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네, 사람 구해지면요."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장사가 잘돼서 걱정이에요."
"하하! 배부른 소리!"
고깃집엔 어머니 가겔 도와드려야 한다고 말해 뒀다. 불판 닦는 사람만 구해지면 그만둘 생각이다. 그간 정도 많이 들었지만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었고, 이젠 여기서 받는 시급보단 다른 것들을 우선으로 둬야 했다.
가게 뒤로 나와서 오늘도 불판을 닦을 준비를 했다.
'그냥 공격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그 후에 어떤 움직임을 주는지도 중요하겠어.'
아저씨한텐 참 많은 걸 배웠다. 활은 관통상을 주는 무기다. 엄밀히 말하면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은 변수를 생각해 봐야 해.'
백작은 보통 놈이 아닐 거다. 단순한 공격으로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많은 준비를 해 둬야 했다.
슥슥슥.
그렇게 불판을 닦고 있는데, 그림자가 나타났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너, 간다며?"
"중간고사도 있고, 어머니 가게도 도와드려야 해서요."
"언제부터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원래 잘했거든요?"
"치…."
도화지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그럼 우린 이제 못 보겠네?"
"…혹시 모르죠. 살다 보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지도."
"그런 애늙은이 같은 소리 말고, 번호나 줘."
"번호는 왜요?"
"그… 꿀물도 더 있어야 하구! 또… 네가 갑자기 외로워질 수도 있을 거고… 또… 또…."
둘러대는 도화지가 순간적으로 귀엽단 생각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할머니는요? 좀 어떠세요?"
"진짜 많이 좋아졌어! 의사쌤도 깜짝 놀라시던걸? 자, 여기. 네 번호 찍어."
도화지의 핸드폰을 받아 들며 나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녀 덕분에 꿀물이 두 배로 늘어나고 있는 점은 내게 플러스 요인이 확실했다. 그리고 이제 드링크 제조를 본격적으로 하면 그것들을 늘릴 방안과 함께 효과도 시험해 봐야 했다.
'이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돕는 거지.'
결국, 모은 포인트로 삽을 사 버려서 드링크 제조까진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 전투뿐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근데 너… 영준이 애들하고 또 싸웠다면서. 나 때문에 그런 거면 이제 하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내가 피식 웃자 도화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몰라! 그냥 싸우지 말라고!"
"…."
빼액 소릴 지른 도화지는 내가 빤히 바라보자 허둥지둥하다가 가게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톡을 보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죽을 줄 알아!』
"…."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고무장갑을 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이지.'
이번 미션은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광택 효과가 깃들었습니다.】
이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
.
.
저녁 10시 20분.
팀장은 허름한 실내 포차에서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진아…."
아직 조우진 형사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력반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도 깨지고 저렇게도 다치고 한다지만, 이번 일은 이상하게 찝찝했다.
-출혈도 멎었고 수술도 잘되었는데, 저희로서도 왜 회복이 더딘지 모르겠습니다.
의사의 말 때문인가?
-뭐에 당한 겁니까?
-그게 참…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저희도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이런 상처는 처음 보거든요. 최초엔 날카로운 것에 관통당한 게 맞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피부가 찢긴 거죠.
칼도 아니고 유리 같은 것도 아니었다.
훌쩍!
팀장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손님은 없었다. 홀로 자작하는 그가 유일했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날씬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알고…."
강나은 경위가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모님, 잔 하나만 더 주세요."
그녀가 넉살 좋게 웃으며 코트를 벗어 빈 의자에 걸어 두며 팀장을 바라봤다.
"여기 있으실 거라던데요?"
그의 오래된 단골집이었으니 팀원 중 누구라도 알았을 거다.
"…뭐 좀 나왔습니까?"
"심증만요. 여전히 물증은 없고요."
"무슨 심증입니까?"
"제 주관적인 생각인데, 말씀드려요?"
"지금은 그거라도 안주 삼아야 할 것 같군요."
"좋아요."
그녀가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따르고 훌쩍 마셨다. 그리곤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돈이나 감정이 연루되어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기엔 피해자들의 특성이나 직업,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아요."
"한강 실종 사건도 포함이었습니까?"
"신원 미상의 소녀만이요. 개구리는… 실종자의 몸 일부를 먹이로 오인하고 삼킨 것 같다고 국과수에서 말하더라고요."
"그러면 김유선과 그 노숙자 소녀의 연관성은요?"
"이제부터 그걸 파 봐야죠.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김유선이 일하던 술집을 계속 탐문해 본 결과 그녀도 이상한 점이 많았어요. 젊고 예쁜 여자가 왜 술집에 나가겠어요?"
"돈이죠."
"맞아요. 그게 아니면 다른 일도 얼마든지 많잖아요? 실제로 김유선 정도 되면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아주 성실하게 일을 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오피스텔이나 계좌를 보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들죠. 취해서 난동을 부린 적도 없었고 주사가 심한 편도 아니었다고 해요."
"그게 신원 미상의 소녀와 어떻게 엮였습니까?"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 둘의 공통점이 되는 거죠. 김유선은 세 명의 실종자와 반드시 관계가 있어요. 아직은 그녀가 직접 살인을 가담했는지 밝힐 수 없지만, 연쇄 살인범이라고 하기엔 뚜렷한 동기가 없죠. 조우진 형사를 공격한 그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왜 공격했을까요? 그렇다고 죽일 의도는 없어 보이는데요."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한두 번 실수가 익숙해지고 적응되면 그때부터 무뎌지는 거죠."
"팀장님께선 그 소녀가 의도성이 있다고 보시네요?"
"그러지 않았다면 우진이가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래서 이제 말씀드릴게요. 지금 두 용의자는 모두 젊은 여자예요. 그런데 조우진 형사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모두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죠. 이제까지의 연쇄 살인 패턴을 모두 비켜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게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피해자들을 제압하려면 무언가의 도움이 없인 불가능하다고 봐요."
"역시… 약입니까?"
"현재까진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확장해야겠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실종자 두 명의 행방은 찾지 못하고 있고, 미라처럼 말라 버린 채 발견된 남자는 사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확장하자는 겁니까."
"수도권 조폭들과 유흥업소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약이란 건 절대 그냥 유통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그걸 취급하는 조직이 있고, 그 꼬리만 잡을 수 있다면 몸통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약반과 광수대가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팀장님께 말씀드리는 거예요. 강력반이 그들 허락받고 움직이는 기관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제 직감인데요. 이 사건,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 피해자가 더 나오기 전에 무조건 먼저 움직여야 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참, 신원 미상의 소녀 행적은요?"
"없어요. 완벽하게 증발했어요."
"증발이라…."
서울 시내에 CCTV가 몇 대고, 거리의 차에 블랙박스가 얼만데 여자애 하나 찾지 못한단 말인가.
"한강에라도 뛰어들었답니까…."
조우진 형사만 생각하면 어서 범인을 잡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잠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어색함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강나은 경위가 옆을 봤다. 작은 TV에서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안아 주세요!
아이돌같이 예쁜 여자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어찌나 힘이 좋은지 게임들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제법이네.'
저건 경찰대를 졸업한 사람들도 체력적으로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팀장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TV를 힐끔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런 거에 한눈을 팔다니 역시 경위라지만 젊은 여자는 어쩔 수 없나? 생각하며 소주를 따랐다.
어느새 고갤 돌린 그녀가 빠르게 잔을 같이 채우며 말했다.
"팀장님."
"네."
"조폭들, 하실 거죠?"
"위험할 겁니다. 저런 수준의 장난이 아니에요. 걔들은 진짜 칼 차고 다닙니다. 죽는다고요."
"순경들 협조받고 경찰차 타고 가면 대낮에 설마 어쩌겠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저 같은 여자는 더 건드리기 어려울걸요?"
그녀는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써먹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직감인데요, 이런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한 시점이랑 맞물려서 서울에 세력을 확장한 조직이 있어요. 만약 그 조직의 자금줄이 김유선 같은 여자였다면요?"
그녀의 말에 팀장의 눈이 또렷해졌다.
"강남 최고의 에이스 김유선의 검소함도 이상하고, 그 조직이 서울에서 무럭무럭 성장한 것도 수상하죠. 다른 조직들이 손 놓고 보고만 있었을 리 없잖아요."
"선부용역 말하는 거군요."
"아시네요."
"관할은 아니지만, 저희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쪽 행동 대장이 그쪽 세계에선 전설을 쓰고 있다나 어쩐다나 하도 귀 따갑게 들려와서 말입니다."
-와아아아아아!
-도민준!
-멋있다! 도민준!
-꺄아아아! 최애 민준! 최애 민준!
소란에 잠깐 TV로 돌아갔던 강나은의 눈이 다시 팀장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단서도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 팀장이 소주를 훌쩍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대신 하는 건 경위님이 아니라 제가 합니다."
팀장이 나가 버리자 강나은 경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다고 여자 혼자 두고 가냐…."
애초에 강력반에 왔을 때부터 찬밥 신세가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경찰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도달할 수 없는 뚜렷한 한계를 자각한 이후 그녀는 프로파일러가 됐다. 몸 쓰는 형사들이 직감으로 움직인다면 그녀는 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건에 접근해서 실마리를 풀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첫 사건부터 난제에 부딪혔다.
-도민준! 도민준!
-꺅! 꺄악!
-멋있다! 도민준!
홀로 술잔을 들고 그윽하게 TV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갔다.
'귀엽네.'
고등학생이 아이돌을 안고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사람을 안고 저렇게 뛰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도 곧잘 해내고 있었다.
'아빠….'
TV를 보다 보니 싫은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멋있었던 아빠. 아빠도 그녀가 어릴 때 저렇게 안아 주곤 했었다.
"…."
아빠 품에서라면 그 어떤 위험도 못 느낄 것 같았다. 포근하고 안전하고 따듯했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그녀의 술잔에 아빠의 빈자리가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