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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84화 (84/277)

#084화

한참이 지났지만, 땅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 없는데?"

"일단은 제가 먼저 내려갈게요. 신호하면 범이랑 나중에 오세요."

"조심해!"

키가 높은 버섯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착지했다. 푹신한 바닥엔 죽은 버섯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수호자의 코트가 낙상 대미지를 줄였습니다.】

나는 활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아래로 내려오니까 확실히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수많은 버섯들이 햇빛을 완전히 가린 거다.

'피할 곳이 많진 않아.'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변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한데 꽤 어둡다. 습하고 어두운 대지였다. 필드 경험이 많은 나니까 이렇게 다닐 수 있는 거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버섯 그림자들만 봐도 공포에 질식했을지도 몰랐다. 그건 도화지도 마찬가지였다.

"히익!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아!"

그거, 네 그림자야….

"허업! 저기도 뭐가 움직였어!"

그건 범이 거고….

위에서 하도 떠들어 대니 뭔가 있었다면 진즉 튀어나왔을 거란 생각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내려오세요. 한참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버섯에서 버섯으로 움직이는 것보단 바닥에서 한 방향으로 직진하는 게 훨씬 빠를 터였다.

'해가 지기까지 여섯 시간 정도 남았던가?'

대략 지난 며칠을 가늠하면서 도화지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범이의 몸을 붙들고 그녀가 내려오자 나는 가볍게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나 무겁지?"

"알면 빨리 내려오세요."

힘+3이나 붙은 내 힘으로 무거울 리 없었지만, 도화지한테는 괜히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 진짜 미움받고 싶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잘 들으세요. 이제 우린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이동할 거예요. 하지만 제 경험상 갑자기 뭐라도 튀어나와 습격하면 취약할 수 있으니까 걷되, 빠른 걸음으로 갈 거예요. 제 뒤에 바짝 붙어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됩니다. 힘들면 미리 말해야 하고요."

"힘들다고 하면 업어 줄 거야?"

"아뇨. 새로운 냄새가 나는 것 같으면 바로 알려 주시고요."

"피…. 이렇게 삭막한 애였다니. 농담은 좀 받아 주고 그래라. 너 그러다가 진짜 혼자 산다?"

40년 살아 봐서 그런가, 별로 협박 같지도 않다.

"제가 만약 뭔가랑 싸운다고 해도 혼자 멀리 도망가면 안 돼요. 아시겠죠?"

내가 인상을 쓰자 도화지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그녀는 실감하지 못할 거다. 필드에서 나오는 괴물들은 우리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으려면 작은 방심도 큰 화를 부른다.

그렇게 전방과 함께 버섯 기둥 사이의 모든 곳을 주시하면서 나아가는데 메시지가 울렸다.

【드링크가 숙성되었습니다.】

'오? 드디어?'

【축하합니다! '힘 불끈 원기 회복 드링크'가 진화했습니다!】

【정력왕 드링크(레어)를 만들었습니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대단한 도전에 성공했습니다! 3,000p를 획득했습니다!】

'허…. 레어?'

【정력왕 드링크: 숙련된 드링크 제조사들이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드링크. 복용하면 24시간 동안 활력과 힘이 매우 상승한다.】

"대박…."

"응?"

"아, 아니에요."

괜히 알려 줬다간 또 질문 폭탄을 받을 것 같아서 기쁨을 속으로 꾹 참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력왕 드링크 제조법을 익혔습니다.】

한번 만들면 레시피가 생기는 구조였나?

'활력이란 건 스태미나 같은 걸까?'

이건 먹어 보기 전까진 모를 것 같았기에 드링크를 소중하게 가방 안쪽에 챙긴 뒤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자 얼마 후 또 다른 드링크가 완성됐다.

【맛 좋은 버섯 드링크를 만들었습니다.】

【맛 좋은 버섯 드링크: 어떤 음식에 첨가해도 홀딱 반할 맛! 조미료로 딱 좋아! 고기에 뿌려도 딱 좋아!】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레어란 게 계속 뜨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드링크들도 신기한 작용을 하는 것들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는 드링크들이 숙성되는 걸 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중간중간 배가 고프면 버섯을 따 먹으면 되니 식량 걱정은 없었고, 목이 마르면 생수를 조금씩 나눠 먹으면서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해가 졌다.

.

.

.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

사내들이 피곤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광역 수사대 특별 본부가 마련된 곳이었는데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

윤일권이 보드 판을 보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벌써 48시간째 잠을 자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은 탁할수록 예리하게 빛났다.

"도청은?"

그의 목소리에 누군가 바로 대답했다.

"해제됐습니다. 저쪽에서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붙은 걸 언제부터 안 거야?"

"어제인 것 같습니다. 감이 좋은 녀석들입니다."

"염병…. 일주일 공들인 걸 하루 만에 날려 버렸네."

보드 판에는 홍대 클럽 한 곳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젊은 애들이 자주 찾는 명소인데 안쪽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둔 걸 발각당했다.

"우리 애들 얼굴 봤겠지?"

"지금쯤 CCTV를 돌려 보고 있을 겁니다."

"뭐 하는 자식들이지?"

수상하니까 감시하고 있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응이 너무나 기민했다. 고작 클럽 하나 운영하는 운영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할까요?"

"다른 애들 투입해야지. 어려 보이는 애들로 빨리 골라 봐. 놈들이 잠수라도 타면 곤란하니까."

광수대는 지금 8곳의 의심 지역을 감시 중이었다. 홍대 클럽은 김유선이 3개월 전에 들렀던 곳이었다. 그녀가 술집 아가씨였다지만 품행을 보면 클럽은 그녀와 맞지 않았는데, 그것이 하나의 단서가 되어 이렇게 조사하는 중이었다.

"강력반은 뭐 하고 있어?"

"조폭 조지려는 것 같던데요?"

"조폭은 왜?"

"약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강나은 프로파일러가 머리를 쓰는 것 같은데요."

"쯧,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이 케이스는 못 풀 텐데."

윤일권은 일부러 강력반 팀장에게 정보를 흘렸다. 광수대에서 혼자 다 하기엔 일손이 부족해서 밑밥을 뿌린 거였다. 낚시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대장님."

"말해."

"이 사람들이 정말 '그곳'의 실험체입니까?"

"아직은 몰라. 알아서도 안 되고."

윤일권이 말을 아꼈다. 그가 보드 판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태창 바이오 주식회사의 본사 건물이었다.

그리고 저 건물은 지금 그들이 사무실로 쓰고 있는 오피스텔 맞은편에 있었다.

"제 직감입니다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뺑이 치고 있는 거잖냐."

태창 바이오는 불과 8년 만에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그들이 만든 신약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으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 이사가 언론을 꺼리고 외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국정 감사 전에 뭐라도 잡아야 돼. 안 그럼 우리 단체로 낙동강 오리알이다."

보드 판의 사진들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해 뒀다.

대한민국에서 괴이한 사건들과 시체가 발견된 것이 정확히 8년 전이다. 태창 바이오가 사업을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는데, 이게 과연 우연일까?

'심증은 널렸는데, 물증이 하나도 없어. 저놈들이 관련된 게 분명한데.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냐.'

이번 한강 개구리 사건도 놈들 짓이 분명했다. 아무리 환경 오염이 심하다고 해도 그런 크기의 개구리가 존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8년 전 그 시체.'

피부가 새까맣고 안구와 이빨, 손톱이 사람 같지 않은 그게 처음 발견된 것도 8년 전이다.

'김유선하고 똑같았지.'

바이러스든 세균이든 정확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윤일권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태창 바이오가 있다고 믿었다.

이때, 사무실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대장님!"

사내는 윤일권이 기다리고 있던 유능한 부하 직원이었다.

"어떻게 됐어?"

"땄습니다!"

"오! 그래? 빨리 틀어 봐!"

남자가 USB를 컴퓨터에 연결하며 급하게 말했다. 대원들의 귀가 모두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지난 두 달간 김유선의 조부모 집 인근 50km에 다녀간 외지인을 전부 대조해 봤습니다. 터미널부터 도로 CCTV와 택시 운행 기록까지 전부요."

흐릿한 화면 하나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이게 다야?"

"좀 멀긴 한데 이걸 보십시오. 이게 뭐로 보이십니까?"

"골프 가방인가?"

"아닙니다. 이건 양궁 같은 걸 보관할 수 있는 하드 케이스입니다."

"…양궁?"

윤일권의 눈이 커질 때 남자가 말했다.

"일본 오키나와 연쇄 살인 사건 때 야마구치 형사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피해자들이 다 화살에 맞아 죽은 것 같다고요."

광수대가 일본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 시체들이 김유선과 매우 흡사했다. 특히 오키나와는 한국과 무척이나 가깝다.

"이자가 히트 맨일 가능성이 큽니다."

화질이 너무 좋지 않아서 피해자의 나이나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다.

"키 180에서 185. 어깨너비로 봤을 때 몸이 상당히 좋습니다. 상당한 트레이닝을 받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건 양복인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평범하게 보이려고 무난한 것으로 입었겠죠. 그가 왜 김유선의 조부모 집 인근을 다녔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오키나와의 일과 무관하다고 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히트 맨이면 30대 초반으로 봐야 하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13명을 하룻밤에 죽일 정도의 강심장은 그리 많지 않다.

"해외에서 용병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국적이 아닐 수도 있고요."

"화살이라…."

확실히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은밀한 살상 무기로 최고일 수도 있다. 총기와 비슷한 파괴력을 내면서도 소음이 없다.

"전 대원에게 사진 전송하고 인상착의와 비슷한 사람의 최근 출국 기록이 있는지 찾아봐. 비행기든 배든 오키나와에서 온 기록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거니까!"

"네!"

윤일권의 눈이 사진을 응시했다.

'태창 바이오가 고용한 히트 맨인가.'

그러나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양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복이었다는 것을.

.

.

.

"아! 완전 헛다리 짚었네!"

도화지가 투덜댔다.

6시간을 내리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뿐인가? 세상이 점차 암흑으로 변해 가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

나도 그녀의 말에 반쯤 동의하곤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바람에 쓸려 버섯들이 떨어지는 거 외엔 살아서 움직이는 곤충조차 없었다.

'결국 다시 올라가야 하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갈림길에서 우린 고민한다. 쉽게 짜장이냐, 짬뽕이냐부터 어디에서 로또 복권을 살 건지에도 선택은 필요하다.

만약 선택을 잘못했다면?

'어쩔 수 없지.'

빨리 잊는 게 상책이었다.

"아침에 올라가요."

좀 고생하겠지만 범이라면 우릴 태우고도 버섯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으으. 다리 아포."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투덜거리며 버섯 기둥에 기대는 도화지를 보면서 나는 위를 보았다. 확실히 바닥보단 버섯 위가 잠을 자긴 좋았다.

"떡볶이 먹고 싶다."

나도 삼겹살에 소주가 땡긴다.

"순대도, 붕어빵도."

김치전에 막걸리도 심하게 마렵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주련?

"누나, 올라갈 거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려는 그때.

흠칫!

"…?"

뭔가가 뒤쪽에서 움직였다.

이건 바람에 버섯이 흔들리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사라라락.

무언가가 바닥을 쓸면서 지나는 인기척이 확실했다.

"누나!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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