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민준아!"
도화지가 먼저 와 있었다.
이것도 기분이 참 이상하긴 하다. 언제나 혼자 여기서 버텨 냈었는데,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다니…. 뭔가 위안도 되고 그런다.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미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거부할 수 있지만 특별한 보상이 출현할 확률이 높습니다.】
【확정 보상: 20,000p.】
'이만 포인트라. 꽤 센데?'
도화지도 들었는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 스타킹 사야지!"
"…."
벌써 이만 포인트 받은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만큼 어렵다는 거잖아.
나는 미션을 기다렸다. 도화지가 사려고 하는 스타킹이 뭔지 궁금했지만, 미션이 먼저다.
【이벤트 미션: 악마의 노래를 멈춰라.】
악마의 노래?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벤트 미션에 앞서 뭘 해야 하는진 안다.
"누나, 할머니께 전화부터 드리세요. 우리, 아주 멀리 다녀올지도 몰라요."
"얼마나 먼데?"
"몰라요. 암튼 빨리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괜찮아. 지금 전화하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야."
나는 짐을 쌌다. 전투와 환경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점차 익숙해져 간다.
"꼭 같이 안 가도 돼요."
"아니야. 나도 갈래. 할머니 약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제까지 너한테 도움만 받기도 싫고."
옳은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미션을 하지 않고 피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백작 같은 괴물이 녹아 있다. 그것들과 싸우려면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래."
우리는 2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새로운 풍경에 진입했을 때, 나는 핸드폰부터 꺼냈다.
'터져.'
위치 정보를 새로고침 했다.
『전라남도 신안군.』
'신안?'
이때, 도화지가 소리쳤다.
"와아! 바다다!"
그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다에 뜬 섬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보이는 섬이 많았다.
"누나, 시간 없어요. 냄새 맡아 봐요."
"우움…. 잠깐만."
해가 지면 곤란할 것 같다. 스윽 둘러보니 우리가 있는 섬엔 집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배도 없다.
'만약 이 섬에 균열이 없으면?'
저쪽 멀찌감치 있는 섬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건데,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인터넷을 열었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유인도 111개, 무인도 719개…?
신안에 섬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래도 핸드폰이 돼. 여차하면 경찰을 부르자.'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도화지가 얼굴을 흔들었다.
"모르겠어. 비릿한 게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네. 근데 여기 진짜 좋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풍경은 참 좋긴 하다.
생각해 보니 바다에 와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걸 그냥 감상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우와! 저기 봐!"
촐싹대며 내 등짝을 내리치는 도화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발, 집중 좀 해 주라.
.
.
.
"으, 으으으…. 제발…. 나는 진짜 모르는 일이었어…."
오 형사가 넘어져 있었다.
그는 공포에 휩싸여 엉덩이를 뒤로 뺐는데, 영배에게 돈을 받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가 애원해도 백작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리곤 오 형사의 머릴 밟은 다리에 힘을 줬다.
콰직!
오 형사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다.
"치워."
"네! 대표님!"
백작은 직원들을 보면서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버러지들.'
영배였다면 이 피를 보면서 같이 흥분하고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누구 하나 겁먹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저… 대표님."
"말해."
그나마 쓸 만한 김 실장이 다가왔다.
"저희가 뒤처리는 확실히 하겠지만…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형사를 죽였다. 전국구 조폭들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관련된 놈들은 다 죽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군침을 삼켰다.
대표님이 이렇게 직접 나서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진 영배가 모든 일을 다 전담해 왔었다. 그것만으로도 강서 최대 조직이 되었는데 대표님에 비하면 영배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오늘 깨달았다.
'…그릇이 다르시다.'
남미 쪽에 가면 경찰을 넘어 군대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카르텔이 있다고 한다. 대표님은 어쩌면 그 정도로 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방금 한 사람이 밟혀 죽었다. 이게 가능한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사람 두개골이 얼마나 단단한데 저렇게 부서지냐는 말이다.
오 형사의 시체를 수습하는데, 밖에서 직원이 뛰어 들어왔다.
"실장님!"
"대표님 계신 자리다. 그냥 말해."
"알겠습니다!"
직원은 감히 대표와 눈도 못 마주치고 가져온 정보를 토해 냈다.
"광수대 놈들이 관련된 것 같습니다! 다른 조직들은 절대 아닙니다!"
"광수대?"
대표의 말에 김 실장이 설명했다.
"광역 수사대가 움직인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니라 다른 놈들을 감시한다고 했었는데…."
선부용역은 지금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 흐르는 정보는 다 손에 쥘 정도의 거금이었다.
"태창 바이오일 겁니다."
"맞습니다! 거깁니다!."
"태창?"
"네, 대표님."
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영배가 죽은 뒤로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 오직 분노! 지금까지 이성으로 간신히 억누르던 본성이 깨어났다.
"준비해. 태창 놈들을 친다."
"대, 대표님? 거긴, 기업입니다."
"그래서?"
"아, 아닙니다. 야! 다들 준비해!"
"전부 다 죽일 거다. 태창이든 광수대든 뭐든… 하나도 남김없이…."
영배는 약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영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야수였고, 인간들은 그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돈? 필요하면 빼앗으면 그만이다. 권력? 그걸 가진 놈을 발아래 두면 그뿐이었다.
돌아서서 이를 가는 그의 뒤에서 김 실장은 생각했다.
'막을 수 없어.'
영배가 없는 이상 대표를 제어할 이는 없을 거라고.
김 실장은 뒤를 돌아 외쳤다.
"빨리 준비해! 빨리! 아래 애들한테도 다 알리고!"
다른 조직 영업장을 쳐들어가는 거야 익숙해도 기업을 치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도 막막하지만, 대표님 명령이니 일단 태창으로 가야 할 것이다. 지시를 내린 그 역시 막 돌아서 나가려 할 때였다.
'뭐지?'
문득, 창가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가 창으로 걸어갔다.
작은 그림자가 창 뒤에 있었다. 새라고 하기엔 너무 컸고, 고양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가 창으로 가서 잠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챙!
유리창이 뚫렸다. 그리곤 하얗고 작은 손이 불쑥 안으로 들어오더니 김 실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쿨럭!"
비명도 못 질러 보고 피를 토해 내며 그가 쓰러질 때 창문이 와장창 터져나갔다.
"…누구냐!"
"허억?"
"기습이다!"
직원들이 외칠 때, 백작은 창가를 바라보며 가늘게 떨었다.
사뿐.
창틀을 넓고 안으로 뛰어내린 소녀가 백작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너였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은 햇빛도 못 보고 공부만 한 부잣집 딸 같았다.
하지만 백작은 깨달았다.
"으음…."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이 미×년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실장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여!
근처에 있던 다섯 명이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백작은 보았다.
소녀의 작은 손에 잡힌 한 녀석의 얼굴이 와그작! 부서지고 다른 녀석의 배가 뜯겨 장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소녀의 움직임은 폭력 그 자체였다. 잡고 뜯고 짓밟는다. 그러면서도 표정엔 변화조차 없었다.
-으, 으아아아아악!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소녀의 얼굴은 곧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녀는 아까부터 오직 백작만 보고 있었다. 다섯 명이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허억…. 저, 저건 뭐야?"
우르르 들어온 직원들의 손엔 연장이 들려 있었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에 선뜻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우락부락한 놈도 아니고 키 작은 소녀가 피 칠갑을 하고 있으니 위화감이 드는 거다.
"너는 피의 아이구나. 그렇지?"
소녀의 말에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던 분노마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러면서 이성이 다시 머릴 들었다.
'온 지 얼마 안 된 건가?'
그렇다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죽여!"
백작이 소리쳤다.
-우와아아아아!
-죽여라!
백작은 직원들이 소녀에게 달려드는 걸 보며 문으로 뛰었다.
"도망치는 거야?"
소녀가 쿡쿡 웃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날붙이를 보면서도 소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도로 나온 백작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면서 외쳤다.
"습격이다! 다들 나와!"
건물 전체에 있는 조직원만 150명이 넘었다.
-비상이다!
-적이다!
-연장 들어!
백작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모든 조직원들이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그런 그의 관자놀이에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어째서 하필 여기에…."
백작은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뛰었다. 이제까진 그의 세상이었다. 어떤 인간도 그에 비하면 나약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괴물은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망쳐야 해.'
바다 건너 미국이라도, 아니, 저 북극에라도 가서 처박혀야 한다.
'그분께서 오시기 전엔 저걸 막을 수 없어!'
저쪽 세상엔 모든 생물들의 정점에 선 존재가 몇 있었다. 백작의 지위에 오른 그라서 알 수 있다. 피를 계승한 위대한 일족이자 뛰어난 지능을 지닌 그이기에 접할 수 있는 정보였다.
와장창!
밖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막 1층으로 나가려던 백작의 발길이 뚝 멈췄다.
"…."
"어딜 가려고? 내가 물었잖니."
-꺄아아아악! 사람이 떨어졌어!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소녀는 상관없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하다. 그녀의 힘이라면 인간들 따위는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아직 온전한 힘을 되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여길 벗어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흐으으…."
백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퀸을… 뵙습니다."
"이제 말이 통하네?"
소녀가 백작 앞에까지 다가왔다. 그리곤 백작의 정수리에 속삭였다.
"그도 왔니?"
"아직입니다."
"흐응, 그거 아쉽네."
소녀의 입가에 침이 흥건하게 고였다. 이대로 백작의 머리통을 깨물어 버릴 수도 있었다.
백작도 그걸 알고 있었다.
'싸워 볼까?'
생각이 들자마자 사라진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어찌 이기나. 이빨과 발톱이 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나?
"여긴 참 좋은 세상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이 좋은 곳에 주인이 둘일 순 없는 거잖니?"
"…네. 원하신다면 멀리 떠나서 절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소녀가 풋! 웃었다.
"내가 한국이라고 했어?"
이 세상이라고 했다. 그건 곧 국경이고 뭐고 이 땅의 주인이 될 거란 뜻이었다.
소녀의 손이 백작의 턱을 잡았다. 얼굴이 들린 백작의 눈이 소녀를 응시했다.
"너는 피의 아이야."
"그렇습니다."
"너희는 절대 일족을 배신하지 않아."
"…네."
"내 밑에서 일해 보라고 해도 거절할 거지?"
"그건 피의 맹약이…."
"알아, 답답한 것아. 그래서 나는 너희가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