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에…에…?"
호감?
삐약!
병아리는 나를 보곤 깜찍하게 울더니 저쪽으로 우다다! 뛰어갔다.
"…."
나는 순간 이해가 안 돼 멍하니 서 있었다. 병아리는 순식간에 50미터를 이동하더니 나를 보며 또 날갯짓하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워낙 커서 조금만 뛰면 수백 미터는 금방이다.
'공이라도 던져 달라는 거냐.'
놀긴커녕 저 발에라도 밟히면 즉사다, 즉사!
"미치겠네."
어찌 됐든 병아리는 날 공격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위험 요소 하난 덜어 냈다. 홍수도 지나갔고 내가 어디까지 떠밀려 왔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면서 범이에게 말했다.
"우리 베이스캠프, 찾을 수 있겠어?"
뀨우?
녀석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말이 안 통하는 건 녀석도 마찬가지.
나는 고개를 저으면 사방을 둘러보았다.
더 막막해진다.
"흐으… 골치야…."
내가 봐도 홍수에 쓸린 일대는 완벽하게 리셋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으니,
'저쯤이려나?'
활을 잡고 왼쪽으로 걸어갔다.
베이스캠프를 찾아야 한다. 그 근처에 지렁이가 있을 테니까 베이스캠프만 찾으면 된다.
"범아, 가자."
삐약?
아니, 너 말고.
내가 범이와 이동하기 시작하자 병아리가 머리를 갸웃갸웃하면서 우리 뒤를 따랐다. 내 생전 저렇게 귀엽지 않은 병아리는 처음 봤다. 역시 뭐든 귀여워지려면 적당한 크기가 중요한가 보다. 범이 봐라. 얼마나 귀엽나?
뀨우?
눈이 마주친 녀석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범아, 제발 캠프 좀 찾아 주라. 부탁이다."
녀석의 동물적 감각이나 후각 뭐 그런 게 나보단 낫지 않을까?
뀨우우!
"오오오! 알아들었어?"
내가 반색하자 범이가 갑자기 옆으로 뛰었다.
"그쪽이야…?"
말을 하는데, 범이가 점차 몸집을 키웠다. 그러더니 훌쩍훌쩍 뛰면서 장난치듯 빙빙 돌았다.
삐약?
그것에 반응하는 한 마리가 있었다.
우다다다다!
범이가 병아리와 함께 황토밭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
표범이 도망치고, 병아리가 그 뒤를 쫓아다니며….
"놀고 자빠졌네. 아, 놔, 진짜…."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삐야아아악!
꾸우웃!
세상 절친을 만난 듯 꼬리 물기를 하며 뛰어다니는 두 마리에게서 신경을 끄고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정글이 암담할까?
이 황토밭이 더 처참할까?
두 곳 모두 그 안에서 뭘 찾아야 한다는 건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문제라는 거다. 근데, 한 번도 큰 시련일 건데, 나는 연속으로 두 번째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재능마켓이 원망된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가 생겼다.
'큰일이네. 이제 삽도 없는데.'
내 정신도 놓은 판에 그것까지 챙길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지렁이부터 찾자.'
그나마 비가 오면 놈들이 나온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가 내리면 홍수가 발생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비가 오기 시작해서 놈들이 날뛸 때, 그때를 노려야 해.'
그런 다음 홍수가 나기 전에 빠져야 했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이 좋겠지.'
홍수가 쓸고 가면 물이 지난 곳은 대체로 편평해지지만 유독 침전물이 쌓이는 곳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큰 동산만큼은 아니었는데, 꼭대기에 오르자 그나마 시야가 더 넓어졌다.
"히야…. 넓다… 넓어… 스케일 보소."
하기야 병아리가 저 크기인데, 이 황토밭은 또 얼마나 크겠나? 아주 먼 하늘에서 보면 내가 있는 이곳이 18홀 골프장 외곽의 작은 벙커 안일 수도 있겠다.
'근데 하층이란 건 얼마나 존재하는 거지?'
내가 아직 다 가 본 건 아니겠지만, 이 하층이란 곳은 정말 어마무시했다. 저 병아리만 해도 봐라. 크기가 말이 되나? 하지만 내가 지난번에 갔던 그 정글과 비교하면 형평성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뭐든 생태계가 유지되려면 비슷해야 하니까.
그럼 설원에서 만난 좀비는?
그놈들이 여기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렁이한테 이빨이라도 들어가겠나? 아니, 저 병아리가 먹는 거 아냐?
'확실히 다른 곳일 거야. 어쩌면 층 개념일 수도 있겠어.'
내가 살던 대한민국이 최상층이라고 했으니까 여긴 하층의 어딘가일 거란 가설이 든다.
'저 두 녀석이 같은 세상 동물일 것 같진 않아.'
나에 비하면 아주 큰 표범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병아리를 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다.
"아, 몰라!"
생각은 지력+3을 따낸 다음에 하자. 지금은 지렁이만 생각하기에도 벅차니까.
.
.
.
하루가 지났다.
밤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병아리 털 밑에서 바람을 피했다. 확실히 이거 하난 쓸 만했다. 설원에서도 이 녀석이 함께라면 얼어 죽진 않겠다.
날이 밝으면 다시 이동했는데, 베이스캠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건 마치 해운대 백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기분인데, 그 찾는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개미 정도로 가늠하면 더 쉽게 와닿을 거다.
목이 말랐다.
이 황토밭은 그렇게 비가 왔어도 물이 고인 곳이 하나도 없었다. 간혹 질척거리는 곳이 있었지만 흙탕물이라 마실 수도 없었다.
'이렇게 쓰기엔 죽을 만큼 아깝지만….'
가방에서 드링크를 꺼냈다.
이제 내게 남은 드링크라곤 2개가 전부였다.
'수분을 섭취해야 돼.'
눈물을 머금고 마개를 땄다.
뀨우?
삐약?
그러자 두 녀석이 동시에 반응했다.
"…."
"…."
"…."
드링크 하나를 두고 우리 셋은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혼자 꿀꺽했다간 이 짐승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쩔 수 없이 한 모금만 마셨다.
【순발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지속 시간 10분.】
크흐윽! 이 아까운 영약을 목마르다고 마셔야 한다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이는 처량하게 뀨우우, 병아리는 재촉하듯 뺙뺙! 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범이와 병아리에게도 똑같이 드링크를 나눠 줬다. 둘이 만족하듯 촐싹대는 걸 보다 보니 이상하다. 범이는 그렇다 치고, 저 병아리는 몸집에 비하면 마셔 봐야 맛이라도 느끼긴 하는 걸까? 콧물 한번 삼키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삐아아아아악!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모양인지 병아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범이도 그런 병아리와 장단을 맞췄다.
"또 시작이냐…."
어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놈들은 뛰어다녔는데, 확실히 드링크 효과 덕분인가 보다.
"그럴 기운 있으면…."
군소릴 하려는데, 후드드득!
"…."
후드드드드드득!
"와, 씨…."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실화냐?"
비가 또 내린다.
막 드링크 따서 마셨는데, 꼭 누가 지켜보고 있다가 골려 주려고 노린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아…."
단순히 내가 재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드링크 한 모금으론 갈증이 가시지 않았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자.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혀에 닿는 빗방울이 달다. 찝찝하게 달라붙었던 흙먼지도 씻겨 내려간다.
솨아아아아아.
빗방울은 순식간에 굵어지면서 샤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변해 갔다.
이때였다.
삐야아아아악!
병아리가 울었다. 그러더니 한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엇? 범아!"
나는 짚이는 게 있어서 범이에게 올라타고 병아리 뒤를 따랐다. 엄청나게 빠른 녀석이었지만, 워낙 덩치가 커서 저 앞에 가도 보였다. 두 녀석 다 순발력 물약 때문인지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10분, 20분.
"놓치면 안 돼!"
점차 희미해지는 덩어리를 보면서 내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게 좀 더 달려갔을 때,
"와아아아!"
병아리가 지렁이 밭에서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가자! 범아!"
나는 범이를 타고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활을 겨눴다.
'보인다고 그냥 무턱대고 쏘면 안 돼!'
지렁이를 옆에서 관통해 봐야 별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 지렁이나 쏴서도 안 된다. 육질이 연한 녀석이 꼭 있을 거다.
'최대한 타격을 주려면 몸 전체를 관통시켜야 해.'
인내 스킬로 모인 첫 타격이 가장 중요하다.
그으으으윽!
시위가 당겨졌다.
병아리는 벌써 한 마리를 잡아서 삼키고 있었다. 부리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젖 먹던 힘까지 내며 대항해 보지만, 병아리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녀석 덕분에 놈들이 당황하고 있어.'
천적의 등장은 미물이라도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병아리는 통통한 지렁이만 골라서 따라다녔다. 이왕 먹을 거면 튼실한 놈으로 고르는 건 사람이나 저 녀석이나 똑같은 거다.
'저거다!'
나는 범이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면서 내 소중한 스킬 하나를 썼다.
【1분간 주력이 2배 오릅니다.】
아무래도 범이를 타곤 내 마음대로 원활한 동작이 힘들었다.
타다닷!
전력으로 뛰어서 멈추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곤 기다렸다.
조금 전 지렁이 한 마리가 땅으로 숨었다. 분명 녀석의 크기는 이전 놈보다 작았고, 피부도 우윳빛이 짙었다.
'나와라….'
안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놈들은 이렇게 비가 오면 땅속에서 오래 버티질 못한다.
'나올 거야.'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절망적인 소리가 저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으드드드드드드!
지진이 난 것 같은 진동.
이건 한번 겪어 봤던 거다.
뀨우?
범이가 놀라서 몸집을 줄이더니 내 품에 기어 올라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삐약?
병아리도 감지했는지 사냥을 멈추고 나를 봤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조금만 더!'
급류가 오고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이런 찬스를 언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삐아아아아악!
그간 정들었는지 전엔 그냥 혼자 도망쳤던 병아리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강제로 물고 가려는 모양이다.
"안 돼!"
오기가 생겼다.
지쳤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결국 저쪽에서 쓰나미 같은 파도가 밀려드는 게 보였다.
"오지 마! 너까지 휘말린다고! 멍청아!"
고함쳤지만 병아리는 이미 내 곁에 와 있었고 녀석의 부리가 나를 향해 내려왔다.
그런데 이 순간이었다.
"…!"
피잉.
화살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이 병아리의 부리에 물려 버렸다.
화라라라라락!
병아리가 뛰었다. 녀석의 작은 날갯짓이 이렇게 안타깝다니!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토룡을 사냥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재능마켓에서 보상을 확인하세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코어가 성장했습니다!】
【8,800p를 얻었습니다.】
작은 지렁이의 머리 부분부터 화살이 틀어박혔다. 그게 몸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멈춘 것 같다. 내부를 싹 쓸었다는 뜻이다.
"좋았어!"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 병아리의 몸을 파도가 덮쳤다.
"…흐으으윽!"
한번 당해 봐서 엄청난 충격을 대비하는데, 응?
"…!!"
둥실!
병아리의 몸이 파도 위로 솟구쳤다.
"…오오… 오?"
그리곤 물결을 따라 올라가더니, 파다닥! 박차고 날아올라 저쪽으로 뛰었다.
크다고 해야 하나…. 작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 보잘것없는 날개를 병아리는 십분 활용해서 날고 있었다.
첨벙!
파도 가장자리에 떨어진 병아리는 유유자적하게 뭍으로 올라서더니 나를 뱉었다. 그리곤 몸을 부르르 털었다.
"…."
순식간에 1km는 날아온 것 같다.
"너…."
나는 병아리를 올려다보았다.
"대단하구나…."
삐악!
병아리가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런 녀석의 볼을 품에 한가득 안으며 웃었다.
.
.
.
【재능마켓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했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세요.】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베이스캠프는 지렁이밭 근처를 뒤지니까 찾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짧진 않았지만, 막상 찾고 나니 아쉬움도 있었다.
병아리와 헤어질 시간이 온 거다.
-넌 멋진 닭이 될 거다.
그래도 마냥 거기 있을 순 없으니 덕담을 해 주고 나왔다.
"…."
황토밭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내 상태는 스텟상으론 딱히 변한 건 없었다. 하지만 샤워실로 들어가면서 나는 알았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아니면 내 안의 뭔가가 성장했는지 정신이 차분해진 것 같았다.
솨아아아아.
흙탕물이 씻겼다.
내 몸과 범이의 몸에 붙어 있던 황토물이 하수구로 내려갔다. 씻고 나와서 붙박이장으로 걸어갔다. 범이가 화장실 앞에 앉아 제 털을 핥고 있었다.
"…이번에도 정말 힘들었다…."
이 평화로움이 이다지도 낯설다니.
덜컥.
붙박이장 문을 열었다. 그리곤 보았다.
"…?"
반짝이는 노란빛 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