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00화 (100/277)

#100화

【미션: 오팔 10개를 회수하라.】

'오팔이 뭐지?'

규웃?

범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 녀석 얼굴만 보고 있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닐 테니 주변을 둘러보자.

"돌이네, 돌이야."

베이스캠프는 암석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단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단단한 망치를 얻었습니다.】

【단단한 망치: 모조리 철로 만든 튼튼한 망치.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보급품. 판매 불가. 귀속 불가.】

저번엔 삽이더니, 이번엔 망치 하나다.

'필요하니까 줬겠지.'

이거라도 소중히 챙겨야 했다. 쓸모없는 걸 주는 경운 없었으니까.

나는 장비를 점검하면서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항상 이 순간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렁이밭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100일도 안 된 것 같은데, 100년은 더 된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이제 1학년 1학기도 마치지 않은 고등학생이지만 재능마켓 내에선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필라테스까지 포함하면 1년은 지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런 건 더 생각해 봐야 의미도 없으니까 이곳의 생태계부터 알아야 했다. 망치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섰다.

'더워.'

출구가 가까워지자 열기가 느껴졌다. 뜨거운 바람이라고 해야 하나? 후끈! 몰아치는 공기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슬금슬금 움직여서 머리만 살짝 내밀어 본다.

【필드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제 대미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쳇…."

다리는 안 나가서 괜찮겠거니 했는데, 꼼수는 통하지 않나 보다.

몸까지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돌산이구나…."

주변이 온통 돌이었다.

여길 봐도 돌, 저길 봐도 돌이다.

'돌과 망치라.'

아까 뭘 회수하라고 했더라? 오팔?

일단은 아무것도 특정하지 말자. 이제까지 내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지력+4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재능마켓의 미친 상상력 때문이다.

'비만 오지 마라.'

홍수를 겪어 봐서 그런지 덜컥 겁부터 났다. 이런 곳에서 비가 오면 순식간에 세상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면 나는 급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구르다가 저런 돌들에 부딪혀 머리가 터져 버리겠지.

"…."

나는 낮은 바위를 밟고 올라섰다. 크고 작은 돌이 계속 시야를 가려서 일단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조난 상황에선 높은 곳에서 시야 확보부터 하는 거야.'

세상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군대에서 배웠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마침내 올라선 곳에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빨간 액체는. 설마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규유우.

범이가 싫다는 듯 몸을 털었다. 에치, 에취! 재채기까지 해 댔다. 이건 불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유황 때문이었다.

"으으…."

듬성듬성 연못처럼 구멍이 있었고, 그 연못은 물 대신 새빨간 용암이 끓고 있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살면서 이런 광경을 누가 자주 볼 수 있을까? TV에서만 봤지, 실제로 용암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늘은 연기로 자욱했다. 불구덩이는 뭐가 떨어지든 죄다 녹여 버릴 거야! 외치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끓고 있었다. 저건 빠지면 그냥 죽는 거다. I'll be back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여유 따윈 절대 없을 거란 거다.

"일단 여긴 아닌 것 같다, 범아."

나는 범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싶었다.

꼭 그래야 했다.

힐끔.

뭔가가 보였지만 무시하면서 더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무조건 여긴 아닐 거야. 저쪽으로 갈까?"

규우!

범이도 유황 냄새가 지독한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힐끔.

그런데 막상 몸을 돌려 걸어가려고 해 봐도 계속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 그러지 마. 아니잖아. 아니라고."

뭔가 용암에 떨어질 때마다 포옹! 빨간 액체가 튀어 오르며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저건 닿기만 해도 살과 뼈를 녹여 버리는 초고온의 액체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절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들 중에 원탑이란 거다.

"아닌데…."

나는 마음과 달리 조금씩 불구덩이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발을 삐끗할 수도 있기 때문에 거미처럼 손과 발을 다 써서 바위에 붙어 있다.

내가 아까부터 힐끔힐끔 보던 것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반짝!

불구덩이 아래쪽에 붙은 주먹만 한 돌이 나를 보며 외치는 것 같았다.

안녕? 내가 오팔이야!

'아니라고 해 줄래?'

내가 오팔이야! 어서 나를 가져!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오팔을 발견했습니다.】

"개×끼야!"

모르겠다, 누구한테 욕한 건지. 하지만 이렇게 쏟아 내지 않았다면 나는 저 오팔을 향해서 근처의 돌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방끗.

웃는 것같이 반짝이는 오팔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보석처럼 보였다. 저게 불구덩이 바로 위에 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당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아…. 이건 진짜 아닌데."

불구덩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벽면이 매끈하게 녹아서 미끌미끌하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단 거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근처까지만 가면 뭐든 불이 붙을 거다. 용암에 빠져야만 죽는 게 아니다. 그냥 이걸 보면 누구라도 저 근처만 가면 불타 버릴 거란 걸 알 수 있을 거다.

"…."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손에 든 망치를 봤다. 그리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나는 돌아섰다. 혹시 이 망치로 주변 돌을 깨서 저기 저 오팔까지 파 내려가야 한다는 그런 끔찍한 상상은 접어 두자. 차라리 망치로 내 머릴 부수는 게 더 현실성 있다.

나는 주변을 다녔다.

불구덩이는 정확히 10개였다. 그리고 마치 누가 아주 절묘한 곳에서 갖다 박아 둔 것처럼 아슬아슬한 위치에 오팔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10개의 불구덩이 바깥쪽으론 그 어떤 것도 없이 까맣고 구멍 숭숭 난 돌만 가득했다.

그냥 앉아서 하르방이나 만들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괜히 오팔을 따겠다고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주저앉아서 망치로 바닥을 쳐 보았다.

퍼억!

돌은 단단했다.

"…으."

내 손목이 부서질 뻔했다.

가루가 튀는 게 전부인 돌. 엄청 단단하다는 거다. 이 망치로 저 불구덩이 오팔까지 돌을 깬다는 것 자체가 어떤 난이도냐면, 그냥 내가 망치를 던져서 오팔을 맞힌 다음 오팔이 위로 튀어 오르길 기대하면서 낚아채는 게 나은 수준이었다.

어느 쪽이든 정신 나갔다는 거다.

'아니지.'

나는 정신적 충격을 수습하면서 망치를 내려놓았다.

'꼭 망치를 쓸 필욘 없지 않을까?'

잠깐 삽을 떠올렸다. 나는 삽질 스킬도 있고 좋은 삽도 소유 중이다.

'근데… 하필 돌이니.'

이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삽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다.

이번엔 각종 드링크를 떠올렸다.

'변신을 해?'

뭐로 변하면 저 오팔을 캘 수 있을까? 지렁이? 병아리? 원숭이? 아, 혹시 백작이라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나?

'차라리 싸울 때가 편했어.'

대상이 있고 그게 살아 움직이는 거라면 어떻게 해 볼 용기가 난다. 처음엔 고블린 하나 상대하고도 정신적 고통을 겪었지만 나도 이제 꽤 숙련된 사냥꾼이다.

그런데 저런 무생물을, 그것도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는 압도적인 자연을 내 앞에 던져 주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

나는 변기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불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 생각하는 사람이 괜히 이 자세가 아니었구나!

'떠올려야 해. 여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쪽으로 더 간다고 해도 이 환경이 달라지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돌을 파서 지렁이 같은 게 나올 것 같지 않다.

'비도 안 올 것 같고. 시간이 갈수록 내게 불리해져.'

언제부턴가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게 익숙해지는 것 같다. 범이가 있지만, 대화가 안 되니 고독함은 남는다. 새삼 그 시끄럽고 이상하던 도화지의 수다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달았다.

"하아…."

누가 나를 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개구리야, 보고 싶다."

한강에서 괴물 3종 세트를 사냥할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

발치의 돌을 잡았다. 그리곤 불구덩이에 던졌다.

포옹!

돌이 빠지면서 화르르륵! 불꽃이 타올랐는데 그게 꼭 악마의 혓바닥 같았다.

"그렇지, 저기 빠지면 그냥 죽는 거야. 방금 봤잖아. 돌에 불이 붙는다니까? 돌에?"

심청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청아, 너도 참 힘들었겠다. 그치?

30분쯤 지났다.

과거의 나였다면 몇 시간이고 이러고 있었을 거다. 재능마켓을 알기 전의 나였다면, 될 대로 되라고 며칠 더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력+4는 나를 일으켰다.

"내가 말이지,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원래는 아니었는데, 이제 그렇게 되어 버렸거든. 포기할 것 같냐? 응?"

오팔을 저기에 박아 둔 어떤 놈을 향해 말하면서 나는 활을 꺼냈다.

물론 이 활을 쏴서 오팔을 맞히려는 건 아니다. 맞혀서 뭘 어쩌게? 더 현실적으로 가자.

그으으으윽!

시위를 몇 번 당겼다.

그으으으으으으윽!

끝까지 당겨 보았다.

확실히 용의 심줄을 끼웠더니 장난이 아니다.

이제 활을 뽑았다.

첫 번째 실험은 내 화살이 저 벽을 뚫고 깊게 박힐 수 있냐는 거다.

쌔애애애애액!

'인내'를 등에 업은 화살은 직선으로 날아가서 벽에 콱! 박혔다.

"오…."

이건 나도 예상했다. '인내'의 추가 타격은 항상 옳다. 하지만 저거 하나론 안 된다. 이번엔 좀 더 아래쪽을 겨냥하고 두 번째 화살을 쐈다.

콱!

"된다…."

천만다행이었다. 일반 화살로는 안 되겠지만 강철 촉 화살은 벽을 뚫었고, 내 몸이 올라가도 버틸 수 있는 깊이로 박혀 주었다. 나는 나만의 계단을 만들려는 거다.

피피피피피핏!

화살을 쏴 댔다.

【강철 촉 화살이 993개 남았습니다.】

이건 무려 대당 5포인트짜리다. 필드에 올 땐 웬만해선 1,000발을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무한정 뽑아 쓸 수 없는 물건이란 말이다.

'한 발이라도 아껴야 해!'

실수는 없어야 한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계단처럼 저 반대편 벽을 노렸다. 두 발로 아래 두 개를 밟고, 그러면서 두 손으로 위의 것 두 개를 밟을 수 있도록 두 개씩 나란히 화살을 벽에 박았다.

2개, 4개, 6개, 8개.

오팔까지 내려가는 계단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구덩이 깊이는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 것은 10터쯤 된다. 안전하게 화살 사이의 간격을 1미터로 잡으면 화살 20발로 계단을 만들 수 있었다.

'거의 다 됐어! 나 혹시 천재인가?'

그럴 수도 있다. 지력+4는 확실히 대단했다. 그리고 이 정도 노력했는데, 자화자찬 정돈 할 수 있잖아? 이런 거라도 안 하면 미쳐 버리겠단 말이다.

콱! 콱!

두 개의 화살이 또 나란히 박혔다. 나는 지금 초집중 상태였다. 단 한 발의 화살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매 순간 혼신을 다했다. 그게 왜 그러냐면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들어갔을 때 그걸 내가 밟고 벽에서 툭 빠져 버리는 끔찍한 생각이 떠올라서 그렇다.

그러면?

으아아아아아!

빠져서 홀랑 타 죽겠지.

'이제 네 개만.'

그러면 오팔까지 닿는다.

나는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놨다.

피잉.

화살이 묵직하고 빠르게 날아가서 벽에 박혔을 때, 나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를 퍼뜩 떠올렸다.

화르르르륵!

화살대에 불이 붙었다.

"어어어어? 어어어엇?"

그러더니 촉만 남기고, 대가 타 버렸다.

"…."

그렇구나. 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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