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짜잔! 이거 봐라!"
도화지는 이미 재능마켓 쇼핑을 끝낸 것 같았다.
"이쁘지? 어때? 날씬해 보여?"
각선미를 뽐내며 포즈를 취하는 도화지의 다리엔 살색 스타킹이 있었다.
"…."
저놈의 스타킹….
결국 사 버렸구나.
나는 유리 벽에 다가갔다.
비워진 곳에 설명서가 보였다.
【여성용 스타킹: 다리가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방어력+1. 구멍이 나지 않는다. 가격: 25,000p.】
"이만오천 포인트…."
아이고, 머리야. 그나마 방어력이 붙어서 다행인 건가?
"히히! 너무 좋아! 진짜 날씬해 보이는 것 같지 않니?"
"아, 네…."
나는 벽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너 오면 같이 보려고 그건 안 열어 봤어!"
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돌들이 많다. 과연 '레어'급 미션이었던가?
"우와! 이건 색깔이 다르네?"
나는 돌들을 하나씩 집어 확인했다.
【빈 병(레어): 다섯 가지 재료를 섞을 수 있다.】
【고급 뱀파이어 피×10.】
【추적자의 목걸이(레어): 착용하면 좀 더 선명하게 위험도를 감지할 수 있다. 추가 효과로 추적자의 기척을 적에게 완전히 숨길 수 있다. 방어력+1.】
"우와! 이거 예쁘다!"
이건 누가 봐도 도화지 맞춤형 아이템이었다.
"나 주는 거야?"
"누나 거예요."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걸어 줄래?"
촉촉하게 젖어 드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목걸이를 저쪽으로 던져 버렸다.
"으에에엑? 무슨 짓거리야!"
"마음에 안 드시면 범이 주려고요."
"아니야! 내 거야! 내가 가질 거라고!"
저쪽으로 뛰어가는 도화지를 보며 남은 돌을 확인했다.
【재료 수집망(레어): 버튼을 누르면 죽은 재료를 회수해 보관할 수 있는 그물이 발사된다. 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허엇?"
"왜? 뭔데?"
쪼그려 앉아서 목걸이를 차던 도화지가 물었다.
"좋은 거예요. 꼭 필요한 거."
무려 5만 포인트짜리 아이템이다. 1,000p짜리 일회용 수집망을 쓸 때마다 얼마나 속이 쓰렸었던가! 이걸 줬다고? 웬일이래!
그런데 더 멋진 건 아직 돌이 남았다는 거다.
【재생 드링크: 흉터까지 지울 수 있는 강력한 드링크! 상처 회복에도 매우 효과가 좋다.】
'오….'
재생 드링크라니 목숨을 여벌로 챙긴 기분이다.
이제 마지막이 남았다.
노랗게 빛나는 돌을 확인할 차례!
【뱀파이어의 날개(유니크)】
'유니크!'
【허공에서 일정 시간 머물 수 있다. 날개가 펼쳐지면 활강하면서 천천히 추락한다. 날개는 물리적 효과가 없으며 찢어지지 않는다. 바람을 탈 수도 없다.】
"오오…."
내 앞으로 돌이 변하면서 날개 이미지가 나타났다.
"뭐야… 그거 징그러워…."
그녀가 보기엔 그럴 수 있다. 마치 새까만 거미줄 같은 거로 이어 놓은 그물같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나는 외형 따윈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이거면 공중에서도 활을 쏠 수 있어.'
또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전하다는 거다. 이런 아이템이니 유니크 등급이 붙었겠지?
"뭔진 몰라도 너 가져. 난 싫어. 기분 나빠."
도화지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템이 귀속되었습니다.】
【날개는 사용자의 피와 의지에 반응합니다.】
【사용자가 사망하면 날개는 소멸합니다.】
모든 아이템을 확인하고, 유리 벽으로 걸어갔다. 미션을 하면서 모은 포인트가 꽤 넉넉했다.
【용의 수염으로 만든 시위(레어)를 구매하시겠습니까?】
탐나던 물건을 드디어 구매했다. 그러고도 포인트가 조금 남았다.
새로운 시위를 활에 걸어 보았다. 그리곤 시위를 손가락으로 튕겨 보았다.
'엄청나게 묵직해.'
보통 사람이라면 이걸 당길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와, 이거 물건인데?'
내 힘+3으로도 끝까지 당기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때였다.
【축하합니다! 모든 미션을 완수했습니다.】
【이제 중급 필라테스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미션이 나오려나 보다. 하지만 이건 나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도화지는 서브 미션인 방어력+15를 달성하지 못해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메인 미션: 기생충을 박멸하라.】
【서브 미션: 유니크 등급 드링크를 제조하라.】
"…?"
기생충은 그렇다 치고, 뭐? 유니크 드링크? 그런 게 존재하긴 하는 거냐?
"왜? 뭔데?"
도화지가 다가왔다.
"아뇨. 아무것도…."
나는 어이가 없어서 더 기다렸다. 혹시 추가 설명이 있을지도 몰랐다.
【기생충은 수호자의 안경이나 추적자의 후각으로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합니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은 수호자의 안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게 끝이야?
"…."
이번 미션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빈 병을 꺼냈다. 이번에 얻은 '레어' 병이다.
'이런 건 하나에 만 포인트쯤 하려나?'
딱 봐도 내 포인트론 못 살 것 같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다섯 가지를 넣을 수 있어. 이 병 하나를 그냥 날리면 언제 또 이런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했다.
어떤 걸 섞어야 하나?
'만약 재료에도 등급이 있다고 치면….'
드링크 제조는 레시피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순전히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재료는 고급 뱀파이어 피야.'
도박은 자고로 큰 판돈이 걸릴수록 보상이 큰 거다.
'이것만 섞는다.'
괜히 다른 걸 섞어 봐야 등급이 떨어질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고급 뱀파이어 피 10개 중에서 다섯 개를 병에 넣었다.
【드링크를 숙성합니다.】
이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었다. 기다려 보는 수밖에.
"누나."
"응? 다 했어?"
"일단은요. 근데 저 운동할 거예요."
"헉…. 필라테스?"
"네."
"으으으…. 싫어어어…."
"같이 하자는 게 아니구요.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게 시작하면 못 나가잖아요. 그런데 누나가 있으니까 어떻게 되나 보려고…."
【필라테스는 혼자서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뭐야? 우리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소름 끼쳐!"
"쩝…."
나도 입맛을 다셨다.
"진짜 할 거야?"
"네."
"너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최대한 나중으로 미룰 텐데."
도화지가 내 어깨를 손으로 툭툭 쳤다.
"그러면 수고하공. 이따가 전화할게."
말은 비장하게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목걸이와 스타킹을 어서 빨리 나가서 자랑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느새 현관까지 달려 나간 그녀는 나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도민준! 파이팅!"
콰앙!
문이 닫혔다.
도화지는 내가 무슨 아침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중급 필라테스 이용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내게 백작을 죽이라는 것과 비슷한 부담을 주었다. 하긴 해야 하는데, '중급'을 떠올려 보면 철봉의 악몽이 절로 연상된다.
"그래! 하자! 해! 설마 죽이겠냐!"
뱀파이어까지 사냥한 나다!
체류 시간도 넉넉했다.
【필라테스를 시작합니다.】
【미션을 완수하기 전까지 재능마켓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불길하지?
중급부터는 어떤 운동인지 미리 알 수가 없었기에 더 속이 타들어 갔다.
【필라테스 복습!】
어? 뭐라고…?
【스쿼트 10,000번, 팔 굽혀 펴기 10,000번, 철봉 오르기 10,000번, 밸런스 볼 오르내리기 10,000번, 철봉 위에서 물구나무 1분 버티기 10,000번.】
와… 이런 젠장할!
【보상: 중급 코어.】
총 5만 회의 역대급 필라테스가 내 앞에 나타났다.
.
.
.
이든은 오늘 저녁을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카밀라 왕엔 늘 대한민국 최상위 1%의 VVIP만 오지만, 오늘의 디너 손님은 더욱 특별한 사람을 초대했기 때문에 특히나 초집중이었다.
'준비는 완벽해!'
왜 그 작은 식당 아줌마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묻는다면 그는 두 가지를 이유로 들 수 있었다.
'감이지.'
세상 모든 위대한 요리는 작은 주방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식당이 되고, 입소문이 퍼지면 점차 규모가 커지다가 많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순간 프랜차이즈로 발전한다.
이게 우습다고? 세계 요식업계가 일 년에 얼마의 매출을 올리는지 알면 아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는,
'맛이고.'
태어나서 처음 맛본 손맛!
사실 이든은 한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일단 위생적이지 않은 식당이 대부분이라고 여겼고, 정확한 계량 없이 그저 잡히는 대로 툭툭 넣고서는 손맛이라고 우겨 대는 게 같잖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새로운 맛에 눈을 떴다. 당장 내일 죽을 수밖에 없는데 딱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그 식당에 가겠노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금요일 디너.
카밀라 왕 최고급 코스 요리를 맛보려면 1인분에 48만 원이다. 평일이나 런치는 좀 더 저렴하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은 이 가격에도 6개월 예약이 꽉 차 있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초고층 빌딩의 레스토랑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문이 열린다. 일단 가격 자체가 깡패라 서민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차질 없죠?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의 말에 수석 셰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얼마나 근엄한지 다른 셰프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든은 이제 안다. 요리사로서의 자존심! 그 김치볶음밥을 이길 순 없겠지만 세상은 많은 요리가 있고 그것의 우열을 가릴 순 없다. 맛이란 게 참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VIP 오셨습니다.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이든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오! 오셨군요! 사장님! 아드님도 반갑습니다!"
"와아….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기 엄청 비싼 데 아닌가요?"
"하하하! 오늘은 저희가 파트너십을 맺는 중요한 날이기에 모든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그저 편히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호호호! 감사해요! 덕분에 머리털 나고 이런 덴 처음 와 보네요!"
그래, 이게 보통 사람들이 카밀라 왕을 찾았을 때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식기부터 인테리어까지 뭐든지 다 최고급! 식재료는 논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관 별개로 오늘따라 긴장한 이든이 두 사람의 의자를 차례로 빼 주었다.
-지배인님께서 직접 서비스하시는데?
-대체 저분들이 누구지?
-이런 적은 처음 아닌가?
와인이 나오거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 디저트 타임에 이든이 인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을 관장하는 건 오늘이 최초였다.
"물, 괜찮으십니까? 각종 음료도 있으니 말씀만 해 주시면 됩니다."
"물이면 돼요. 고맙습니다. 와, 아들. 저기 봐. 진짜 높다. 서울이 다 보이네."
이든은 메뉴판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참고하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이미 S 코스가 준비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그리고 사장님 요리는 이 S 코스의 가장 하단에 위치할 예정입니다. 물론 사장님께서 저희와 파트너가 되신다면요."
"아, 그런데 이 메뉴판. 가격표가 없는데요?"
"저희 카밀라 왕엔 가격표가 있는 메뉴판과 없는 버전의 메뉴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격이 드러나는 걸 불편해하시는 손님들이 많거든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생각보다 많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든은 웃으며 뒷걸음질 치다가 흠칫했다. 민준을 본 것이다.
"아니, 아드님께서 며칠 사이에 왜 이렇게 마르신 겁니까?"
민준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