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무기를 선택하세요.】
"이걸로 할래!"
"자 잠깐…."
내가 손써볼 틈도 없었다.
【뿅망치
매력+1
방어력+1
타격력+2
힘+1
귀여운 분홍색 외형을 지녔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둔기.】
"왜?"
"아, 아니에요."
됐다, 의외로 쓸만할지도….
도화지가 고른 무기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이런저런 추가 스텟이 잔뜩 붙어있었는데,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커서 이질적인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녀와 잘 어울리는 기분도 들었다.
'방어력이 워낙에 빵빵하니까 한방이 있는 무기가 좋을지도.'
나는 잠시 유리 벽을 바라보았다.
【입장까지 12분 남았습니다.】
'쓸까?'
오히려 나는 계속 고민 중이었다.
어떤 미션이 나올지 모르는 만큼 준비는 완벽할수록 좋다. 하지만 7만 포인트 넘게 모은 걸 이렇게 쓰기엔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내겐 목표가 있었다.
【스킬: 스크류 샷! 회전력이 더해진 화살을 쏠 수 있다. 가격:100,000p.】
무려 10만 포인트짜리 스킬!
이걸 본 순간부터 나는 다른 아이템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첫 미션이니까 그렇게 어려운 게 나올 리 없어.'
지력+4가 합리적인 추론을 내놨다. 재능마켓 미션들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고, 중급으로 변하는 순간 큰 폭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도화지는 이제 첫 번째 체류 시간 획득 미션이기에 상대적으로 내겐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그냥 간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투명한 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깨달았다.
"어어어? 여기는?"
"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외쳤다.
"누나! 잠깐만 여기 있어요! 범아! 이리 와!"
뛰었다.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어떤 가능성에 머리가 핑핑 돌아갈 때, 나는 베이스캠프 밖으로 나왔다.
휘이이이잉!
칼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냥 바람이 아니라 눈보라를 잔뜩 머금은 거였다.
【미션: 부패의 주인을 사냥하라!】
"허얼…."
그랬다. 도화지가 받은 미션은 내가 예전에 클리어했던 바로 그 체류 시간 미션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와! 추워! 춥다! 너무 추워! 민준아! 이거라도 입어!"
뒤를 돌아보니 도화지가 이미 나와 있었다. 보급품 상자에서 이것저것 꺼내입었는지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기다리라니까…."
"으읏! 추워! 우리 이제 뭐 해? 부패의 주인 어쩌고를 사냥하라는데? 어려운 건가?"
"옷 잘 여미고, 따라오세요."
나는 냉기에 저항하는 스킬이 있었기에 춥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두렵지도 않았다.
도화지를 이끌고, 한곳으로 걸어갔다. 발이 푹푹 빠졌다. 춥다고 꿍얼대면서도 재밌는지 도화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따가 눈사람 만들래? 눈 오리도 좋고!"
"그럴 시간 없거든요…."
할머니 손에서 커서 그런지 도화지는 가끔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어떨 때는 어른스럽다가도 이럴 때는 천진난만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가죠."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이미 와본 길. 이곳을 어찌 잊을까?
그러다가 한 곳에서 멈춰 섰다.
"헉 저게 뭐야! 안에 사람이 있나 봐! 히익? 방금 날 본거지? 그치? 눈이 마주쳤다고!"
【얼어붙은 좀비가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얼어붙은 좀비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1분 후, 좀비가 풀려납니다.】
"가까이 오세요."
내가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도화지를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위기 상황에서 내가 도와줄 순 없는 노릇이다.
"1분 후에 이놈이 밖으로 나올 거에요. 그 전에 해결하는 게 좋아요."
"나보고 하라고?"
"그래야 해요. 혹시 위험하게 되면 제가 도와줄 테니까 그걸로 쳐봐요."
"알았어! 나도 도움이 돼야지!"
인어 공주를 주먹으로 해결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앞으로 모든 괴물을 그렇게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후아, 후아. 막상 하려니까 떨려!"
나는 만약을 위해 활을 겨누고 기다렸다.
쩌저적!
얼음덩어리가 갈라지기 시작하자 도화지의 숨이 더 거칠어졌지만, 나는 딱히 긴장하진 않았다. 그래봐야 좀비다. 오히려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해왔던 순서대로 도화지가 미션을 받는다면….'
한 사람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라면을 갖다줄 수 있겠는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희망이 생겼다.
'녀석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벌써 닭이 되어버린 건 아니겠지?'
병아리도 생각났다.
이때, 뿅망치를 두 손으로 잡은 도화지가 얼음덩어리를 후려쳤다.
뿅!
"…."
왜 저딴 소리가 나는 건데. 전혀 강해 보이질 않잖아!
하지만 소리완 다르게 망치는 꽤 강력한 무기였다.
쩌저저적!
한방에 금이 가더니,
"꺄아! 무서워! 징그러워어어어어!"
얼음 사이로 드러난 좀비 머리를 도화지의 뿅망치가 강타했다.
퍼억!
박살 나는 좀비 머리를 보면서 나는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 역시 그때도 느꼈지만, 둔기를 가져왔었어야 했어.'
괜히 칼을 골랐다가 한참 고생했던 게 떠올랐다.
【좀비를 사냥했습니다.】
【30p를 얻었습니다.】
고작 30포인트….
참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도화지는 나완 전혀 다른 기분인가보다. 그녀가 펄쩍펄쩍 뛸 때마다 싸구려 우의가 바람에 날렸다.
"우와! 내가 잡았어! 레벨도 올랐어! 뭐지? 뭐지?"
"가요. 더 있어요. 안 추워요?"
"응! 견딜만해!"
우린 빠르게 좀비들을 해치웠다. 도화지의 뿅망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는데, 아이템도 나왔다.
"오오! 이거 봐! 마시면 안 춥대! 지금 마실까?"
"마셔봐요. 나아질 거예요."
나는 그녈 보며 웃었다.
내가 초고수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이번 미션을 하면서 드는 기분은 초보 사냥터에 잠시 들른 고레벨 플레이어 기분이었다. 내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좀비가 움직이질 않으니 도화지는 곧잘 쳐댔는데, 인어 공주 같은 것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확실히 남다르긴 하지.'
화끈 드링크를 꿀꺽꿀꺽 마시는 도화지를 보며 대견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 나이 여자아이가 이 정도 적응하면 놀라운 일 아닌가?
"누나."
"응?"
"이번엔 보스를 잡으러 갈 거예요. 무식하게 크고 무섭게 생겼는데, 생각보다 느리거든요? 누나도 경험을 쌓아야 하니까 저는 위급할 때만 나설게요. 누나가 해보셔야 해요."
"으응. 노력해볼게. 근데 얼마나 큰데?"
"보면 알아요."
나는 보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곧장 걸어갔다. 그러면서 범이를 가방에 넣었다.
【부패의 주인과 조우했습니다.】
그리곤 곧장 문을 열었다.
"허어억! 저게 뭐야? 겁나 크잖아!"
【미션을 완수하기 전까지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특정 효과가 있는 아이템으로도 부술 수 없습니다.】
카아아아아아아!
우릴 발견한 부패의 주인이 포효했다.
하지만 나는 뭔가 허무했다.
아아, 너는 그저 초보들이 거쳐 가는 그런 녀석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때 얼마나 벌벌 떨었던가….
"누나, 침착하세요. 크기는 커도 느려요. 누나 방어력이라면 공격을 받아도 위험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과감하게 해보세요!"
"과감하게 뭘 해!"
"공격요!"
"히이이이익! 온다! 온다고오오!"
내 뒤로 숨으려는 도화지를 보면서 나는 일부러 자릴 피해버렸다.
"헉! 야! 어디가! 나 버리지 마! 싫어어어어어!"
"도망쳐도 좋아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공격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주력이 상승했습니다.】
도화지가 계속 따라와서 어쩔 수 없이 거리를 확 벌려버렸다.
"아아아악! 가지 마! 민준아아아아!"
애처롭지만, 이건 그녀의 시험이었다. 내가 나서야 할 때면 하겠지만, 그녀도 적과 마주하는 법을 깨달아야만 했다.
휘익!
도화지의 발목이 큰 좀비의 손아귀에 잡혔다.
"꺄아아아아아!"
위로 들린 그녀는 버둥대며 비명을 질렀다. 큰 좀비는 그녀를 보며 기분 좋은지 연신 포효했다.
쿠오오오오오오!
한입에 삼켜버리기라도 하려는지 입 쪽으로 그녀를 당겨오던 큰 좀비.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화지를 너무 얕본 것 같다.
"싫다고 이 자식아!"
거꾸로 매달려서도 두 손으로 뿅망치를 휘두르는 도화지였고,
뿅!
볼에 정확하게 닿은 뿅망치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퍼억!
놈의 얼굴이 으스러졌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손에 힘이 풀려 도화지를 놔버린 뒤에도 서서 부들부들 떨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얼굴 절반이 날아가면서 뇌 기능이 잠시 정지한 것 같다.
"감히 어딜 만져!"
도화지가 씩씩거리면서 뿅망치를 휘둘렀다.
뿅뿅뿅뿅!
정강이부터 시작해서 가슴까지 박살 나기 시작한 부패의 주인은 후두둑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얼굴이 도화지의 눈높이로 내려왔을 때,
뾰옹!
그녀의 뿅망치가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
헐, 저렇게도 되는구나….
【부패의 주인을 물리쳤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하악, 하악."
어느새 도화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넝마가 된 부패의 주인을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잘했어요. 누나."
【뿅망치가 소멸합니다.】
"끝난 거야?"
"네."
반짝.
아이템이 나왔다.
나는 그걸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누나 거에요."
돌을 건네며 나는 재료 수집망을 꺼냈다.
촤악-!
그물이 큰 좀비의 몸을 가두는 걸 보며 나는 도화지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
.
.
【재능마켓에 입장했습니다.】
바리바리 싸 들고 간 음식과 소모품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빠르게 끝낸 미션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같았다.
그러나 보상은 적지 않았다.
【썩은 피x10을 얻었습니다.】
【썩은 살x10을 얻었습니다.】
【빈 병x3을 얻었습니다.】
재료 수집망을 써서 그런지 재료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도화지에게도 첫 레어 무기가 지급되었다.
【러브러브 아이스 뿅망치(레어)(귀속)
뿅망치가 부패의 주인에 숙성되어 특별한 성능을 지니게 되었다.
매력+1
방어력+1
힘+1
고유 효과: 타격 시 적은 확률로 강렬한 매혹을 발동한다.
착용 효과: 일정 확률로 추가 타격을 부여한다.
추가 효과: 망치를 장비했을 때 추위 내성이 조금 올라간다.】
이름이 왜 저따위인지 모르겠지만, 도화지는 꺄아! 소리 질렀다.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분홍색이야!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았지? 오! 센스 있는데?"
"그걸 그대로 들고 다닐 순 없을 거니까 적당한 거로 커스텀 하고요. 개인 소환창고 생길 때까진 늘 가지고 다니는 게 좋아요. 갑자기 써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스텟은 그렇다 쳐도 매혹과 추가 타격, 추위 내성까지. 확실히 성능은 내 활에 밀리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도화지에게도 무기가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누나."
"응?"
"이번엔 진짜 잘했어요."
빈말이 아니라 도화지는 정말 잘해주었다. 머리라도 쓸어줄까 하다가 참았다. 괜히 오해할라.
기특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도화지가 몸을 뒤틀었다.
"아직도 흥분돼!"
그럴만했다. 그녀만의 첫 전투에서 이긴 날이었으니까.
"우리 노래방 갈래? 내가 쏠게! 오늘 같은 날 마셔야지!"
"뭘 마셔요?"
"콜라!"
"…먼저 갈게요. 체육관 가야 해서요."
"야아! 이러기야! 야아! 도민준!"
"시간 아껴 쓰세요. 범아, 가자!"
나는 그렇게 말하곤 재능마켓에서 나왔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나는 생각했다.
'다음만 확인해보면 알게 될 거야.'
도화지가 이번에 받은 체류 시간을 모두 소모하면 두 번째는 정글이었다. 이것도 정말 나와 같다면 반가운 얼굴을 조만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