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드득, 득, 드드드득!
오피스텔은 3층짜리 복층 구조였다. 계단이 있는 곳으론 천장이 있었지만, 밖을 볼 수 있는 유리 벽은 10미터 이상 솟구쳐 있었다.
그 유리 벽에 버섯 같은 것들이 자라났다. 어떤 것은 아주 작고, 어떤 것은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등반 10,000회를 달성하세요. 손바닥으로 목표를 찍고 내려와야 합니다. 단, 내려올 때도 뛰어내리면 실패로 간주합니다. 보상: 재생력+3.】
"…하?"
이번 필라테스는 벽을 기어오르는 거였다. 그런데 그냥 편하게 오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버섯들의 위치가 들쑥날쑥했다.
"어이가 없네."
손을 뻗어보았다. 첫 번째 버섯조차 닿지 않았다. 뛰어서 움켜쥐어야 했다.
나는 좀 더 멀리 서서 버섯들을 세어보았다.
26개였다.
그것들의 끝엔 목표지점으로 보이는 빛나는 원이 있었다. 저걸 손바닥으로 쳐야 한다는 거다.
"만 번이라니…."
【미션을 완수할 때까지 재능마켓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젠장. 또 늙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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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진 형사는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정직 처분을 받았다. 병원에서 이탈한 것도 그렇고, 이제까지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기억이 없다고 우직하게 밀고 나갔지만, 학교 인질극 사건 때 그가 현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업무에 복귀할 순 없었다.
-이해하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의사 소견이 나오면 복귀할 수 있을 거다. 그때까지만 자숙하고 있어. 몸도 성치 않은데.
"알겠습니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전활 끊고 조우진 형사는 19층으로 올라갔다. 서울 변두리 복도식 아파트. 지은 지 30년도 넘은 곳이었지만 그가 마련한 보물 1호였다.
"…."
그가 문 앞에 섰다.
'이런 곳에서 잘도 사는군.'
문을 열자 18평 아파트의 내부가 보였다. 거실 겸 방 하나와 작은 방, 주방과 욕실이 보였다.
내부는 더러웠다. 누가 다녀갔었는지 더러운 발자국도 바닥에 찍혀 있었다.
"웃기는 세상이라니까."
그가 비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최상층은 천국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지옥이 공존했다. 이 풍족한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더 가지지 못해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겼고, 육체적 능력보다는 권력과 돈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했다.
"핵이라…."
그게 지척에서 터지면 자신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퀸도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 거다.
"재미있다니까…."
이렇게 나약한 인간들이 어마어마한 무기를 만들어냈다. 신이라 해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기들은 서로를 겨냥하고 있었다.
조우진 형사는 방안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귀찮거나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이런 일은 시녀가 해왔었다.
"…."
멍하니 앉아 있던 그가 베란다를 보았다.
밖이 시원하게 보였다.
서울이 보였다.
조우진 형사가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보았다. 한 손에 서울이 다 잡힐 것 같았다.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가질 수 없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뭔가 위에서 내려와 흔들거렸다.
팡팡!
천을 두드리는 소리도 났다.
조우진은 상체를 내밀어 위를 바라보았다. 중년 여자가 막대 같은 걸로 이불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그가 손을 뻗어 이불 끝을 잡았다. 그리곤 화악 잡아당겼다.
-하악? 꺄아아아아!
이불과 함께 여자가 아래로 딸려왔다. 조우진 형사가 여자의 멱을 낚아채 배란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곤 여자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흐으윽? 사, 살려…주세요. 제가 이불 털어서 그래요? 앞으론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갔다. 이렇게 얼이 빠져야 지배하기 쉬웠다. 그는 자신의 힘을 반쯤 써서 여자의 목을 쥐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시녀다."
여자의 눈이 탁 풀렸다.
"…네. 마이…. 로드."
"먹을 것과 청소를 담당해라."
그는 하층에 있을 때 수만 병사를 거느렸었다. 지금은 고작 여자 하나에 힘을 상당히 써야 했지만 머잖아 회복할 것이다.
"시작해."
"네, 로드."
풀려난 여자가 집안을 치우는 걸 보며 조우진 형사는 진득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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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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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죠?"
조우진 형사를 집에 데려다주고 경찰서로 돌아가는 길. 차에서 강나은 경위가 물었다.
"팀원들을 붙여 뒀으니까 도망가진 못할 거야."
조우진 형사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2개 조로 4명이나 그를 감시하고 있다. 도청까진 아니어도 이동하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서장님 특별 지시잖아. 지켜보면 알겠지."
서장은 조우진 형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번화가와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어떤 단체가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는데, 그들이 다시 조우진 형사에게 접촉할 거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어때?"
번화가에서 기절한 이들을 묻는 거다.
"전혀 기억하질 못하고 있어요. 조우진 형사처럼요."
"음,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건가?"
번화가와 학교에서 쓰러지거나 죽은 사람들의 신원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번화가는 그렇다 쳐도 학교 인질극은 해외까지 보도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그들이 막 경찰서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팀장님, 유찬입니다.
"어, 장 형사."
-조우진 형사 윗집 아줌마가 쓰레기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신원은 확인했습니다. 58세. 아파트 부녀회 회장입니다.
"조 형사 집에서?"
-네.
"언제 들어갔는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켜봐. 바로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전활 끊자 강나은 경위가 설명을 요구했다. 팀장이 말했다.
"조 형사가 원래 붙임성도 좋고, 사람도 좋아서 이웃하고 잘 지냈었어. 윗집 사람이 도와주러 왔나 봐. 오랫동안 집을 비웠었으니까."
"아…."
두 사람은 경찰서로 들어갔다. 관할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수백 명이 죽은 학교 인질극 사건은 여기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
그런 분위기를 읽으며 강력반으로 올라간 팀장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주목."
그가 물었다.
"새로 나온 거 없어?"
팀원이 손을 들었다.
"막 광수대에서 자료가 하나 왔습니다."
"뭔데?"
팀원이 보드 판 앞으로 나와 종이 뭉치를 보며 말했다.
"학교 밖 CCTV 영상입니다. 구급차를 탈취하기 직전입니다."
"조 형사가 확실해?"
"당시 피해자는 얼굴을 못 봤다고 했지만, 정황상 그렇습니다. 이 소방관 외엔 학교에서 외부로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건 구급차가 찍힌 폐쇄회로 화면입니다. 고양시에 차가 버려졌고, 이후론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사진이 시간 순서대로 보드 판에 붙었다.
"그리고 이건 약 3시간 후 택시를 타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화질이 선명하진 않습니다만, 체격이나 걷는 모습이…."
조 형사와 똑같았다.
"알겠어. 이 일은 우선 우리만 알자고. 괜히 조 형사, 자극하지 말고."
사이비 종교에 빠졌든지 아니면 도박 빚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팀장은 조우진 형사를 믿고 싶었다.
"팀장님."
다른 팀원이 일어났다.
"말해."
"그때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화살들 있지 않습니까?"
"뭐 나왔어?"
"아뇨. 다른 서 형사들도 출처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양인데, 제가 전문가한테 물어보니까 그런 화살은 애초에 쏠 수가 없답니다."
"음? 무슨 소리야?"
"촉을 다 쇠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면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서 화살이 날아가지 않고 고꾸라져버린다는데요? 게다가 그 화살, 하나에 1kg이 넘는답니다."
"그게 왜?"
"쉽게 설명해드리자면 석궁에서 쓰는 가장 무거운 게 200g정도 한답니다. 사람이 쓰는 화살은 아무리 무거워 봐야 100g을 넘지 않다고 하고요. 보통은 50g 내외랍니다."
벽에도 박혀 있었고, 땅에도 떨어져 있었다.
"다른 범행도구는?"
"일차 부검 결과 2종류의 흉기가 주로 쓰였다고 합니다. 망치나 삽, 도끼 같은 거라고 하는데, CCTV가 다 고장 나서 증거가 없습니다. 현장에서 범행도구를 찾을 수도 없었고요."
물증을 찾지 못하면 용의자를 특정할 수도 없다. 인질범들이 다 죽어버려서 물어볼 곳도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유력한 범인은 오직 조우진 형사뿐이었다.
"사람 머리를 통째로 부숴버릴 만한 둔기가 뭐가 있는데?"
"공사 현장에서 쓰는 해머 같은 거였을 겁니다."
사람 머린 생각보다 단단하다.
"소방관들이 문 같은 걸 부술 때 쓰는 커다란 도끼일 수도 있고요."
뭐였든 전부 다 비상식적이었다.
'쏠 수도 없는 화살과 큰 해머라고?'
그런 걸 들고 불타는 학교에서 인질범들을 공격했다? 도대체 왜?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언론에선 일본 종교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어요. 전에 오키나와에서 연쇄살인 났던 거 기억하시죠? 그때도 화살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사람들의 눈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또, 일본에서 1995년에 지하철 가스 테러가 있었어요."
"아, 그 사건. 기억나."
팀장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강나은 경위는 모두를 모여 말했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래된 사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수십, 수백 명이 희생된 집단자살 사건도 있었잖아요?"
팀장이 물었다.
"그 오키나와 사건 담당자랑 연락할 수 있겠나?"
"해볼게요."
"좋아. 모두 더 노력하자고! 다신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돼!"
팀장의 목소리에 박력이 넘쳤다. 그건 아마도 조우진 형사의 신변이 확보되어서 그런 거라고 강나은 경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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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오르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초반엔 엄청나게 떨어졌다. 낙상 대미지를 줄여주는 코트가 없었다면 등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거다. 여기가 재능마켓이 아니었다면 진즉 층간소음으로 항의가 들어왔어도 할 말 없었다.
휘익!
바닥에서 6미터. 몸이 거미처럼 옆으로 뛰었다. 손과 발이 모두 떨어진 상태였지만, 곧 오른손이 버섯 하나를 붙잡았고 몸은 시계추처럼 버섯에 매달려서 흔들렸다.
"후우…."
이 빌어 처먹을 미션은 악독하기 이를 대 없었다. 9시간 정도 시도한 끝에 첫 번째 1회를 달성했는데, 성공하자마자 버섯들이 모두 사라졌고, 새로운 버섯이 전혀 다른 위치에 자라났다.
그때 알았다.
내가 1만 번의 등반을 모두 다른 코스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 이것도 슬슬 끝이 보인다.
회익!
흔들리던 몸이 반동을 얻어서 옆으로 뛰었다. 내 발이 아슬아슬하게 버섯 하나를 밟았다. 그리고 그 순간 수직으로 높이 뛰었다.
후욱!
코어의 힘을 바탕으로 솟구친 나는 손을 쭉 뻗어 다른 버섯을 움켜쥐었다.
"하아, 하아…. 됐어."
이제 한 손으로 뭔가를 잡고 이렇게 매달려 있는 건 쉽다. 손가락 하나로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다.
【등반 79회 남았습니다.】
문제는….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13시간 남았습니다.】
망할,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