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21화 (121/277)

#121화

5시간쯤 이동했다.

"학, 학학!"

도화지는 간신히 그녀들을 따라갔다. 그 로드의 궁인지 뭔지가 어딘진 모르겠지만, 가까운 곳은 아니었나 보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간다!

"살았다…!"

가도 가도 숲이었다.

그렇게 뛰어다녔는데도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기막힐 노릇이었지만, 도화지는 누굴 원망할 새도 없었다.

"허억, 허억…."

그래도 일단 쉰다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도화지는 아는 얼굴을 찾으려고 숨을 고르며 걸어갔다.

힐끔, 힐끔.

여자들이 도화지가 가까이 올 때마다 쳐다봤지만, 그녀들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삼삼오오 나무 근처에 모여 앉아 쉴 뿐이었다.

'저기 있다!'

도화지가 실비아를 향해 뛰어갔다. 실비아는 분홍색 머리칼의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드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 다른 악마가 로드가 되려고 할 거야. 그 전에 우리가 막아야 해."

로드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거다. 어떤 악마도 로드가 될 수 있으며, 천사도 타락하면 로드가 된다. 물론 이곳에서 자신이 최강임을 증명해야 하지만, 로드라는 이름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상처의 로드가 최상층으로 갔다곤 해도 다른 악마가 로드가 되면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역사를 보면 부패의 로드, 잔혹의 로드, 피의 로드등 많은 악마들이 살았었다. 더 넓게 보면 다른 대륙에도 비슷한 지배자들이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그녀들에게 너무 버겁다.

"우리만으로 할 수 있을까?"

"해야 돼. 무조건. 하나라도 더 죽여서 씨앗을 밟아야 해. 어떤 악마가 로드로 자랄진 아무도 몰라."

실비아의 말에 분홍 머리 여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지가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잖아. 그건 500년 전에 사라져버렸는걸."

한때는 이렇게 악마가 날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들의 일족이 품었던 반지의 강력한 마법은 로드조차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들은 이렇게 숨어 살아야만 했다.

"혹시…. 그 반지가 로드의 궁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야 해."

"알았어. 널 믿을게. 실비아."

도화지가 슬쩍 실비아의 옆에 앉았다. 다리 사이에 창을 세워 끼우고 눈치를 살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 같자 도화지가 물었다.

"언니. 혹시 엘프예요?"

"그게 뭐지?"

"그 뾰족한 귀, 영화에서 봤는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후웅…. 근데요. 뭐 먹을 거 없어요?"

여기 오자마자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었는데, 얼결에 지금까지 굶어버렸다.

"…."

실비아가 도화지를 빤히 보다가 손을 뻗어 잎사귀가 넓은 풀을 몇 장 뜯었다. 그리곤 그걸 내밀었다.

"…똥이 마려운 게 아니라 배가 고픈 건데요."

"우리는 이걸 먹어."

"이것만요?"

"다른 잎도. 가끔은 과일도."

"허얼! 그러니까 다들 이렇게 말랐지! 왜 뼈밖에 없는지 알겠네!"

그녀들에겐 딱히 식사 시간이랄게 없다. 그냥 오며 가며 풀을 먹었다. 자연에선 모두가 그런다.

"그래도 이게 가장 맛있는 거야."

실비아가 딴 잎을 먼저 하나 입에 넣어보며 시범을 보였다. 나머지를 받아든 도화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차라리 버섯이 나았어…."

하지만 어쩌랴. 배고파 죽겠는걸.

우물우물.

"우웩."

구역질이 치밀었다.

풀 잎사귀에서 왜 달팽이 맛이 나는 거지? 달팽이를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딱 이런 맛일 것 같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픈 도화지는 꾸역꾸역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자, 메시지가 떴다.

【악마 숲의 풀을 먹었습니다. 새로운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쳇, 또 냄새야?"

도화지가 투덜대는데, 실비아가 물었다.

"최상층은 어떤 곳이니?"

도화지는 잎을 쥔 손을 허벅지에 올리고 대답했다.

"한 번에 설명할 순 없지만, 여기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니까."

"거기에도 악마가 있어?"

"비슷한 사람들은 많죠."

도화지가 피식 웃었다.

"여러 가지로 여기보다 편하긴 하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되는 거고…."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들에겐 딱히 소유욕이랄 게 없어 보였다. 무기라고 든 활도 주변 나무로 만든 것 같았는데, 입고 있는 옷도 묘하게 예쁘긴 한데, 돈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출출하면 풀까지 뜯어 먹는다니 말 다 했지 뭐.

"근데요, 아까부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얘기해."

"여기 왜 남자가 없어요?"

그랬다. 전쟁이라도 치를 듯 달려가고 있었지만, 천여 명이 되는 사람이 죄다 여자였다.

"남자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떠나. 홀로 살아가며 강력한 전사로 성장해."

"그럼 같이 안 살고요?"

"응. 각자 살아가."

"그러면 썸은 어떻게 타요?"

"썸?"

"아, 그…. 어떻게 만나서 사랑을 하냐고요!"

"가끔 생존한 전사들이 찾아와. 하지만 그들은 머물 수 없어. 남자들은…."

실비아가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리를 이루면 지배하려고 들거든."

"허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이렇게 예쁜데…."

"예뻐? 예쁘다는 게 뭐지?"

도화지는 퍼뜩 깨달았다.

다들 이러고 사니까 오히려 모르는 거다. 도화지도 예뻤지만, 여기 언니들에 비하면 묘하게 자존감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들에겐 그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5월의 장미가 가득한 꽃밭에선 그 하나하나가 스스로 우쭐할 수 없을 테니까.

"우리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선조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아주 번성했을 때도 있었어. 그러나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문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지. 우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렇구나…."

도화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근데 왠지 슬프네요."

"슬퍼?"

"나는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들 함께 어울려 사는 게 행복할 것 같거든요. 이건 너무…."

도화지가 다른 나무에 있는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외롭잖아요…."

"외롭지 않아. 우리 자매들은 늘 함께니까."

실비아가 나무에 등을 기댔다.

도화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들이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면 자신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녀에게 항상 말했었다.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건 좋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같이 살아가서 그런 건데….'

악마 어쩌고가 있다지만, 이들이 저렇게 쓸쓸하게 보이는 건 어쩌면 스스로 궁지에 내몬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도화지는 종아리를 손으로 주물렀다.

.

.

.

재능마켓에서 8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운동 몇 가지 하다가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자면 요즘 말로 순삭이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을 다 소모했습니다.】

도화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 뜻은 내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다.

"…후."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가방엔 이런저런 것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군 시절에 군장 싸는 것과 비슷한데, 내 경우엔 주로 드링크와 먹을 걸 챙긴다.

"없던 마음의 병도 생기겠네. 이번엔 또 뭐냐…."

하도 놀라서 무뎌질 법도 한데, 이때만큼은 언제나 오줌이 마려울 만큼 떨렸다.

그래도 피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래서 훅! 뛰어들었다.

【안전 구역에 입장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어르신이 계신 용암지역은 아니었다. 평범한 흙벽이 보였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가까이 보이는 곳에 상자가 있었다. 열어봤더니 몇 가지 물건이 있었다.

빈 병 3개와 마른 풀 하나였다.

"…에?"

삽도 아니고, 망치도 아닌 말라비틀어진 풀 쪼가리 하나?

메시지가 들렸다.

【미션: 100명을 치료하라.】

"…."

오팔 때보다는 덜 황당하긴 한데, 여전히 불친절한 미션이었다. 일단 나가봐야 알 것 같았다. 병과 풀을 잘 넣어두고 길을 따라 걸었다.

솨아아아아아.

저 앞을 보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폭포인가?'

더 가까이 갔다.

【안전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빛이 들었다.

앞엔 예상했던 것처럼 작은 폭포가 커튼처럼 있었고, 뒤쪽으론 나무와 돌들이 있었다. 우리네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웬일이래…."

설원, 정글, 지렁이밭, 용암지역을 겪고 나니 이런 정상적인 걸 보면 괜히 더 불안해졌다.

졸졸졸….

폭포에서 흐른 물이 저쪽으로 길을 만들었다. 나는 주변을 크게 돌아보다가 움직였다. 물길을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길도 잃지 않을 테고.

'폭포가 베이스캠프라 찾긴 어렵지 않겠어.'

설마 이렇게 똑같이 생긴 폭포가 100개쯤 있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하도 당했더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다.

가방끈을 보며 생각했다.

'다음엔 더 큰 가방을 사야겠어.'

등반가들이 쓰는 아주 커다란 거, 그런 거면 훨씬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진 그런 부담스러운 걸 메고 전투를 하거나 하기에 버겁다고 생각했었는데, 힘도 늘고 체력도 되니까 무리해서라도 보급품을 늘려야겠다.

뭐, 그것도 여기서 나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계속 걷자.

졸졸졸.

깨끗한 물이 흘렀다.

아래로 갈수록 시냇물의 폭이 점차 넓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시야가 확 넓어졌다.

1시간쯤 하류로 내려왔을 때였다.

"아…."

또 폭포가 나왔다. 하지만 같은 폭포가 100개쯤 있을 거란 아까 생각이 들어서 감탄한 건 아니었다. 연기가 보였다. 마을이 있는 거다. 아주 작게 보였지만, 그 마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 같은 형체도 보였다.

솔직히 반가웠다. 혼자 정글을 몇 달 정도 헤매다 보면 누구라도 나 같은 반응일 거다.

"범아."

규우?

"혹시 모르니까 대비해.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반갑다고 무턱대고 양팔 벌려 뛰어갈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마을까지의 거리는 약 2km.

우선은 정찰이 필요했다.

.

.

.

"근데요오오오. 언니."

다시 로드의 궁을 향해 이동했다.

"응?"

실비아에게 도화지가 물었다.

"그 로드라는 사람이요. 정체가 뭐예요?"

"그는 상처의 로드야. 네가 다치거나 혹은 내가 다쳐서 상처가 나잖아? 그러면 그걸 양분으로 삼아. 근처에서 고통을 먹고 힘을 비축해."

"그런 게 다 있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도화지를 보며 실비아가 웃었다.

"그는 아주 교활한 자야. 자신이 강해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의 마법은 대단한데, 상처에서 오는 고통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일대의 힘을 끌어쓸 수 있어. 게다가 다른 악마들과도 잘 어울려. 그의 하수인들은 다른 악마들 사이에서도 살아가. 그러다가 때가 오면 그의 명령을 듣지. 상처는 누구나 나니까. 그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악마는 구울밖에 없어."

"으으으. 어렵네요."

"맞아. 그래서 상대하기 까다롭지. 그는 상처와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자랄 수 있어."

"그렇게 무시무시한 괴물하고 왜 싸워요? 도망칠 생각은 안 해봤어요?"

도화지는 그녀들이 가련했다. 왜 이렇게 예쁜 얼굴들로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다.

"그는…."

실비아의 이마가 주름으로 가득했다.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올랐지만,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선 도화지의 질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휴우."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500년 전에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마법의 축복을 받았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모두를 억압하고 싶어 했어."

그의 마음에 악마가 기생했다.

"모두가 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귀를 자르고 동료의 피로 목욕했어. 모두가 아무리 설득해도 잘린 그의 귀론 듣지 못했지."

"아… 설마?"

"그래, 상처의 로드는 우리 일족이었어. 그래서 우리가 끝내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