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오 형사는 스윽 주변을 주시하며 말했다.
"제 인맥을 총동원해서 몇 가지 정보는 캐냈습니다. 요즘 서초서 강력반이 '19번 방 사건'에 목을 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건이 뭔데요?"
"강남 고급 술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입니다. 범인은 아직 찾지 못했고요."
오 형사가 파일을 내밀자 봉투에서 사진을 꺼낸 영배가 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 건…?'
오 형사가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뇨. 모르는 여잡니다."
모른다. 하지만 시체를 보자마자 알았다. 저건 여기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 사건에 연루된 실종자도 많고 해서 강력반이 프로파일러까지 붙어서 캐고 다닌답니다. 신종 마약에 의한 게 아닌가 얘기가 돌고 있고요."
프로파일러라면 그 여자인가? 생각한 영배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것을 꺼냈다.
돈이었다.
"늘 고맙습니다, 형사님."
"하하! 내가 더 고맙죠."
"먼저 가세요. 저는 담배 하나 태우고 가겠습니다."
"그러시죠. 그편이 더 좋겠습니다."
오 형사가 차에 타고 곧장 떠나자 영배는 전화부터 걸었다.
"대표님, 영뱁니다."
-어때?
"막 확인했습니다. 서초서 강력반이 살인 사건을 파고 있는데, 그 사건 피해자가 아무래도 우리 쪽 사람인 것 같습니다."
조직 얘기가 아니다.
-저들은 우리를 모를 텐데, 어떻게 찾아온 거지?
"우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릴 알고 쫓아왔다면 질문이 달랐으리라.
"들어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인다.
"후우."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참 좋은 곳이야.'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성급하게 거머쥘 순 없었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힘보다는 권력과 돈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가져야지.'
대표님께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위치가 되면 그때부터 피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여자들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고 아래로 흐르는 피를 마음껏 탐할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오랜만에 한번 마시고 갈까?'
그의 눈이 저쪽 아래의 골목을 향했다. 요즘 피를 못 마셔서 갈증이 심하다. 그가 힘을 쓸 수 있는 원천도 피에서 나오는 만큼 주기적으로 조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가짜 헌혈 차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직접 부드러운 살결에 코를 파묻고 이빨을 박아 넣는 것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
시간이 늦어 거리는 한산했다.
이 근처엔 골목이 많아서 그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좋았다. 그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막 택시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걷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맹수가 먹이를 포착했을 때의 눈빛을 번뜩인 그가 씨익 미소 지을 때였다.
쉬이이익.
"…!?"
저쪽 세계였다면 반응이 빨랐을 것이다. 피를 마음껏 취한 상태였다면 닿기도 전에 기척을 읽었을 것이다.
퍼억-!
하지만 그도 이 세계에 익숙해졌다. 날카롭던 감각은 무뎌졌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저격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크윽…."
명치를 관통한 화살은 그의 몸을 이끌고 벽에 박혔다. 두 손으로 화살을 움켜쥐었는데, 또 한 발이 날아왔다.
퍽!
이번에는 목이 뚫렸다.
과곽! 벽에 박혀 들어간 화살의 힘은 엄청났다.
"어떻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을 봤다.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죽지 않는구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배는 다가온 사람을 봤다.
"…너, 너는 뭐지?"
영배가 물었지만, 대답 대신 활이 보였고 또 한 발의 화살이 그의 심장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아, 안 돼애애!"
손을 뻗었지만 화살은 손바닥을 뚫고 심장을 꿰뚫었다.
"커허어억…."
그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소실되었다.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져 가던 그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을 때, 새하얀 그물 같은 것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리곤 화악-! 그의 육체가 사라졌다
"후우…. 백작이 아니었나…."
영배가 입고 있던 신발과 옷가지가 바닥에 남은 걸 보며 민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뱀파이어를 사냥했습니다.】
【5,300p를 획득했습니다.】
【재료 수집망에 '뱀파이어의 저주받은 피×10'이 수집되었습니다.】
재능마켓으로 곧장 왔다.
뱀파이어의 옷과 신발은 근처 의류 수거함에 버렸다.
'운이 좋았어.'
그가 백작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저격은 성공적이었다. 안경 너머로 본 그의 모습은 서큐버스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는데, 뾰족한 송곳니와 무서운 얼굴은 꿈에 나올까 두렵다.
'강한 괴물은 아니었던 거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민준아!"
도화지가 알바 끝나고 곧장 온 것이다.
"잡았다면서?"
"백작은 아니었어요."
"우와, 그래도 대단하다! 너!"
아무리 강한 사람도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것처럼 내가 숨어서 저격만 잘한다면 '인내' 스킬이 더해진 첫 타격으로 꽤 강한 상대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번엔 그 모든 조건이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나는 유리 벽으로 걸어갔다.
"새로 얻은 거로 드링크를 만들어 볼 거예요."
"응!"
도화지가 바짝 다가왔다. 할머니에게 도움 될 약이 나오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빈 병을 구매하셨습니다.】
그간 모아 둔 재료가 꽤 된다. 이제까지는 버섯만 섞어서 드링크를 만들었었지만, 이것저것 시도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마침 포인트도 생겼기에 2가지 재료를 섞을 수 있는 병을 샀고, 오늘 얻은 뱀파이어 피와 무얼 섞을지 생각해 봤다.
'어차피 다 해 봐야 돼.'
정보가 없으니, 무작정 만들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토룡 부산물.'
두 가지 재료를 빈 병에 넣고, 생수를 베이스로 부었다.
【드링크를 만들었습니다.】
【드링크가 숙성됩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됐니?"
"네, 이제 기다려야죠."
남은 포인트론 생수도 사서 채워 넣고 도화지에게도 이것저것 재능마켓 사용법에 대해 알려 주었다.
"누나 덕분이었어요. 누나가 아니었다면 그 뱀파이어는 절대 찾지 못했을 거예요."
수천만 인구가 사는 수도권에서 그 괴물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응! 더 열심히 할게! 그러면 이제 백작 잡으러 갈 거야?"
"아뇨.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준비를 더 해야 해요. 백작에 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설명을 이어 갔다.
"이번엔 잘 먹혀들어서 쉽게 잡았지만, 오늘 잡은 괴물도 5,300포인트나 되는 강적이었어요. 백작은 이보다 훨씬 강할 테니까 조심해야 해요."
"그렇구나…. 근데, 뱀파이어라니…. 진짜 무섭다. 밤만 되면 사람들 목 물고 그랬다는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아요. 게다가 목이 뚫려도 죽지 않았어요. 심장이 약점이었던 것 같은데, 백작은 어떤 방어 수단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까 저도 훈련을 더 해야겠어요."
"훈련? 무슨 훈련?"
"갈 곳이 있어요."
저격에 대한 효용성을 발견한 이상 더 미룰 수가 없었다.
.
.
.
지난밤,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지만, 특정 직업군들은 한숨도 못 잤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팀장도 경찰서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팀 전체가 발이 묶였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팀장의 말에 강나은 경위가 머리를 흔들었다.
"인질로 잡혔을까요?"
어젯밤, 선부용역 행동 대장이 실종됐다. 선부용역 전 조직원들이 서울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으니 경찰에 소식이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고, 단순히 조직 간의 알력 다툼으로 보기엔 사안이 너무도 컸다.
"어쨌든 우리도 개별 행동은 하지 말자고."
팀장이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불과 어제 그들을 찾아갔었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팀장님!"
누군가 외쳤다.
"의류 수거함에서 영배의 옷과 신발, 핸드폰을 찾았답니다!"
"어디야?"
"백화점 근처입니다!"
마지막 통화 기록이 있던 곳 근처다.
"팀장님…."
강나은 경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지품은 그렇다 쳐도 옷까지 벗겨서 버렸다는 건…."
"살려 둘 생각이 없다는 거겠죠."
이미 영배가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필 이럴 때…."
조폭들이 서로 싸우는 거야 흔하디흔한 일이었지만 영배는 19번 방 사건과 닿아 있는 사람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어 버린다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 거다.
"우리를 의심하진 않겠죠?"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우리가 영배를 만난 후에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어쩌면 내부에서 꼬리 자르기를 했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
일리 있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강나은이 문득 뒤쪽으로 고갤 돌렸을 때,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섬뜩!
강나은은 소름이 끼쳤다.
"누구세요?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요."
"팀장님 뵈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주더군요."
사내의 시선을 받은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선부용역 대표입니다."
"…!"
"…?"
모두가 놀라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대표?'
강나은은 순간 그를 보며 표정이나 말투, 행동을 파악하려고 했다. 사람인 이상 조금씩 다른 습관이나 살아온 인생에서 나오는 특유의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어제 회사로 찾아와서 저희 직원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일단 저쪽으로 가시죠."
조폭 두목이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오다니. 팀장도 황당했지만, 이것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내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분위기가 남달랐다. 고상하다고 해야 하나? 조폭보다는 재벌의 아우라가 났다.
"저희도 새벽에 소식 들었습니다. 곤란하지 않으시면 상황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상황 말씀이십니까?"
"평소에 척을 진 조직이라든지 먼저 움직일 만한 상대라든지, 있지 않잖습니까."
"없습니다. 어제 역시 아무 일도 없었고요."
사내가 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 속을 읽기라도 하듯 바라보는 눈동자는 경험 많은 팀장조차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모르긴 여기도 마찬가지군요. 실례했습니다."
돌연 사내가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볼일 끝났습니다."
사내의 분노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이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등에서 철철 흘러넘쳤다.
사내가 나가자 강나은이 팀장의 뒤에 서며 물었다.
"그냥 이렇게 보내요?"
"잡아 둘 명분도 없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저 남자, 보통이 아니에요."
"어떤 부분에서요?"
"감정이 전혀 읽히지 않았어요. 이런 경우는 두 부류예요. 사이코패스든지."
강나은이 침을 꿀꺽 삼켰다가 말을 이었다.
"그만큼 경험이 많든지. 사람이 코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이요."
여기가 어딘가? 강력반이다. 그간 수많은 범죄자를 봐 왔지만, 저런 분위기의 사람은 처음이었다.
"둘 다 좋은 건 아니군요."
팀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저자가 직접 보고 갔으니까 우릴 의심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퇴근들 합시다."
강서 최대 조직 보스가 나섰으니, 범인은 알아서 찾아내지 않을까?
-팀장님!
그러나 그의 퇴근은 더 늦어질 것 같았다.
-범행 장소를 찾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