이제까지 미션을 해오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무리 작은 단서도 그걸 따라가다 보면 해답이 있었다.

꼬마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손가락을 폈다.

-저기!

-차우 산에!

-아무리 거인이라도 차우는 못 이길 거야!

녀석들의 손을 따라 고갤 돌렸다.

저 멀리 산이 하나 보였다.

이 녀석들에겐 백두산이나 한라산처럼 높아 보이겠지만, 내겐 아까 내가 내려왔던 그 정도 크기의 산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 빈약하던 산골 폭포도 이 녀석들에겐 나이아가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언제부터 아팠지?"

"일주일 전부터…."

"죽은 사람은 있었어?"

"오늘 아침에 '장' 아저씨가 숨을 쉬지 않았어! 그게 죽은 걸까?"

"…."

아직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사람이 죽기 시작했다면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야.'

나는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드링크 10개를 꺼냈다.

【대체 에너지 드링크. 마시면 필요 영양소와 공복감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이거 다섯 병이면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어느 정돈 버틸 수 있을 거다. 원숭이 수백 마리도 먹여 살리던 대체 에너지아닌가. 이 녀석들은 몸집이 작으니까 더 오래 먹일 수 있을 거다.

"억지로라도 먹여. 알겠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마개를 따서 광장에 내려놓았다.

나머지 다섯 병은 꿀물이다. 이게 병을 조금이라도 늦춰주면 좋겠다. 초코바도 반쯤 까서 10개를 마을 입구에 놨다.

-우아! 우아! 맛있는 거! 이렇게나 많아!

-우와아아아아!

나는 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면서 힘주어 말했다.

"억지로라도 물을 마시게 해. 그게 엄마를 도와줄 거다."

"으응…. 아저씨는? 정말 차우산에 갈 거야? 차우는 악마야! 그 누구도 차우와는 싸울 수 없어!"

나는 피식 웃으면서 일어났다.

그리곤 꼬마를 보며 말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이때, 범이의 몸이 커스텀을 해제했다.

스스스스스스스!

순식간에 본래 모습을 찾은 범이를 보며 꼬마들은 입을 떡 벌렸다. 얼마나 놀랐으면 그 누구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나는 범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곤 차우산을 보았다.

'치료라….'

뭘 해야 할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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