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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89화 (89/277)

#089화

"그래서 그 일이 어쨌다는 겁니까."

맨손으로 유리잔을 깨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악력도 상당해야 하지만 손이 찢어져도 상관없다는 담력도 있어야 했다.

"…."

강나은이 질린 눈으로 영배를 보자, 팀장이 크흠! 헛기침하면서 휴지를 내밀었다.

"흥분하지 마시고, 피부터 닦으시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영배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그대로 쥐어 버렸다.

주먹을 쥔 그의 손에서 똑, 똑 피가 흘러내렸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영배가 말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죗값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근데 되지도 않은 거로 사람 못살게 굴면 저도 가만있진 않을 겁니다."

쯔즈즉!

영배의 손안에서 유리들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지금쯤 그의 손바닥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형사님들, 얼굴 똑똑히 기억해 뒀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바빠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배는 일어나서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대표 이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상처가 났던 그의 손바닥은 이미 말끔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창가에 선 대표가 영배의 말에 중얼거렸다.

"경찰이라…."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엔 팀장과 강나은이 서 있었다.

"제가 일전에 한강 사건들 자료 받을 때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잘못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도 잘해 보려고 한 일이겠지.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이곳에 대해 더 배워야 할 게 많아. 4년 만에 완벽할 순 없는 거다, 영배야. 이런 일을 겪으면서 경험을 쌓아 가는 거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영배가 머릴 깊이 숙이자 대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말했다.

"경찰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다. 그걸 알아내야 한다, 영배야."

"여차하면 처리하겠습니다."

"지금은 시끄럽게 해서 주목받을 필요는 없어. 우리 힘은 온전치 못하다. 인간들은 나약하지만 그들의 시스템과 무기들은 우릴 죽일 수도 있어. 돈을 써라, 영배야. 인간들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간 우리 돈을 받은 사람들을 이용해. 더 많은 돈을 써도 된다. 우린 돈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

"네, 대표님!"

"네가 나서지 말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라.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

영배가 감격한 듯 대표를 바라보았다.

"백작님… 죽어서도 충성할 것입니다."

"네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저들의 목적이 뭔지 알아내라."

영배의 눈동자에 팀장과 강나은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

.

.

"헤에. 이게 그 균열이라는 거구나. 여기서 하층민들이 넘어오는 거야?"

"아마도요."

나는 균열을 지워 버렸다.

【균열 위치가 기억되었습니다. 이제 언제든 해당 위치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어때요? 뭔가 다른 점 있어요?"

내 말에 도화지가 우움, 입술을 모았다가 말했다.

"4개의 냄새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 달콤한 거 하나랑 나머지 세 개."

내가 사냥한 건 괴물 3종 세트였다. 그렇다는 건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인가?

'그게 백작인가?'

킁킁대던 도화지가 동쪽을 봤다.

"달콤한 건 저쪽으로 이어지고 있어. 근데 멀어."

그리곤 서쪽으로 돌아섰다.

"더 가까운 건 이쪽."

"그래요?"

"응,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걸? 여기 와 보니까 냄새가 끈처럼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오래된 것도 느껴지고, 바람에 없어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 거미줄처럼 너울거리면서 남아 있달까? 약해지고 얇아져도 끊어져 없어진 건 아닌 것처럼."

"다른 냄새도 많이 나요?"

"여기 있던 거 4개 말고도 사방에서 풍겨 와. 적어도 10개는 될 거야."

균열 하나에서 구울 13마리가 나왔던 걸 떠올려 보면 10이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 하나하나가 백작처럼 강력하다면 문제가 되는 거다. 개구리 따위였다면 레어 등급을 받았을 리 없다.

"좋아요. 가까운 것부터 가요."

"응!"

길로 나오면서 도화지가 말했다.

"근데, 나 이따 알바 가야 해."

"알았어요. 오늘은 정찰만 해요. 방금처럼 균열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균열은 없애야 한다. 놔두면 계속 하층에서 괴물이 기어 올라올 수도 있었다.

'놈들에게 여긴 천국일 거야.'

내가 하층에서 만난 모든 생물은 크고 강력했다. 그놈들이 이쪽으로 건너오면 그 존재만으로도 포식자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를 쓰고 넘어오려고 하는 거겠지.'

거대 원숭이가 서울 시내 빌딩들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떠올라 버렸다. 그 옆에서 더 큰 병아리가 좋다고 퍼덕거리면 재앙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내가 막아야 돼.'

요즘 장사가 잘돼서 살맛 난다며 웃던 어머니 얼굴이 선했다. 선한 이들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 모두의 안전까지 위협받아선 안 된다.

우린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했다.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여긴 우리 집 쪽인데….'

도화지는 목동을 지나쳐서 강서구 쪽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화곡동에 들어서자 그녀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괜찮아요?"

"피 냄새… 너무 강해…. 토할 것 같아."

"잠깐 쉴게요."

오토바이에서 내려 버스정류장 의자에 그녀를 앉혔다.

"…이 일대가 그 냄새로 꽉 차서 다른 냄새를 맡을 수조차 없어. 어지러워."

"숨 크게 들이마셔 보세요."

"무서워, 민준아. 나, 진짜 무서워…."

된장찌개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새를 따라 고갤 돌리는 게 아니었다. 그 냄새가 흘렀던 모든 곳에 지문처럼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겹겹이 쌓인 또렷함이 도화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내 어깨에 기댄 도화지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이런!'

나는 그녀를 안고 서둘러 오토바이를 탔다. 그리곤 한강으로 빠르게 갔다. 지하철로 내려갔다. 여기라면 냄새가 많이 들어오지 못할 거라 여겼다.

"누나!"

"…으응."

"정신이 들어요?"

"아, 응…. 좀 괜찮아졌어. 그런 냄새는 처음이라서 당황했나 봐."

온통 버섯 천지인 곳에서도 잘 지내던 도화지였다. 그런데 피 냄새 하나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대체 어떤 놈이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다시 가 보자, 민준아."

"정말 괜찮겠어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도화지가 결연한 눈으로 일어섰다.

"고작 냄새만으로 이런다면 나는 앞으로 놈들과 싸울 수조차 없어. 그러면 우리 할머니는 어떡해."

"싸우는 건 내가 해요.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누나는 조금만 견뎌 주세요."

"그래… 고마워."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걷기로 했다.

도화지는 힘들어하긴 했어도 아까 보단 상태가 괜찮았다. 거리엔 수많은 차들이 지나다녔고 인도엔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평범한 일상에서 냄새를 따라 걷고 있다는 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때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좋아요, 오늘은 정찰만 하는 거예요."

"응."

이미 서큐버스를 미행해 본 적이 있는 나였기에 놈만 발견하면 그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행동할 수 있었다.

"저기서 길 건너자."

"네."

한참을 걸었을 때 도화지가 말했다.

"이 근처야. 주변이 온통 진한 냄새라서 구별할 수 없어."

나는 주변 건물을 눈에 익힌 뒤 도화지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이제 돌아가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잠깐만 앉자. 토할 것 같아."

벤치에 앉아서 도화지가 진정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였다.

"팀장님,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되지 않나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잖아요."

그들은 뒤쪽 건물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미끼를 던져 뒀으니까 이제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다리면 됩니다."

"미끼요?"

아, 저 남자? 어디서 봤는데?

"아까 한강이란 단어에 반응하는 거 경위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랬어요!"

"저들이라면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반드시 움직일 겁니다."

"역시 노련하세요."

"프로파일러 관점에서 보셨으니까 어땠습니까? 그 남자."

"모르겠어요. 저런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손이 아팠을 텐데도 고통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 같았거든요.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그조차 어색했고요."

"우선 서로 돌아가서 마저 정리합시다."

두 사람이 저쪽으로 걸어가자 나는 도화지에게 말했다.

"누나, 누나 먼저 가세요. 택시 잡아 줄게요."

"너는?"

"할 일이 있어요."

생각났다. 저 남자, 재능마켓 빌딩에 왔던 그 경찰이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그를 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조심해, 민준아."

"전화할게요."

"응."

도화지가 떠나자 나는 홀로 벤치에 앉아 안경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을 봤다.

'서큐버스와 연관이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선 경찰이 여기까지 온 게 설명이 안 된다.

'그 서큐버스만큼의 힘을 가졌다면 내가 불리할 수도 있어.'

물론 그때보다 나도 많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날 경험한 서큐버스의 완력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응, 아들.

"엄마, 알바하기로 하셨던 분 왔어?"

-어, 와서 일하고 있어.

"알겠어. 난 중간고사 얼마 안 남아서 인성이랑 독서실에 있다가 갈게. 늦을 거야."

-인성이란 아이랑 친한가 보네. 다음에 한번 델고 와! 밥 먹어!

아, 저번에도 얠 팔았구나.

"응, 엄마도 무리하지 말구!"

-그래, 아들도 고생해!

나는 자릴 옮겼다.

마침 저 앞에 커피숍이 보여서 그리 들어간 뒤 창가에 앉아 책을 폈다. 이러고 있으면 누가 봐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은 이 순간에도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거냐….'

그 서큐버스도 감쪽같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발견해서 기습해야 돼.'

만약 그 서큐버스가 함정을 파 놓고 나를 기다렸다면 당하는 쪽은 내가 되었을 것이다.

.

.

.

밤 10시 5분.

영배는 건물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경찰이 기다리고 있진 않은지 살펴보는 거다.

그가 도로로 나와서 택시를 탔다.

"청량리 백화점으로 갑시다."

차를 탈 수도 있었지만, 낮에 경찰이 다녀간 뒤론 왠지 찝찝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그가 스윽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쇼핑은 끝났지만, 영화관은 운영 중이었다. 극장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타고 7층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극장이 아니었다. 다시 스윽 주변을 보다가 야외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라이트를 깜빡거렸다.

영배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오랜만입니다."

"붙는 사람은 없었죠?"

차에서 내린 사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보았지만, 수상한 차나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 형사님, 뭣 좀 알아내셨습니까?"

조직 행동 대장과 경찰의 은밀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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