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79화 (79/277)

#079화

손을 뻗어 돌을 쥐었다.

【우정의 증표(유니크): 용도를 알 수 없다. 귀속. 판매 불가.】

"오!"

무려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뭐에 쓰는 건진 모르겠다.

돌은 샤르륵 실로 변했는데, 그게 살아 있는 것처럼 내 왼쪽 팔목에 감겼다. 그리고 왠지 가슴이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노랗고 부드럽던 털이 생각나는 건 착각일까?

"건강하게 잘 살아라."

지렁이도 많이 잡아먹고.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줬던 병아리에게 인사하며 다른 돌을 집었다.

【스킬: 삽질을 얻었습니다. 이제 삽질할 때 체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큭."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거 상당히 좋은 스킬이 아닐 수 없다. 체력을 소모하지 않고 무한대로 삽질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옆의 돌도 집었다.

【토룡 부산물×10을 얻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재료 수집망을 못 써먹었다. 부산물이 보상으로 나왔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모든 돌을 확인하고 나는 유리 벽으로 걸어갔다.

이때였다.

【축하합니다! 레벨 10을 달성했습니다!】

【시크릿 미션의 보상으로 10,000p를 획득했습니다.】

"오…."

벌써 내 레벨이 10이나 됐나? 하긴 그간 그렇게 굴렀는데 이상할 건 없었다.

【누적 포인트 18,800p.】

눈으로 진열장의 물건들을 훑었다. 내가 찾는 게….

"아, 저기 있네."

【철 삽.

머리와 자루가 모두 철로 만들어진 아주 좋은 삽.

부러지지 않는다. 휘지 않는다. 구부러지지 않는다.

가격: 20,000p.】

조금 다르지만 내가 쓰던 것보단 훨씬 좋아 보였다.

'저것부터 사야겠어.'

스킬도 생겼고, 저 삽은 여차하면 무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어쭙잖게 칼 같은 걸 휘두르느니 저게 훨씬 유용하리라. 물론, 1,200포인트가 부족했기에 일단 돌아섰다. 다른 것부터 하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이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1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이제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

【원숭이 사냥꾼이 선택할 수 있는 정체성은 두 가지입니다.】

"…."

내 이름이 언제부터 원숭이 사냥꾼이 됐냐.

【희생의: 민첩, 순발력, 재생력 추가 효과.】

【독선의: 체력, 힘, 공복도 감소 추가 효과.】

"…."

뭘 의미하는 건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두 가지 정체성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으음…. 둘 다는 안 되나?"

【과한 욕심은 화를 부릅니다. 여드름, 생리통, 탈모, 발기 부전….】

"뭐라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농담도 못 하냐?"

섬뜩한 메시지를 내뱉는 재능마켓에게 나는 곧장 내 선택을 내놨다.

"민첩, 순발, 재생력이 좋겠다."

【희생의 원숭이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민첩, 순발력, 재생력이 코어에 깃듭니다.】

후우우우웅.

삽시간에 빛으로 만든 바람이 내 안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리곤 그게 아랫배에 뭉쳤다.

'된 건가?'

잠깐 기다렸지만 메시지는 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범이의 머리를 만져 준 뒤 옷을 벗었다.

그리곤 철봉으로 걸어갔다.

"후우…."

이걸 못 해서 그 고생을 했었다. 필라테스는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무조건 해낼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희생의 원숭이 사냥꾼이라니. 무슨 이름이 그러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팔을 뻗어 철봉을 잡았다.

잊고 있었지만,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후우우우…."

숨을 내쉬고 팔에 힘을 줬다.

스르륵 몸이 위로 올라갔다.

'가벼워.'

전에도 여기까진 힘+3과 근력, 체력이 버텨 줬었다. 그 뒤가 문제지. 그런데 웬걸? 오늘은 노란 병아리 엉덩이만큼이나 가뿐해진 것 같았다.

'여기서 바로 물구나무를 서려고 해서 안 된 걸지도 모르겠어.'

모든 일엔 순서가 있다.

나는 일단 수평으로 철봉에 매달렸다. 그리곤 팔을 쭉 폈다. 글자 T처럼 머리와 다리는 가로로 만든 뒤 쭉 뻗은 팔에 중심을 뒀다. 그리곤 그 중심을 아랫배로 이동하면서 상체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다리는 하늘로 들렸다.

【철봉 거꾸로 매달려서 1분 버티기 카운트합니다. 59초, 58초, 57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확신했다.

【철봉 거꾸로 매달려서 1분 버티기 9,999회 남았습니다.】

【축하합니다! 대단한 도전에 성공하셨습니다! 500P를 얻었습니다!】

이제 철봉은 나를 가둘 수 없을 거라고.

.

.

.

-민준아! 안녕!

-좋은 아침이야! 민준아!

-공부 많이 했니?

학교에 갔다.

매력이 덕지덕지 붙은 아이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분위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내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미소 지으며 인사를 받아 주자 여자애들은 꺄아! 꺄아! 자기네들끼리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던가?'

박채린이랑 찍었던 방송이 내일 저녁에 방영되는 것 같다. 딱히 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게 전파를 타고 나면 지금보다 더 애들이 난리를 칠 수도 있겠다.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폈다.

"…."

그냥 눈으로 스윽 훑기만 하는데도 내용이 통째로 복사되었다.

철봉을 마스터하고, 지력+3이 추가되어 나는 이제 지력+4가 되었다. 월등하게 좋아진 머리로 저번보다 더 신중하고 차분하게 바뀌었는데, 뭔가 진득한 여유마저 생겼다.

'지력이란 게 기억력과 사고력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아.'

종합적으로 IQ라고 부르는 뇌 기능 평가가 있었지만 그걸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었다.

'한번 보면 좀처럼 잊기 힘들겠어.'

1이 올랐을 때도 놀라운 경험을 했었다. 그런데 한 방에 3이 추가되자 이젠 내 시간이 느리게 가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뭘 보면 바로바로 연상이 되고, 필요한 게 있다면 기억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요즘 같은 정보의 바다에서 모든 것을 흡수했다가는 머리가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며칠 해 보니까 뇌란 건 무한대에 가까워서 계속 보고 배워도 가득 차지 않았다.

'미션이 우선이긴 한데….'

철봉 때문에 고생을 하긴 했어도 지력+3이 주는 만족감이 크다 보니 다른 스탯도 따내고 싶어졌다. 물론, 또 쉽진 않겠지만.

눈으론 교과서를 보면서 머릿속으론 계속 다른 생각을 했다.

'백작이란 녀석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해. 시간제한은 없지만, 이대로 정체되어 있을 순 없으니까.'

나는 이제 평소에도 수호자의 안경을 쓰고 다녔다. 이거로 보면 하층민을 구별할 수 있었고, 다른 필라테스를 하려면 메인 미션을 무조건 넘어야만 한다.

'내가 찾을 수 있으니까 미션이 나온 거겠지. 주변이 아니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주변 사람도 빠짐없이 확인해야 했지만, TV나 유튜브도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무려 레어….'

첫 레어 등급 미션인 만큼 정말 신중해야 한다.

'백작… 평범하진 않을 거야.'

호칭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여기로 넘어와서 살고 있다면, 서큐버스보다도 강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힘이 있는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갈까?

'절대 아니지.'

좋아진 머리는 끊임없이 추리를 가속했다. 그리고 그만큼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점심시간.

"여, 도민준."

강남석 패거리가 또 나타났다. 전보다 숫자가 더 많아진 것 같다.

"…?"

"네가 인성고 애들 또 건드렸다면서?"

"…."

그때 한강에서의 일 말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왜?"

"아니, 조심하라고. 그쪽 3학년들이 벼르고 있다는 말이 있거든. 3학년들은…."

강남석이 내 책상에 걸터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클럽 형들이나 조폭하고도 알고 지낸다는 소문이 있다고. 나야 우리 학교 이름이 널리 퍼지니까 좋긴 한데 너, 그러다가 훅 간다."

거참, 이놈은 착한 거야, 오지랖이 넓은 거야?

"야, 내 전화번호는 저장했냐?"

"해야 하냐?"

"여태 뭘 들었어? 버렸지? 다시 적어 줄게."

녀석이 펜을 들어 내 교과서에 적으려 했다.

"010-5267-346×."

"헐? 외운 거야? 감동인데?"

"됐으니까 가."

착각하지 마라. 외우고 싶어 외운 거 아니다.

이제 웬만한 건 자동 저장된다.

녀석이 내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라. 네가 당하면 우리까지 우스워져. 그러면 졸업할 때까지 힘들어진다고. 우리 2, 3학년 형들한테는 내가 잘 말해 뒀으니까 괜히 시비 붙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해."

"그래, 알았다. 그래도 말은 통하는 거 같아 다행이네."

강남석이 피식 웃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냐?"

"너를 적으로 돌리기보단 아군으로 만드는 게 낫단 판단."

"하, 똑똑하네."

"독종이라며. 난 그런 놈들 무섭거든. 꿈에 나온다고. 박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나중에 햄버거라도 같이 먹으면서 오해 풀자."

"…."

햄버거라니. 이럴 땐 삼겹살에 소주가 나와야 할 타이밍 아닌가?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게 이럴 때 가장 실감 난다.

"간다."

점심 같이 먹자고 할 만도 하건만 강남석은 선을 잘 지키는 녀석이었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강남석 패거리를 보면서 나는 핸드폰을 켰다. 인성고고 뭐고 그런 놈들이 우르르 몰려온다고 무서울까?

'백작은 어디 있는 걸까.'

나는 뉴스 사회면부터 연예, 생활까지 다 뒤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이라도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놈을 찾기 위해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다.

학교에서 나와 강남역으로 향하는 길.

요즘엔 재능마켓에 가지 않는다. 가 봐야 귀한 체류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고, 미션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할 일도 없었다. 대신 고깃집에 일찍 와서 아저씨에게 칼질을 배웠다.

"이제 곧잘 하네? 힘 좋은 건 알았지만…."

"잘 가르쳐 주셔서 그렇죠."

"아니야. 내가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서 이렇게 빨리 늘어? 그건 불가능한 거라고."

다 지력이 올라서였지만,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이제 결 따라 자르는 건 익숙해진 것 같은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

"또 뭐가 있어요?"

"고기 자르는 거 배우려는 거 아니었잖아. 정육점 차릴 것도 아니고."

"그렇죠…."

아저씨가 칼을 거꾸로 잡았다. 그러더니 고깃덩이에 가차 없이 푹 찔렀다.

"칼을 쓸 때는 힘을 잘 조절해야 돼. 안 그러면 내 손이 다친다. 모르는 사람은 이 뾰족한 부분으로 그냥 찌르면 쑥 들어가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지. 들어갈 부위를 알고 찌르는 거야. 자, 봐. 여긴 안 들어가지? 안에 심줄이 있어서 그래."

"오…."

"돼지나 사람이나 소나… 결국 피와 살로 이뤄진 짐승은 다 비슷하다고 보면 돼.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에 어떤 장기가 있는지 알면 칼질도 쉬워지는 거다."

"혈관은요?"

내 말에 아저씨가 움찔했다.

"…더러워지기 싫으면 피해야지. 산 짐승이 피 흘리면서 날뛰면 난장판이 되니까."

아저씨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짐승이란 말을 강조했다.

그러더니 칼을 다시 쥐었다.

"한 번에 제대로 찌르지 못했을 때는 이런 방법을 쓰면 된다."

푹 찌른 칼이 돌아갔다.

"어렵게 찌른 칼을 뺐다가 다시 찌르는 것도 일이거든. 짐승들은 몸속에서 칼이 돌아다니면 힘이 쭉 빠지게 되어 있어. 그냥 찔리는 거랑 헤집는 건 확실히 다르다는 거야."

"그렇겠네요."

"…네 녀석 눈빛이 하도 간절해서 알려 주긴 한다만, 너 설마 사람 찌르려는 건 아니지?"

"하하!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나는 칼을 받아 들고 배운 대로 해 보았다.

"야, 이거 팔아야 하는 고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결 따라 잘라야지! 이미 죽은 걸 또 죽이려고 그러냐?"

"아!"

"칼 쓰는 사람은 말이다. 항상 머리를 차갑게 해야 해. 주먹질하곤 전혀 달라. 이건 짐승을 너무 쉽게 죽일 수 있어. 반대로 말하자면 나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거고."

잘 모르지만, 아저씨도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닌 게 확실했다. 저 아련한 눈빛엔 내가 '하층'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그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곧 그만둔다고 했다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