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여자들이 엎어진 밥상을 다시 치우며 새로운 음식을 준비했다. 둘 중 한 사람이 집에서 나와 급히 슈퍼로 뛰어갔다. 그리곤 그녀는 온갖 종류의 라면을 다 샀다. 다시 조우진 형사의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다급한 얼굴이었다.
1층 주차장.
차 안에서 여자를 바라보던 한 사내가 말했다.
"조우진 형사가 저렇게 아줌마들한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네."
운전석의 남자가 피식 웃으며 파일을 들었다.
"김미화, 49세. 11년 전 남편과 사별 후 혼자 거주 중. 아파트 부녀회 총무. 층간소음으로 81회, 주차 시비로 12회 고성방가로 9회 경찰신고에 접수된 전력이 있음. 아들이 함께 살 때는 매일같이 고성이 잦았다고 하고."
"애를 쥐잡듯 잡았나 보네."
"빙고! 아동학대로 신고된 전력도 몇 번 있는데, 흐지부지된 것 같아. 출가한 아들은 이제 명절에도 여길 오지도 않는다더라고."
서류만 봐도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 여자였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나 꼭 한 명씩 있는 빌런이랄까?
"노총각 형사. 얼마나 좋아? 챙겨주기도 좋고, 의지하기도 좋고."
"난 사양하겠어."
"조우진 형사가 붙임성이 좋았다고 하잖나.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싹싹하니 아줌마들 눈에 얼마나 예뻤겠어?"
"그 부녀회 회장도 이혼하고 혼자라고 했지?"
"답이 딱 나오잖아?"
어떤 관계인진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그녀들이 호의를 보일 여지는 충분했다.
"드라마 단골 소재 아니야? 기억을 잃은 노총각 형사. 그를 보듬어주는 여주인공. 그러면서도 그녀가 위험에 빠지면 빠박! 본능에서 튀어나온 강력한 주먹이 악당을 무찌르지."
"저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면 나는 그 드라마를 절대로! 보지 않겠어."
"크큭, 그건 자네 생각이고. 세상 모든 여자는 자기가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여긴다고.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몰라?"
"로맨스고 나발이고, 누가랑 붙어먹든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고. 별일 없었으니까 보고나 하지."
"오케이."
전활 걸었다.
"팀장님, 1조 영석입니다."
-어땠어?
"밤새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왔고요. 누가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침이 되니까 부녀회 사람들이 왔고요."
-그 부녀회 사람들은 왜 자꾸 오는데?
"파일 보내드리겠습니다. 보셔야 이해를 하실 것 같거든요."
-알겠어. 고생했어. 2조 오면 교대해.
잠복은 형사의 숙명이라지만, 이렇게 지루하면 몸이 더 늘어지는 기분이 든다.
"별거 없는 거 같지 않아? 조 형사 말이야."
"동감."
조수석 남자가 기지개를 켰다.
"아으으으….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모르겠네."
"이참에 푹 쉰다고 생각하라고."
그들이 그렇게 말을 주고받을 때, 19층 난간에서 조우진 형사가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기생충 같은 새끼들…."
벌레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치해야 하는 때가 있다. 거창하게 공생이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니다. 무시하는 게 편하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그가 크큭,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그 X은 삶의 낙이 사라졌겠는데?"
93년이나 그를 귀찮게 굴던 여자가 하나 있었다. 이젠 지칠 만도 한데 끝까지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크크크크!"
절로 웃음이 났다.
"크하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는데, 냄비에서 풍겨오는 라면 냄새가 그의 웃음소릴 더 유쾌하게 했다.
.
.
.
목에 칼이 들어와 있었다.
"너는 누구지…?"
【재능마켓이 언어를 번역합니다.】
"인성고등학교 2학년 도화지인데요…."
도화지는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면서 말했다. 여자들이 주변에 잔뜩 서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예뻐?'
심지어 눈도 파랗고, 피부도 하얗다. 무엇보다 옷차림이 괴상망측했다. 손바닥만 한 가죽으로 대충 중요한 주위만 가려놓은 것 같았다.
한 여자가 도화지 손에 들려있던 병을 낚아챘다.
"이거 어디서 났어?"
"주웠어요…."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여자가 도화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주웠다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호수 같았다. 도화지는 그 눈을 보면서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 와 있지만 두려움이 들지 않는 건 저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가요오오. 나쁜 애는 아니거든요."
도화지가 이런저런 애길 시작했다.
"균열을 찾아야 해서 갔는데요…."
그 이야기를 듣던 여자들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특히 도화지 앞에 있던 여자는 신음까지 흘렸다. 그러더니 도화지의 얘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서 다른 여자들에게 말했다.
"로드가 최상층으로 간 것 같아."
이번에 그녀들이 준비한 마법은 아주 강력한 것이었다. 이 마법을 준비하려고 무려 18개월을 썼다. 일종의 소환마법이었는데, 로드 하나만 불러낼 수 있으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른 애가 온 거다.
"최상층이라니?"
"그게 정말 실존했단 말이야?"
"실비아!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그녀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일족은 로드와 싸워왔다. 그녀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로드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확실한 건 저런 애는 이 세상에 없어."
도화지를 보며 말하는 실비아였다. 민준이가 있었다면 다른 여자들처럼 같이 고개를 끄덕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얘는 악이 느껴지지 않아. 깨끗하고 순수해."
그녀의 푸른 눈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로드를 상대하기 위해 육체의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실비아가 옆의 여자에게 물었다.
"어때? 느껴져?"
병을 쥔 여자가 얼굴을 끄덕거렸다.
"상처와 고통을 담았던 흔적이 있어. 이걸 매개로 그가 최상층에 갔을 거야. 그 최상층이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지."
실비아는 그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문헌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나는 우리 선조들이 해왔던 모든 걸 믿어. 그리고…."
실비아가 쪼그려 앉았다.
도화지를 보며 얼굴을 바짝 댔다.
"이 아이에게서 마법이 느껴져."
그때였다.
쪼로로록쪼록.
도화지의 뱃속에서 공복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요."
도화지가 말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할머니가 기다릴 거예요. 민준이도요."
실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최상층에 가는 방법을 몰라."
"저를 여기로 끌고 오셨잖아요."
"그건 내가 아니라 마법이었어. 로드의 흔적을 추적한 거고."
"그 로드라는 게 벌레인가요? 벌레라면 제가 많이 잡았어요! 이제 안전해요!"
"아니. 로드는…."
실바아의 눈에 원망과 증오, 두려움이 공존했다.
"모든 상처와 공포를 먹고 사는 절대악이야."
그가 지금 저쪽 세상에서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고 있다는 걸 모르는 실비아였지만, 도화지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돌아가야 했다.
실비아가 일어났다.
"로드가 최상층으로 갔다면."
그녀의 말에 다른 여자들이 긴장했다.
"지금 그의 궁이 비었다는 뜻이겠지?"
그녀의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자매들을 다 모아! 로드의 궁을 친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분위기에 섞일 수 없었던 도화지는 실비아의 귀를 보면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뾰족하고 크네.'
그리고 아름다웠다.
.
.
.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도화지! 도화지는 어디로 간 거야!"
이 상실감과 분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콰앙!
거칠게 문을 닫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버럭 외쳤다.
【이벤트 미션을 수행 중입니다.】
"이벤트 미션…? 나도 갈 수 없어?"
【안전 구역이 지정된 곳이 아니어서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만약 파티원이 미션을 성공하여 안전 구역을 만들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살아는 있다는 거지?"
【현재까진 생존해있습니다.】
"후우…."
불같이 타오르던 감정이 조금은 싸늘하게 식었다. 어쨌든 살아있다면 됐다.
"…!"
그런데 이상하다.
하층은 이 재능마켓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와서 그녀의 행방을 물을 수 있는 거지?
【안전 구역이 설치되지 않는 곳은 재능마켓의 힘이 미치지 않습니다. 하층은 각기 다른 시간으로 흐르며 최상층의 하루가 특정 하층의 일 년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재능마켓은 '시간'에 연관된 일이 많았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그러면 뭐야? 도화지가 나왔을 때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거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젠장…."
그녀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파티라는 게 생각났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면? 그러면 밖의 시간은 흐르지 않잖아. 도화지는 하층에서 미션을 해도 나는 여기 멈춰있는 거 아니야? 드링크도 그렇게 숙성하잖아! 여기, 재능마켓에서도!"
어렵고 복잡한 얘기였다. 지력+4가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다.
【하층은 재능마켓과 다른 시간으로 흐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기다리면 이쪽 시간은 안 흐른다는 거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간엔 많은 변수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내가 늙어 죽은 다음에 도화지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야.'
기다려야 했다. 나도 그녀가 필요했지만, 그녀에게도 내가 필요했다. 어차피 돼지코가 없으면 다른 균열을 찾을 수도 없고.
"범아."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규우?
"우리, 한동안 여기 있어야겠다."
불과 얼마 전까지 등반하느라 계속 갇혀 있었는데, 또 오피스텔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게도 변수가 있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8시간도 남지 않았다.
.
.
.
"히잉…."
도화지에게 강제로 창이 들렸다.
"어차피 너는 여기 혼자 있으면 죽어. 우리가 떠나면 악마들이 몰려올 거야. 같아 가야 돼."
실비아의 말에 도화지는 울상을 지었다. 두 손으로 창의 자루를 쥐었는데, 그게 참으로 어색했다.
"저, 이거 쓸 줄 모르는데요."
"우리 자매들은 다 싸워. 너도 싸워야 해. 모르면 배워."
여자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났다. 무려 1천 명이 넘었다. 숲엔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는데, 여자들은 그런 나무 뒤에 몸을 감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숲의 중심에서 실비아가 말했다.
"로드가 없다면 악마들의 힘이 약해졌을 거야. 지금이 기회야. 자매들아. 나를 믿고 가줘!"
수평적인 사회였지만, 실비아는 이 중에서도 특출했다. 여자들이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들고 있던 활을 머리 위로 들었다.
'다 활을 들고 있네.'
활을 보니 민준이가 생각나서 괜히 울컥해진 도화지가 입을 꾹 다물었는데, 실비아가 외쳤다.
"가자!"
그녀들이 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도, 택시도 없었지만, 숲을 이동하는 그녀들은 엄청나게 빨랐다.
"하악? 같이 가요오오오오!"
도화지도 창을 꼭 쥐고, 그녀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