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82화 (82/277)

#082화

벌컥, 공용 장롱을 열었다.

"와, 이게 뭐야?"

나를 따라온 도화지가 내 어깨너머로 물건들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거 혹시 내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추적자의 구두: 주력을 영구적으로 50% 상승시킨다. 매력+1.】

【추적자의 하의: 방어력+5, 매력+1.】

【추적자의 상의: 방어력+5, 매력+1.】

장롱 안엔 단정한 모양의 구두와 하얀색 셔츠, 짧은 치마가 있었다.

'무슨 방어력이….'

근데 매력은 왜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됐고, 어쨌든 시간이 없었다.

"누나, 화장실 가서 갈아입고 오세요. 시간 없어요."

"아, 알았어. 훔쳐보면 안 돼."

"누가 훔쳐본다고!"

버럭 소릴 지르자 도화지가 헤헤 웃으며 혀를 내밀곤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자각이 없는 것 같다.

나도 급히 내 개인 벽장을 열고 서둘러 전투 준비를 했다. 하층 필드로 가면 소환을 할 수 없기에 가방에 다 챙겨야 했다.

'두 사람이 먹을 정돈 없는데….'

가방 안 물건들을 체크하면서 한숨을 푹푹 쉴 때 도화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거… 조금 작은 것 같아…."

셔츠와 치마가 몸에 딱 달라붙었다. 꼭 회사원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신발은요? 발 안 아파요?"

"응! 이거 보기보다 엄청나게 편해! 어디 거지? 명품인가?"

명품이고 나발이고!

"누나 혹시 먹을 거 없어요?"

"배고파?"

"아니요! 가방에 뭐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

【필드 입장까지 4분 남았습니다.】

"교복도 위에 걸쳐요. 뭐라도 껴입을 수 있으면 다!"

"왜 그러는데?"

"가서 설명해 줄게요!"

"우리, 어디 가?"

우와, 돌겠다.

"범아!"

갸르르릉!

【필드 입장까지 2분 남았습니다.】

"작아져!"

규웃!

다가오던 범이가 작아져서 내 가방 속으로 쏘옥 들어오자 도화지가 꺄아! 자지러지며 따라왔다.

"진짜 커졌다 작아졌다 하네! 귀여웡! 나도 안아 볼래!"

무시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우와. 여긴 또 뭐야? 2층도 이렇게 넓어? 3층도 있네? 어떻게 이래? 여기 엄청 비싸겠다! 너 부자였어?"

【필드 입장까지 1분 남았습니다.】

나는 도화지의 손목을 잡고 푸르스름한 막을 지나쳤다.

【안전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파티 미션을 시작합니다.】

"어? 어어어어어억? 여긴 또 어디야?"

"후우…."

이제 들어왔으니까 급할 건 없었다. 차분하게 서서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이스캠프가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이곳 생태계를 가늠해 볼 수 있었기에 뭐든 놓쳐선 안 된다.

【파티 미션: 추적자의 후각을 발달시켜라.】

【추적자는 다양한 냄새로 적을 판별합니다.】

【100종의 냄새를 익혀 미션을 완수하세요.】

【확정 보상: 10,000p.】

【파티 미션에선 홀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미션 등급이 '레어' 따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도화지는 오늘 처음으로 여기에 들어왔어. 못 깰 미션을 주진 않았을 거야. 할 수 있어.'

늘 혼자 필드에 왔었는데 도화지가 함께라서 기분이 묘했다.

"…."

나는 낡은 상자로 걸어갔다.

"그건 또 뭐야?"

대답 대신 상자를 열었다.

"병이네요."

"에엥? 빈 병인데? 근데 이거 네가 줬던 그 꿀물 병이랑 비슷하게 생겼네?"

빈 병을 쓰레기처럼 보던 도화지완 달리 나는 그것들을 알뜰하게 챙겼다.

【드링크 제조용 병×5를 얻었습니다.】

이거 하나에 최소 1,000p짜리다.

'다른 거 없이 이것뿐인가?'

나는 상자에서 물러나 벽에 손을 대 봤다. 말캉하면서도 부드럽다. 이제까지 이런 베이스캠프는 본 적이 없었다.

'뭘로 만든 거지?'

모르겠다. 나가 봐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활을 들고 화살을 시위에 걸며 도화지에게 말했다.

"누나, 절대 제 뒤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잘못하다간 진짜 우리 죽어요."

"죽어? 왜?"

백번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겠다. 게다가 우린 오래 버틸 음식이 없었다.

범이가 가방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빛을 따라 걸어갔다.

"무슨 설명이라도 해 줘! 이게 다 무슨 일인데!"

도화지가 답답한 얼굴로 외쳤지만, 곧 그녀도 보게 될 거다. 지금까지 믿어 왔던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

.

.

소녀는 세상을 보았다.

그녀의 육체가 아니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정신이 동화되어 갔다. 균열에서 나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스스로 누구인지 자각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름이 걸렸다.

그녀와 함께 균열에서 나온 저급한 것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태생부터가 그런 것들관 달랐다. 그것들이 개구리나 쥐, 물고기 따위의 육체를 얻어 새 삶을 개척할 때 그녀는 아주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고,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필욘 없어.'

몸의 주인은 가출한 청소년이었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술에 취해 그녀를 때릴 것이다. 가서 응징할 수도 있겠지만 괜한 일 때문에 흔적을 남길 필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이 세계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온전한 힘을 다 되찾기 전까진 조심해야 돼.'

경찰은 피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세계는 허약한 인간들투성이였지만, 인간들은 조직적이었고 대단한 무기들을 개발했다. 그 무기들은 이 육체에 해를 끼칠 위험한 것들이었고 지금은 대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강 굴다리에서 경찰을 만났다. 그리고 그 직후 강으로 뛰어들었다.

'힘이 생길 때까지.'

그녀는 숨기로 했다.

'기다린다.'

강물에 씻겨 나가긴 했지만, 미약하고 달콤하게 남은 손가락 끝의 혈향을 느끼며 그녀가 손가락을 쪽 빨았다.

.

.

.

물컹하다고 생각했던 베이스캠프는 거대한 버섯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달았다. 여긴 버섯 군락지다.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버섯들이 즐비한 오색찬란한 버섯 왕국!

"버섯, 싫은데…."

"그래도 맡아야 해요. 다시 해 보세요.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도화지의 후각을 발달시키기 전엔 여기서 탈출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면서 이 미션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도화지도 별수 없단 듯 따랐다.

하지만….

"우움…. 전혀 없어."

세상이 온통 버섯이니까 버섯에 힌트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버섯이 열쇠가 아니라면 이런 생태계로 오지도 않았을 거다.

도화지는 쪼그려 앉아 분홍색 버섯을 보면서 계속 코를 킁킁거렸지만, 변화는 없었다. 우리가 선 곳은 넓이가 10미터는 되는 커다란 버섯의 머리였는데, 말캉한 바닥이 좋은지 범이는 앞발로 바닥을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긴장감들이 없어….'

적이 나타난 건 아니니 불행 중 다행이긴 하다만, 난 아직도 도화지가 재능마켓에 나타났을 때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 때문인가?'

그녀가 내 조력자로 특정되었다는 게 내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육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도화지인데?

'이미 벌어진 일이야. 되돌릴 수 없다면 앞으로의 판을 잘 짜면 돼.'

범이가 있었지만 홀로 외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말동무가 있다는 건 그만큼 위로가 될 거고,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거다.

"아, 콧물 나!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그냥 혼자가 나았으려나.

"누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이 미션 못 하면 우린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고요."

"미션을 하고 나면?"

"나갈 수 있죠."

"나가서는? 또 미션을 해?"

"…세상에 숨어서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들이 있어요. 우리가 나가지 못하면 그 괴물들이 사람들을 다치게 할 거예요."

나는 말하면서 뒤쪽 버섯을 살펴보았다. 버섯의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어느 것이 열쇠인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이건 작네.'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버섯을 자세히 보려고 앉았을 때 뒤에서 말캉한 느낌이 등 전체에 느껴졌다.

"…."

도화지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동안 혼자 고생 많이 했겠네."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따듯했다.

"벼, 별로요…."

각종 괴물들과 상대해 봤지만, 40년 모솔인 내겐 이런 공격이 가장 당혹스럽다. 아무리 내가 17살 고딩 몸을 하고 있지만, 정신은 아저씨이니 묘한 죄책감도 든달까?

"크, 크흠! 이거도 냄새 맡아 보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 막 딴 작은 버섯을 내밀었다. 도화지가 귀엽다는 듯 나를 보다가 버섯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킁킁!

하지만 이번에도 별반 다른 게 없었다.

"…."

그런데 버섯을 빤히 보던 도화지가 들고 있던 버섯을 날름 입에 넣었다.

"어엇! 잠깐만요! 독이라도 있으면…!"

"우엑, 맛없어."

인상 쓰며 말하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어? 어어? 됐다! 뭔가 됐어!"

【향기 1종을 흡수했습니다. 1레벨, 적의 흔적을 맡을 수 있습니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오오오! 나! 뭔가 해냈나 봐!"

"뭔데요?"

"그게! 이게! 막!"

그녀의 코가 벌름거렸다. 그러더니 주변을 보면서 흥분했다.

"냄새가 느껴져! 사방에서!"

가까운 것들의 향기가 더 진하지만,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온 냄새도 맡을 수 있다고 했다.

'먹어서 흡수하는 거였구나!'

뇌를 탁 때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성장이었다.

"다른 것도 먹어 보세요!"

"윽…. 너, 이게 얼마나 맛없는지 모르지?"

"전 도마뱀도 생으로 먹었었어요."

"정말?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살려고 먹었다고요!"

"흐음. 근데 꼭 날것으로 먹어야 돼? 익히면 안 되나?"

"…."

구워 먹어도 되려나?

"잠깐만요."

나는 무한의 활 통에서 나무 화살을 한가득 꺼냈다. 그걸 보던 도화지가 깜짝 놀랐다.

"뭐야?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요."

화살들을 모아 모닥불처럼 쌓고, 마지막 화살에 불 기름을 먹였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화살을 보며 도화지가 손뼉을 쳤다.

"멋있어! 라이터가 필요 없네!"

어느 부분에서 감탄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살로 만든 모닥불에 불이 붙어 갈 무렵이었다.

꿀렁.

'엇?'

바닥이 움직였다.

"꺄아아아!"

도화지도 놀라서 비틀거렸고, 범이도 펄쩍 제자리에서 뛰었을 때, 우리가 있던 큰 버섯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허억!"

나는 도화지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꽉 잡아요!"

"히이이익! 미끄러진다아아아!"

버섯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제 머리 위에서 불을 피우자 곧장 반응했는데, 활대로 찍어서 멈추려고 해 봤지만 퍼석! 부서지면서 활이 빠져 버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아아아!"

우린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다행히 5미터쯤 떨어지자 말캉한 버섯이 우릴 받아 주었다.

"…헉헉…."

"우와! 놀랐잖아!"

버섯이 계단처럼 자라 있어서 다른 버섯 위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추락할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면서 버섯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도 없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큰 버섯은 콩나물처럼 자라 있었다.

이런 큰 버섯 하나에 수십, 수백 개의 작은 버섯들이 잡초처럼 붙어 있었다.

"불을 피우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히잉…. 맛없는데."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도화지를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잠깐만요."

가방을 열어 드링크 하나를 꺼냈다.

"이거라도 찍어서 먹어 보세요."

"꿀물!"

이제 막 필드에 진입한 그녀에게 날것을 먹인다는 건 가혹한 일일 것이다. 발치에 있던 노란색 작은 버섯을 따서 꿀물을 조금 묻힌 뒤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먹는다?"

"어서요."

"아앙!"

크게 입을 벌려 버섯 머리를 와구 먹은 그녀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어어억…!"

그러더니 바닥에 엎어졌다.

"…왜, 왜 그래요?"

설마 독버섯이 있는 건가?

"누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