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방심하지 말고 언제나 조심해야 하네!
짧은 팔을 흔드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범이와 길을 나섰다. 그는 내게 오팔 따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낚시 도구를 만드는 법과 물고기를 잡는 법이었다.
하지만 낚싯바늘을 만드는 과정에서 놀라운 스킬을 얻었다.
【세공: 이제 장비를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흑철을 얇게 펴서 10개의 화살을 만들었다.
【흑철 화살(레어): 웬만한 불에 녹거나 휘지 않는다. 매우 강한 파괴력을 지녔다.】
최대한 얇게 만들었는데도 이 화살 하나가 내 활보다도 무거웠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나는 바위 사이를 경쾌하게 뛰면서 오팔이 박힌 열 개의 불구덩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보았다.
"…."
계단처럼 박혀 있는 화살들. 내 과거와 마주치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시작해볼까?"
범이를 보며 말한 뒤 활 통에서 흑철 화살을 꺼냈다.
그리곤 주저 없이 쐈다.
쌔애애애애애액!
날아간 화살이 오팔 위쪽 80cm 부근에 박혔다. 사실 어르신께 20년 전의 사냥꾼은 어떻게 오팔을 땄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해내고 싶었다.
두 달 가까이 망치질을 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뮬레이션했던 대로 나는 오차 없이 움직였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가방에 망치 하나만 담아서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박아 둔 화살을 지지대 삼아서 원숭이처럼 빠르게 하강했다. 열기가 느껴졌지만 무려 유니크 망치에서 보호하는 신비한 힘은 육체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 하게 했다.
'철봉이 큰 도움이 됐어.'
순발력이 올랐고 코어가 중급이 되면서 균형감각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지만, 철봉 필라테스는 이런 것도 가능케 했다.
흔들.
흑철 화살을 한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그런 뒤, 몸을 완전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코앞에서 부글부글 용암이 끓어오르는데도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오팔을 움켜쥐었다.
으적!
만약 단단히 박혀 있으면 망치를 써야 했겠지만, 힘+3과 유니크 망치를 얻고 늘어난 근력+1이 더해지면서 악력으로만 오팔을 비틀어 뽑아낼 수 있었다.
【오팔을 획득했습니다. 1/10.】
올라가는 건 내려온 것보다 훨씬 쉽다. 팔만 구부리면 몸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위로 올라와서 오팔을 들어보았다.
"…."
이거 때문에 그간 고생한 시간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지만, 어르신을 만난 일 자체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하아…. 오팔…."
이제 9개 남았다.
.
.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나는 오자마자 물었다.
"다시 갈 순 없어?"
【수호자가 포인트를 지정하지 않은 곳에 다시 갈 수 없습니다.】
안타깝네. 라면을 꼭 주고 싶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그 물고기 넣고 끓이면 일품 해물라면 딱인데 말이지.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9,000p를 얻었습니다.】
나는 범이와 샤워실로 들어가며 메시지를 들었다.
솨아아아아.
몸의 상처는 없었지만, 옷가지가 상당히 상해있었다. 그것들이 복구되며 새것처럼 변해갔다. 범이의 털 곳곳에 묻은 먼지도 씻겨 내려갔다.
【보상을 수령하세요.】
샤워실에서 나와 벽장을 열었다.
어김없이 돌들이 반짝거렸다.
【빈 병x3.】
【흑철 가루x10.】
【용암어 돌비늘x10.】
【중급 필라테스 이용권.】
【용암어 고기x50.】
안에서 워낙 좋은 것들을 제작해서 그런지 보상은 대체로 평범했다. 하지만 이번 미션에서 내가 진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 건 바로 포인트였다.
【누적 포인트 71,900p.】
【재능마켓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했습니다.】
망치질과 아이템 제작, 물고기를 잡으며 얻은 포인트가 어마어마했다. 이 엄청난 포인트로 당장 뭘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번에도 참…힘들었다."
나는 벌러덩 누웠다. 재능마켓에 돌아와 있으니 어르신과의 일들이 하룻밤 꿈처럼 느껴졌다.
근데 계속 이렇게 있긴 너무 아깝다. 시간 벌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나는 포인트 일부로 어머니가 삭당에서 쓸 몇 개의 드링크를 만들어놓고 재능마켓에서 나왔다. 새로 얻은 재료와 빈 병으로도 드링크를 만들어봤다. 이건 숙성되어야 효과를 알 수 있을 거다.
이렇게 내 인생 가장 길었던 금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주말엔 공부만 했다. 재능마켓을 오가며 공부, 또 공부에 취했다. 체류 시간을 상당히 소모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처음부터 공부할 시간을 벌려고 미션을 했던 거니까.
월요일 아침.
"어?"
집에서 나왔는데 예원이가 서 있었다.
"웬일이야?"
"시험이잖아."
"아아…. 톡이라도 하지. 놀랐잖아."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성공했네!"
그러고 보니까 예원이 얼굴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두 달 동안 오백 년 산 어르신만 보다가 예원이를 보니까 눈이 확 뜨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어르신과의 시간이 싫었다는 건 아니다! 내가 방법만 찾으면 진짜 라면 10박스 사서 갖다줄 거다.
"공부 많이 했어?"
"그럭저럭."
"와? 그 표정 뭐야? 진짜 단단히 했나 본데?"
망치질에 비하면 공부하는 건 일도 아니다. 오팔 따는 미션에 비하면 암기과목 외우는 건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는, 괜찮겠어?"
"어차피 나는 길이 다른걸."
"하긴…."
"채린 언니는 시험도 왜 보냐면서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본다고 했어."
"시험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 주가 데뷔무대잖아. 잘 말하면 선생님도 괜찮다 하실 것 같긴 했는데…."
예원이가 빙글 돌며 말했다.
"너도 볼 겸. 헤헤."
"응?"
"아니야! 늦겠다. 가자!"
-까앙! 까앙! 깡!
아직도 귓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때다.
-앗! 예원이다!
-민준이도 있어!
-예원아! 안녕!
저쪽에서 여자애들이 우르르 뛰어왔다. 예원이가 손을 살살 흔들며 그쪽으로 합류했다.
-이번 주에 무대 선 다면서?
-꺄아! 어떻게! 내가 다 심장 떨려!
-연습 많이 했니?
예원이는 아이돌이었다. 오디션에 나가는 것과 정식으로 데뷔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일부러 슬쩍 거릴 두면서 예원이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예민한 감각이 녀석을 파악했다.
"도민준. 열공했냐?"
박인성이다.
"너는?"
"나야, 뭐 항상 한결같은 매력의 소유자잖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고 울 엄마가 그랬어."
"공부 쪽으론 갑자기 변하는 걸 바라실걸?"
"그러다가 더 안 좋아지면 그 책임은 내가 다 져야 하잖아? 그건 효도가 아니라고."
말은 잘한다.
박인성과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등교한 예원이 덕분에 반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하지만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첫날이다.
-마킹 잘하고! 밀려 쓰지 않도록 해!
시험이 시작되었다.
목숨을 건 미션을 하던 나에겐 이런 평화가 신기했다. 주말 동안 복습했던 문제들이 시험지에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틀 동안 720시간 정도를 썼으니까 실제로 내가 공부한 시간은 밖에서 흐른 시간까지 합치면 한 달에 육박했다. 벼락치기도 이런 벼락치기가 없었는데 그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그 누구보다 먼저 문제를 풀고 어머니 가게로 향했다.
그 길에 도화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민준아.
"네?"
-우리 조만간 봐야 할 것 같아. 작은 냄새들이 곳곳에서 퍼지고 있어.
"머리 아플 정도예요?"
-아니. 그 백작만큼 아찔한 건 아니지만 숫자가 많아.
"알겠어요. 내일 학교 끝나고 바로 갈게요."
-응! 그럼 내일 봐!
이게 그 기생충 미션과 관련이 있는 걸까?
어쨌든 오늘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어르신과 함께하면서 고독과 외로움을 절실히 봤다. 세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겐 가족이 있고 어머니는 내 유일한 분이셨다.
가게 앞에 도착했다.
오늘도 여전히 긴 줄이 있다.
그런데 그 줄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학생!
"아…?"
이든이 서 있었다.
"웬일이세요? 계약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하하! 오늘은 손님으로 왔어요! 사장님 손맛을 잊을 수가 있어야죠!"
"아…."
이든이 내게 바짝 붙어서 물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만두는 어디서 산 거예요?"
"…어머니와 제가 만든 거예요."
"역시!"
그가 손을 탁! 쳤다.
"그럴 줄 알았어요! 먹자마자 장인의 맛이 팍팍 느껴졌다니까요! 우리 셰프들이 감동해서 펑펑 울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하…. 하하…."
나도 그거 처음 먹었을 때는 눈물이 찔끔 났었다. 미각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꿈에도 나올 맛이긴 하지.
"속을 뭐로 채운 거예요? 조금만 알려주세요!"
그와 잠깐 얘기하다가 가게로 들어갔다. 일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
"아들!"
그 덕분에 어머니가 나를 볼 여유도 있었다.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근데 밖에 이든 씨 와 계셔."
"아, 그랬니? 호호! 정신없어서 몰랐네."
오늘도 가게는 문전성시였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어머니를 도왔다. 하지 말라며, 차라리 공부나 더 하라며 어머니가 등을 떠밀었지만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었다.
이윽고 장사가 끝났다.
"잠깐만! 금방 만들어줄게!"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문을 닫고 어머니만을 위한 요리를 할 생각이었다. 늘 손님들에게 음식을 해주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
소주도 한 병 준비했다.
그런데 불청객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오오오."
"…!?"
주방에서 목소릴 듣자마자 알았다.
"어머? 누구?"
"민준이 친구입니다! 여자사람친구요!"
"호호호! 민준이한테 이렇게 예쁜 친구가 있었니? 어서 와요. 여기 앉아요!"
"감사합니다! 헤헷!"
"밥은 먹었어요? 마침 민준이가 요리를 해준다고 하는데."
"아니요! 안 먹었습니다!"
나는 밖을 보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민준이네 교복이 아니네?"
"네! 저는 인성고 다녀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알바하다 만났어요. 헤헤!"
"아! 사장님은 건강하시고요?"
"네! 정정하십니다! 오늘도 뵙고 왔는걸요!"
"알바 끝나고 바로 온 거예요? 피곤하겠네."
그러면 밥도 먹고 왔을 거 아니냐…. 내가 그쪽 루틴을 알거든?
도화지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민준이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니잖아. 그 말투 뭐야. 거짓말이잖아!
속이 부글부글했지만 프라이팬에 올려둔 소중한 고기가 탈까 봐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밤늦게 다니면 부모님이 걱정하세요."
"괜찮습니다! 부모님 안 계십니다!"
자랑이냐. 그게.
"…왜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할머니랑 둘이 살거든요!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행복해요! 진짜로요!"
어머니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를 빤히 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도화지의 손을 잡았다.
"그랬구나…."
아, 이거 불길한데.
"혹시라도 배고프면 언제든 와요.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헤헤! 정말요?"
"참 밝아서 좋네. 웃는 것도 예쁘고."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어머니!"
"호호호! 그래요. 엄마라고 생각하고 어려워하지 말아요. 전에 민준이가 여자친구 있다고 하더니…. 참, 이름이 뭐라고요?"
"어머, 정말요? 제 얘기도 했어요? 아차, 저는 도화지입니다!"
"우리 민준이랑 성도 같네? 호호호!"
아,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