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백작은 택시를 탔다.
타자마자 운전사의 목을 물었다.
"어어어억-!"
대항도 못 하고 축 늘어진 운전사의 목에서 대량의 피가 백작의 목으로 흘러들었다.
한껏 갈증을 채운 뒤 운전사의 몸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고 그가 운전석에 앉았다.
'이거론 부족해.'
퀸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나도 깊었다. 피는 멈췄지만, 심장에선 독기가 재생을 더디게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부서진 턱도 복구가 안 되고 있었다.
아래턱이 통째로 박살 났다. 이게 재생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다.
'영배야… 너도 퀸에게 당한 것이냐.'
하긴 그게 아니면 영배가 갑자기 실종될 리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영배의 일도 퀸의 난입도.
'숨어서 힘을 키우자. 그분이 오시면 퀸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는 경부 고속 도로를 타고 화성을 향했다. 적당히 외졌으면서도 번화한 도시를 끼고 있는 곳이 필요했다. 상처를 회복하려면 많은 피가 필요했다.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 사람들이 없어지면 의심받을 거다.
'매일 이동해야 돼.'
돈은 없었지만 언제든 빼앗을 수 있었기에 사무실에 둔 금고는 아깝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살아서 퀸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버티자. 버티다 보면 그분도 오실 거야. 퀸이 왔다는 건 그분도 오실 수 있다는 뜻이니까.'
세상 모든 피의 왕.
그분이라면 퀸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몸을 회복하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넘어가자. 여긴 위험해.'
세력은 얼마든지 다시 키울 수 있다. 퀸이 넘어왔다는 정보는 매우 큰 수확이었다.
'이걸 오래 타고 다닐 순 없어.'
인적 드문 시골길에서 그는 택시를 버렸다. 아까 경찰을 봤었다. 그러면 추적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가 산을 탔다. 민가가 몇 개 나타났지만 무시했다. 그가 접근하자 온 마을의 개들이 숨죽였다.
"흐으으…."
턱이 망가져서 침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택시 기사의 피가 그의 가슴팍에 말라붙었다. 권능을 다 사용할 수 있다면 회복도 빠를 거고, 박쥐나 안개 같은 거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그분'의 힘을 빌려 쓰는 처지이기에 그분이 오시지 않는 한 그에게는 육체적 능력밖엔 없었다.
'하필 퀸이라니.'
그녀가 넘어왔다는 건 이 땅에 있는 그녀의 종들도 그녀의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종들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들도 자신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다 여기로 모인다는 뜻이니 최대한 빨리 한국을 떠나야 했다.
백작은 계속해서 빠르게 산을 이동했다. 퀸의 독성은 지독했다. 고작 손톱에 스친 것뿐인데도 부패를 멈출 수 없었다. 그였으니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영배였다면 바로 죽었을 거다.
"…."
하지만 그도 힘에 부쳤다.
그의 등이 나무에 기댔다.
"하아, 하아…."
조금만 쉬어야 할 것 같다. 독기 때문에 머리도 어질했고 상처를 막으려면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았다.
'잠깐만 쉴까.'
이렇게 멀리 왔으니까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컹컹!
멀리서 개 짖는 소리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핸드폰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하늘을 봤다. 달이 환하다.
"크윽."
그가 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독기가 더 강해졌다. 심장의 상처는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피가… 피가 더 필요해."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대론 위험했다. 생각보다 독기가 너무 강했다.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그는 힘겹게 산에서 내려갔다.
가로등이 보였다.
인적 없는 삼거리에서 그는 주변을 보다가 저쪽 민가를 보았다. 저기에 몇 명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피를 마셔야 했다.
'몸도 씻어야 하니까.'
언제까지 산에서 숨어 다닐 순 없었다.
흔들.
그가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꺄르르르르!
"…."
불 켜진 집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입을 달싹였다. 아이가 피는 더 맛있다. 100미터 정도만 가면 마음껏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욱신!
현기증이 다시 밀어닥쳤다.
이런 오르막도 힘들 만큼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는다. 한 명분의 피면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테고, 두 명이라면 퀸의 독기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가 가로등을 등지고 길게 드리웠다.
그가 손을 뻗었다.
"흐으으으…."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집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비틀비틀.
술 취한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는 그의 눈이 점차 탁하게 풀려 갈 때였다.
쉬이이이익.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람 소린가? 아니면 퀸의 독기 때문에 들리는 환청인가?
퍽-!
아니었다.
몸의 고통이 그에게 경고했다.
피하라고!
"크윽…!"
화살 하나가 등에 박혔는데, 불로 지지는 고통이 났다.
화르륵.
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불붙은 화살은 그의 살에 박혀서 몸을 태우고 있었다. 등으로 손을 뻗어 화살을 뽑아내려고 했는데,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퍼억-!
"커억…."
그가 쓰러졌다.
경사가 심한 곳이라서 마치 벽에 박힌 것 같았다.
두 번째 화살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끄으으으?!"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쉬이이이이익!
쉬이이익!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왔다.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중 하나가 심장을 스쳤다.
"끄아아아아아아!"
억누르던 퀸의 독기가 터지면서 불길의 뜨거움이 지글지글 그의 살을 태웠다.
퍼억! 퍼억! 퍽퍽!
그런데도 이 빌어먹을 화살은 끝도 없이 날아왔다. 팔도, 다리도, 상체도, 얼굴에도 화살이 박혔다.
이제 그의 몸은 활활 불타올랐다.
"끄으으으으…."
채집당한 곤충처럼 바닥에 박힌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와아…. 아직도 살아 있네? 끔찍하다!"
여자 목소리에 백작이 살짝 반응했다.
피가 마시고 싶다.
저 젊은 피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남자 목소리도 났다.
그 순간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퍼억.
뼈가 부서졌다.
어깨를 박살 낸 화살은 땅에 콱 박혔다. 대단한 힘이다.
"역시 이쪽이 아니면 안 되나 본데요?"
화살촉이 심장을 겨눈다. 본능적으로 백작의 몸이 꿈틀거렸다.
"으으으…. 너, 너는? 누구냐?"
이미 입술도 다 불타 숯덩이가 되었지만, 그는 궁금했다. 이들은 누구지? 경찰도 아니고, '저쪽' 냄새도 안 난다.
"나?"
남자애가 활을 겨누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에게 활을 겨누는 걸 거리낌 없이 하는 게 참으로 기이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가?
"희생의 원숭이 사냥꾼."
"…뭐라고?"
"그만 가라, 백작."
"…!"
'백작'이라는 단어에 눈을 크게 뜨던 그의 심장에 화살이 박혀 들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숯덩이처럼 되었어도 버티던 그의 육체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으…. 타는 냄새 지독하네."
여자애가 손가락으로 코를 잡으며 말했다.
"근데 그 원숭이 사냥꾼은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불타는 백작에게 재료 수집망이 펼쳐졌다. 타다 만 옷가지 조각만 남고 백작의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요. 너무 멀리 왔어요."
"응!"
"그런데 민준아."
"네."
"이 백작이란 사람, 누구한테 당한 걸까? 정상이 아니라며."
"모르겠어요. 잘된 일이긴 한데, 백작보다 훨씬 강한 뭔가가 있었나 봐요."
두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자 백작이 있던 자리엔 시커먼 그을음만 을씨년스럽게 남았다.
.
.
.
재능마켓에 하루 두 번 들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우린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 2시가 넘었다.
"…아들 왔니?"
"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깜짝 잠들었어!"
"으이구. 뭘 그렇게까지 해."
"다음 주가 중간고사라서."
"알았어. 어서 더 자."
방에 들어와서 누웠다.
'긴 하루였어.'
인어 때문에 신안 섬에 갔다가 백작을 따라 화성까지 다녀왔다.
그래도 미션을 끝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지렁이와 병아리를 봤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지렁이와 퍼덕거리면서 쫓아가는 병아리. 그 지렁이 얼굴이 불쑥 백작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잠에서 깼다.
【재능마켓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오전 6시.
어김없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학교 끝나고 도화지를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기에 일단 좀 더 이불 속에 있었다. 참 오랜만에 늦장을 부리다가 일어나서 씻었다.
'국궁 쏴 본 게 많은 도움이 됐어.'
이를 닦으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백작을 발견하곤 꽤 멀리서 활을 쐈다. 가까이 접근하면 그가 눈치챌 수 있었기에 매우 조심해서 지켜봤다. 첫 발이 명중했을 때는 빠르게 거릴 좁히면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쐈다.
백작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어디서 그렇게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좋은 일이었다. 역시 백작을 따라가야 한다는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포인트도 많이 얻었고, 레벨도 크게 올랐다. 진정한 보상은 이따 재능마켓에 가서 확인해야겠지만, 미션에 막혀 있던 중급 필라테스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
"…우욱."
헛구역질을 했다. 칫솔이 안엔 깊숙한 곳을 건드려서가 아니다. 필라테스 생각에 갑자기 속에서 뭔가 올라온 거다.
"후우…."
일반 필라테스와 중급은 완전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어쩌랴. 그만큼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데.
지이이잉.
톡이 왔다.
『일어났어?』
도화지였다.
『뉴스 봐! 난리 났어!』
나는 인터넷을 켰다. 꼭 TV를 보지 않아도 어디서든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사는 '선부용역'에 관한 것들이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경찰도 죽었네….'
사망자만 25명이고, 중상자도 있어서 더 늘어날 것 같다고 한다.
나는 몇 장의 사진을 보다가 그 선부용역 건물이 내가 갔던 그곳이란 걸 알았다.
'백작이 여기 사람이었구나.'
전에 내가 만난 뱀파이어는 이 선부용역의 직원이었던가?
눈으로 빠르게 기사를 읽어갔다.
'경찰은 이번 사건으로 대한민국에서 조폭의 잔인한 악행을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을 선포하고 조폭과의 전쟁에 돌입한다고 밝혔으며 광역 수사대가 전국의 조직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양치를 마치고 나와 교복을 입었다.
'조폭이라….'
서큐버스는 예쁜 아가씨로 위장해서 남자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살고 있었고, 뱀파이어는 조폭으로 가장해서 사람들의 피를 빨고 살아왔을 것이다.
"벌써 나가니?"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벌써라니! 늦었어! 다녀오겠습니다!"
"차 조심하고!"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 얼굴을 보니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리 어머니 같은 선량한 사람이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심장을 찌르기 전까진 불에 타도 죽지 않는 괴물을 봤다.
'절대로!'
어제의 일을 뒤로하고,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평범하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그런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한 사람과 공유하고 있었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일찍 왔네?"
도화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