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학교가 불타오르기 시작하자 조우진 형사는 소방관 한 명을 공격했다. 그리곤 그의 옷을 빼앗아 입었다.
"…."
조우진 형사의 눈빛은 무척이나 무심했다. 다른 녀석들은 벌레에 감염되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동행하긴 했으나 그는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다.
-때가 왔다. 혼돈의 공포와 상처의 피가 차올랐다!
그는 머릿속 울림을 들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이, 괜찮아?"
다른 소방관이 다가와 물었지만, 조우진 형사는 무시한 채 걸었다. 그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나왔다.
-신애야!
-우리 애, 무사한지 확인 좀 해줘요!
-하선아!
수많은 학부모가 자식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YYN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SBC 정찬 기잡니다! 학부모시죠?
기자들은 특종을 잡기 위해 뛰어다녔고, 경찰들은 그런 그들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조우진 형사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며 대기하던 구급차로 걸어갔다. 운전석에 사람이 있었지만, 그의 주먹이 더 빨랐다.
"누, 누구…? 으윽!"
쓰러진 운전자를 조수석 쪽으로 밀어버리며 조우진 형사가 운전대를 잡았다. 도로에서 구급차는 매우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애애애애애애애앵!
차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조우진 형사는 그렇게 봉천동을 벗어나서 올림픽대로로 향했다. 일산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간 그는 어느 시점이 되자 구급차에서 내렸다. 소방복을 벗어버리고 조수석 남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뒤 걸었다. 매우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는 고양시의 야산으로 접어들었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어서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계속 산을 올랐다.
"후우우우우…."
어느 지점까지 올라선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병이었는데, 핏빛보다도 빨개서 검게 보일 정도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걸 소중하게 땅에 묻고 기다렸다.
'됐어.'
퀸에게 당했을 때 그의 몸에는 상처가 생겼다. 그 직후부터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혼자선 그 명령을 수행하기에 벅찼다. 그래서 '동류'를 찾아 함께했다. 하지만 오해해선 곤란하다. 동류하고 했지 동족은 아니었다. 그따위 벌레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웠다.
시간이 흘렀다.
1시간, 2시간….
그는 말없이 병을 묻은 땅만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더니 그의 앞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땅이 갈라지는 게 아니라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넙죽 엎드렸다.
그의 몸이 환희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로… 드… 를 뵙습니다…."
균열에서 하얀 발이 하나 나왔다.
매끈한 발은 조우진 형사의 머리를 밟았다. 그렇게 선 청년은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20세쯤 되었을까? 긴 흑발은 허리까지 내려왔고, 피부는 백인처럼 창백했다. 그런데 양쪽 귀 끝이 반쯤 잘려있었다.
"최상층인가…."
청년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주변을 바라보았다.
조우진 형사가 말했다.
"퀸… 이 와있습니다…."
"그런가…."
청년이 비웃는 것처럼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러더니 조우진 형사를 내려보다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끄으으으으…."
뒤에서 목이 잡힌 조우진 형사가 바들바들 떨었다.
"수고했다."
우직!
조우진 형사의 목이 으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조우진 형사의 몸이 쪼그라들면서 수분과 함께 모든 기억이 청년의 손아귀로 빨려들어 갔다.
스스스스.
청년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갔다.
"으으음."
순식간에 조우진 형사로 탈바꿈한 청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그가 조우진 형사의 옷을 입었다.
"재미있는 세상이야."
자신의 손을 보았다.
"고작 이것뿐인가."
힘을 가늠하던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조우진으로 살아야겠군."
그의 이름은 로드.
모든 고통과 상처의 왕이었다.
.
.
.
【균열이 열렸습니다!】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퍼억!
샌드백도 날아가게 하는 주먹이 놈의 얼굴에 박혔지만, 벌레는 물러서지 않고 더듬이로 내 팔을 찔러왔다.
"쳇!"
나는 팔을 회수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싸움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모체가 강한 탓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몰려드는 감염자들이 성가셨다.
"젠장!"
나는 벽을 차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무릎으로 뒤에서 접근하던 감염자의 얼굴을 찍었다.
"으으으!"
뒤로 날아가는 감염자가 시커먼 연기에 먹혔다. 그걸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퍼억!
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크윽!"
모체가 나를 걷어차면서 두 팔을 뻗었다. 저 손에 잡히면 위험했다.
놈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옆으로 뛰었다. 이곳은 과학실습실이었다. 불길이 여기까지 번져있었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경찰이 온 걸까?
알 수 없었지만, 모체가 총에 맞아서 죽을 진 자신할 수 없었다.
'치잇.'
더 많은 사람이 다치기 전에 놈을 유인해야 했다. 나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창문으로 향해 뛰었다. 그리곤 창문 위쪽 난간을 잡고 뛰었다.
휘익! 몸이 뒤집혔다.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리기를 했던 경험은 이렇게 벽을 타고 오르는 걸 가능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내 힘이 디딤돌이나 마찬가지였다.
휘익-!
옥상으로 올라온 나는 빠르게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연기가 학교 전체에서 솟구치고 있었고, 소방관들이 열심히 물을 뿌려대는 게 보였다. 수많은 경찰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크읍."
나도 연기를 많이 마시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망치를 소환해서 들었다.
이때, 그림자 하나가 솟구쳤다.
모체였다.
"…죽인다…."
"하, 나한테 왜 이래?"
뭐 이런 끈질긴 놈이 다 있나 싶다.
"으으으! 죽엇!"
놈이 또 달려들었다.
"젠장!"
나는 놈과 싸우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놈의 힘은 나와 비슷했다. 속도도 거의 같았다. 하지만 체력이나 회복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저놈은 다리가 부러져도 계속 덤벼왔다. 이 불공평한 싸움이 길어질수록 내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끈질기네!"
몇 번 활도 쏴봤지만, 놈은 쉽게 피해버렸다. 다리나 팔이 부러져도 금세 복구해버렸고, 최대한 머리를 노리려고 해봤지만, 놈도 머리가 자기 약점인지 잘 알고 있어서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
터엉!
"크윽…!"
이런! 벽에 몰렸다.
벗어나야 하는데, 놈의 손에 단단히 잡혀버렸다.
추르르르르르.
놈의 목구멍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죽어라…."
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산채로 내 얼굴을 물어뜯으려고 하는지 벌어진 입에선 끔찍한 악취가 났다.
"이, 이…!"
놈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온몸에 힘을 집중하는 그때였다.
"…?"
뭔가가 저쪽에서 보였다.
'분홍색…?'
그런 걸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벌레의 뒤통수에 커다란 게 닿았다.
뿅!
재미있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할 때, 와스스스스. 벌레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나서 떠올랐다.
"아…. 아아?"
기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민준아!"
"누나가 어떻게 여기에…?"
도화지의 뒤로 범이가 보였다.
"전화 안 받길래! 지금 밖이 얼마나 난리인데! TV에 온통 여기 얘기야!"
아니, 전화 안 받는다고 여길 와?
"그리고 균열이 열렸대!"
나도 안다고!
"…어쨌든 여기서 나가야 해요."
박살 난 벌레의 머리를 보며 나는 문득 도화지의 뿅망치를 바라봤다.
'뭐 저런 게 다 있냐….'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해도 무시무시한 파워였다.
재료 수집망을 꺼내 모체를 회수했다.
【기생충 모체를 수집했습니다.】
【7,000P를 획득했습니다.】
"그래도 딱 맞게 잘 왔지?"
덕분에 살긴 했다….
"네, 근데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남은 벌레들을 찾아야 해요."
계단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헐."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벌레들이 즐비하게 죽어 있었다. 하나같이 강력한 뭔가에 맞아 으깨졌다.
"누나가 이랬어요?"
"쟤들이 먼저 덤볐다고!"
범이가 가까이에 있던 벌레의 머리를 덥석 깨물었다.
배고팠니….
"아직 남은 벌레가 더 있을 거예요. 저쪽으로 가봐요."
모체를 잡았지만, 아직 미션 완료가 뜨지 않았다.
"알았어, 손잡아줘! 연기 때문에 안 보여!"
"그 정돈 아니거든요?"
"안 보인다고!"
"안 보이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는데요!"
"범이가 알아서 왔거든?"
도화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냥 저기로 뛰어내리면 안 돼?"
"전국에 다 나가는 방송 타라고요?"
"아…."
"상식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요! 유명해지기 싫으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놈들은 나를 찾아왔다. 기생충처럼 나를 노리는 괴물이 하나일까?
'최대한 드러나선 안 돼.'
내가 놈들과 싸워야 할 팔자라면 얼마든지 어울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내 주변이 피해를 보면 곤란하지 않나? 이들이 무슨 죄인가?
"민준아! 저기! 벌레다! 벌레!"
본래의 몸이 생명력을 다했는지 벌레들은 몸을 버리고 밖으로 나와서 바퀴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위에도 한 마리 붙어있어!"
나는 도화지와 함께 남은 벌레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놈들도 어차피 내가 있던 옥상으로 모여들고 있던 터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놈은 내가 잡을게!"
뿅!
벌레 하나가 두부처럼 으깨지는 걸 보며 안쓰러우면 안 되는 거지?
"여긴 더 없나 봐요. 내려가죠."
"응!"
막 2층 복도로 내려왔을 때였다.
"학생들! 멈춰!"
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아…?"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쪽은 가면 안 돼! 여기로 와! 우리 뒤에 소방관들이 있으니까 그분들한테로 가! 어서!"
"네!"
"혹시 위에서 인질범들 봤어?"
"몰라요!"
"알았다! 조심해서 내려가라!"
우릴 뒤로하고 총 든 경찰들이 우르르 위쪽으로 올라갔다. 나는 도화지의 손을 잡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우와! 영화 같다. 그치?"
"쉿!"
막 1층까지 왔을 때, 저쪽 구석에서 꾸물대는 벌레 하나가 보였다.
나는 주변을 빠르게 훑다가 활을 꺼내 곧장 쐈다.
새애애애애액!
푸욱!
화살에 맞은 벌레가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기생충이 소멸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난입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끝났다.
"후우…."
"으, 징그러워! 빨리 가자!"
이제? 여탠 귀여웠고? 참 알 수 없는 여자다.
학교 전체를 훑으려면 시간이 꽤 걸려도 중앙계단을 통해 내려오면 옥상에서 외부까지 순식간이다.
"여기! 이쪽이야! 학생!"
드디어 바깥으로 나가니 운동장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괜찮니?"
"연기 안 마셨어?"
구급대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모포를 둘러주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헤헤!"
나와 도화지는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안내되었다. 중증 환자들은 바로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다치지 않은 아이들은 이곳에 있다가 바로 보호자에게 인도될 예정이었다.
경찰들이 학생들 사이로 다니면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감염자들이 왜 학교를 습격했는지 원인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근데 누나."
"응?"
"누나는 우리 학교 학생 아니잖아요. 뭐라고 하려고요?"
"나, 이거 마실 건데?"
그녀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드링크를 하나 꺼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지! 어때? 프로 같아?"
헐, 저걸 챙겼네?
하긴, 은신 드링크라면 걸리지 않고 나갈 순 있겠다.
'정말 끝난 건가….'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줄은 오늘 아침에 등교할 때까지 상상도 못 했다.
"민준아. 재능마켓에 언제 갈 거야?"
"아마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요? 엄마도 소식을 들었을 거니까…."
"알았어. 그러면 전화해. 갈 때 같이 가자. 그리고 할머니가 김치 너무 잘 드셔! 어머니께 고맙다고 꼭 전해드려!"
퍼엉-!
-꺄아!
-파편 조심해!
학교 안에서 또 뭔가가 터졌다.
"장난 아니네…."
내게만 일어나던 비현실이 내 일상을 덮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