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하는 데까지 해보자.'
성큼 올라서서 손바닥으로 천장의 원을 찍었다. 그리곤 다시 하나하나 버섯을 밟아 내려온다.
【등반 78회 남았습니다.】
스스스스스.
버섯들이 사라지며 불룩불룩 새로운 버섯이 자랐다.
"휴우."
나는 자라나는 버섯을 보며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등반을 하려면 우선 내가 뭘 잡고 어떻게 올라설지, 무얼 밟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갈지를 미리 계산해야 했다. 그냥 힘만 좋다고 무턱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제 9,900회 넘게 했더니 스윽 보면 알겠다.
훅! 뛰어올라 거미처럼 기어올랐다. 이제 이런 반복운동을 하면서도 체력을 심하게 소모하진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였다.
"…."
그렇게 나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오르고 또 올랐으며 다시 내려왔다.
【축하합니다!】
마침내 등반 10,000회를 성공했을 때,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8시간 11분 남았습니다.】
【재생력+3을 얻었습니다.】
재생력이라는 신비한 힘을 얻게 되었다.
'뭐가 달라졌는진 모르겠지만….'
등반을 하면서 코어가 성장했고, 이제 웬만한 곳에 매달리는 건 일도 아닐 정도로 숙련되었다. 특히, 운동할 땐 쓸 수 없었지만, 뱀파이어 날개까지 적절하게 쓰면 절벽 같은 곳도 어렵잖게 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무려 +3이나 되니, 필요할 땐 작용하리라 생각하며 나는 샤워부터 했다.
'그보다 시간이 얼마 없어….'
체류 시간이 24시간 안쪽으로 남게 되면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걸 아껴야 하나 아니면 필요한 곳에 써버리고 새로 얻어야 하나.
'일단 상황을 봐야겠어.'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곧장 전활 걸었다.
"누나."
-벌써 끝났어?
그녀 입장에선 나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
"생각해봤는데, 균열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기생충 같은 것들이 더 나오면 사람들이 많이 다칠 거에요."
-으이그, 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 필라테스 하는 내내 벌레 생각만 했니?
"그건 아닌데…."
-됐거든? 더듬이 달고, 벌레랑 살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곧 톡이 왔다.
『내일 알바 쉰다고 말씀드릴게.』
나는 웃으며 신림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봤다.
'마음의 병….'
기생충은 병이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고 했다. 그 상처가 크면 클수록 놈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고 했는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문득 눈썹을 만져보았다. 미간과 가장 가까운 눈썹이 양쪽에 하나씩 움직였다. 더듬이가 눈썹으로 바뀐 거다.
'놈들이 더 넘어오기 전에 내가 닫아버려야 돼.'
덜컹, 덜컹.
지하철은 오늘도 늘 그렇듯이 밤을 달리고 있었다.
.
.
.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학교에 나오라고요?"
운동장엔 거대한 천막들이 쳐지기 시작했다.
-학부모님들이 전학을 반대해서 어쩔 수가 없어. 하도 민원이 들어오니까 교육청에서도 교장 선생님의 선택에 맡긴다고 했다는데. 미안하구나. 대신 일주일에 절반은 원격수업으로 대체할 거야. 필요한 장비는 내일 학교에 오면 받을 수 있을 거다. 태블릿 같은 거도 전부 학교에서 부담할 거니까 걱정 말고.
학교를 보수하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린단다. 그때까지는 운동장과 체육관에서 난민들처럼 공부해야 했다.
이게 말이 되나?
전화가 걸려왔다.
예원이다.
-소식 들었니?
"응."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예원이는 그날 학교에 오지 않아서 끔찍한 일을 피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반대했다나 봐."
우리 학교가 명문은 아니었지만, 전교생이 주변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하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배정되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고.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원격수업은 어떻게 하는 거야? 혹시 들었어?
"나도 잘 몰라."
이런 초유의 사태를 겪어본 학생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일 긴급소집일이라는데, 올 거야?"
-가야지. 전화로만 들어선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래, 그럼 내일 봐."
집에서 나와 강남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재능마켓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대형서점으로 향했다. 등반을 하면서 느낀 건데, 나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했다.
「세상의 모든 기생충.」
내 나이 또래 애들은 찾지 않는 전문 서적 책장에서 한참을 서서 책을 넘겼다.
「마음을 읽는 심리학.」
나는 이전의 삶에서 40년을 살았지만, 사람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나 또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재능마켓을 접하면서 자신감이 생겨 바뀌긴 했지만, 이전의 삶이었다면 내가 그 기생충에 먹혀 숙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세균과 바이러스.」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지력+4는 속독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한번 보면 외웠다. 이 많은 책을 다 살 순 없었고 인터넷을 뒤지는 것보다는 이런 책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시간도 잊고 책에 빠져있을 때,
『어디야?』
도화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남역 4번 출구로 오세요.』
『알았어! 금방 갈게!』
아쉬운 마음에 읽던 책을 책장에 넣었는데,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 이런….'
힐끔힐끔 나를 보는 여자들이 있었다. 대놓고 빤히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 눈빛들이 뭘 하려는지 바로 깨달았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놈의 매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저, 저기 잠깐만…."
목소리가 들렸지만, 후다닥! 서점을 벗어났다. 그리곤 4번 출구로 곧장 향했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늘 이런 삶을 살아가는 건가?'
나는 아직도 어색해서 이렇게 피해버리지만, 아기 때부터 이게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친절하고, 호감을 보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고, 삶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솔직히 모르겠다. 어쨌든 난 아니었으니까. 아! 저기, 나처럼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존재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민준아! 오래 기다렸어?"
그녀의 동선을 따라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껌처럼 달라붙었다.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이긴 하지만, 이건 분명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아뇨. 근데 매니큐어를 지금도 바르고 다니는 거예요?"
그녀가 나와 합류하자 주변에서 질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도화지가 웃었다.
"너는 맛있는 걸 먼저 먹어? 아니면 아꼈다가 맨 마지막에 먹어? 왜, 조각 케이크 시키면 위에 비싼 딸기 하나 얹어주잖아!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조각 케이크? 솔직히 먹어본 적도 없었다. 국밥이면 몰라도.
"나는 먼저 먹는 타입! 아끼면 똥 된다!"
뼈해장국 고기를 먼저 먹냐, 밥이랑 같이 먹냐 같은 건가? 얜 참 뭐든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어쨌든 대답은 들었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우린 이동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것부터 가요."
"응! 서쪽이야!"
그녀는 항상 냄새의 위치를 말할 때 동서남북, 한강을 기준으로 했다.
우린 오토바이에 올랐다. 확실히 범이가 있으니까 기동력이 좋아졌다.
"이 냄새는 이제까지랑 달라."
"어떻게요?"
"그 균열이 생겼다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냄새가 아주 강하게 났는데, 순식간에 사라졌거든. 감쪽같이!"
"완전히요?"
"응, 지금도 안나. 근데 그 균열 예상지점에서는 아직도 나거든. 본래 괴물이 죽으면 냄새도 같이 옅어지다가 없어지는데!"
"죽지 않았다는 거네요. 냄새를 숨겼거나."
"그리고 그 달콤한 냄새 난다고 했었잖아?"
"네."
"그 냄새도 없어졌어. 이번 균열이 열리는 동시에."
"으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할 일은 미션이었다.
'미션을 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우리는 고양시로 향했다.
고양시는 서울과 인접해있었는데, 마포에서 조금만 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도시가 통째로 생기려는지 일대가 다 황무지였다. 우린 오토바이에서 내려 작은 산을 향해 걸어갔다.
도화지가 내 팔을 끌어안았다.
"무서워…. 또 그 인어 공주 같은 거 튀어나오면 어쩌지?"
때릴 거잖아.
"벌레도 싫은데!"
망치로 잘도 치더만….
"냄새는요?"
그녀의 돼지코가 킁킁! 움직였다.
"별거 없어."
"알겠어요."
나는 활을 꺼내 들었다.
주변에 인적이 없어서 움직이긴 편했다.
그렇게 20분쯤 걸었다.
"여기네요."
수호자의 안경 너머로 반투명한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킁킁!
내가 막 균열을 닫으려는데, 도화지가 말했다.
"잠깐만."
"왜요?"
"여기, 무슨 냄새가…."
그녀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도와줘요?"
삽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녀가 대답했다.
"아니야. 거의 다 됐어. 여기…. 뭐가 있는데…."
균열 앞에서 그녀가 뭔가를 찾아냈다.
"어?"
땅속에서 꺼낸 작은 병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이 병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
"무슨 냄새요?"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시궁창 같은 느낌? 그걸 강제로 퍼먹는 기분?"
"아….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흐윽, 너는 이 예쁘고 가녀린 코로 이런 냄새를 강제로 맡아야 한다는 기분이 어떤지 모른다고."
그녀가 돼지코를 만지며 말했다. 그게 너무 웃겨서 얼굴을 돌렸는데, 다시 눈을 그녀에게 돌렸을 때 그 잠깐의 순간에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아, 아아아아?"
어떻게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균열에서 쑤욱 나온 하얀 손이 도화지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부웅! 떠서 균열 안쪽으로 도화지가 사라질 때까지 1초도 안 걸렸다.
"누, 누나아아아아아!"
나는 활을 들고 균열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그저 몸은 통과할 뿐 그녀처럼 균열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이게 왜…?"
혹시 몰라서 기다렸다. 그 하얀 손이 나와서 나도 끌어당기지 않을까?
"왜…."
하지만 지옥 같은 5분이 지나도, 입술이 덜덜 떨리다 못해 턱까지 뻐근한 10분이 지나도 손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수호자의 의지로 균열을 닫으시겠습니까?】
같은 메시지만 반복할 뿐이었다.
.
.
.
'네 명인가.'
조우진 형사는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파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편이 신분을 위장하고 살아가기에 더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집안이 부산했다.
중년의 여자 두 명이 청소와 식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처음엔 한 명이었지만, 어제 하나 더 늘렸다. 감시자들도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녀들이 자처해서 수발을 들어준다는데 뭐가 문제일까?
"로드…. 식사하세요."
진수성찬이 차려진 커다란 밥상에 앉으며 조우진 형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최상층은 먹거리의 천국이었다. 그는 하층에서도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했지만, 이렇게 맛있고 다양한 음식은 접할 수 없었다.
식욕 또한 욕망의 하나.
생물의 본능이었고, 그는 그것에 충실했다.
그러던 그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이걸…."
그리곤 덥석.
그의 두 손이 밥상을 잡아 던졌다. 와장창!
"…!"
"…로, 로드…?"
여자들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저 그가 그러면 그런 거다.
"밥상이라고 차렸나?"
그녀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분명, 10첩 반상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차렸는데!
그때, 조우진 형사가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라면…."
"네…?"
"빨리 가져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그의 최애 먹거리는 라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