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맨발… 이네요?"
"그래! 맨발!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어! 키 150에서 155! 마른 체형! 맨발로 다니는 애 찾아! 맨발로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알겠습니다!"
감우성 형사가 병실 밖으로 나가자 팀장은 조우진 형사에게 다가갔다.
"우진아…."
강력반에 있다 보면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조폭도 상대해야 할 때가 있고, 마약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용의자와도 싸워야 했다. 그래서 강력반 형사들은 흉터를 훈장처럼 여긴다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농담이지 다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야 한다, 우진아."
팀장은 한숨을 푹 쉬며 조우진 형사의 손을 잡아 준 뒤 병실에서 나왔다. 더 지켜 주고 싶었지만 할 일이 많다.
'아직 19번 방 실종자들도 못 찾았는데, 또 이런 일이….'
사건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겹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지금 인원으로도 부족한데, 조우진까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경찰서로 돌아온 팀장은 낯선 얼굴을 보게 됐다.
"…누구십니까?"
젊은 여자는 팀장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합류하게 된 강나은 경위입니다."
새파랗게 어리지만, 계급은 더 높다. 당연히 팀장의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19번 방 사건의 프로파일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 없이 자리로 걸어가는데, 보드 판이 보였다.
'언제 이걸 다?'
자릴 비운 게 고작 하루도 안 됐는데 보드 판엔 빼곡하게 정보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강나은 경위가 팀장을 따라붙으며 말했다.
"김유선과 관련된 세 명의 실종자 중 한 명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 입니까?"
팀장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장안동 오피스텔입니다. 찾아가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어서 영장 신청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팀장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유능한 사람이 필요했다.
"김유선에게 걸려온 전화 중에서 공중전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공중전화가 장안동 소방서 근처였고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해당 날짜 CCTV는 지워져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인상착의를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쪽이면 오피스텔이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실종자 사진을 들고 편의점을 돌았습니다."
"아, 편의점."
팀장은 자리에 앉지 않고 보드 판을 보더니 강나은 경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시다."
"아직 영장이…."
"가다 보면 나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경찰서 밖으로 나서며 팀장이 물었다.
"프로파일러라고 했습니까?"
"네."
"그쪽 눈엔 이 사건, 어떻게 보입니까?"
"일본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과 몇 년에 걸쳐 우리나라 각지에서 발견된 기이한 시체들, 그리고 이번에 발생한 19번 방 사건이 다 연관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온 거고요. 청장님께서도 언론엔 쉬쉬하시지만 매우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팀장은 순경에서부터 팀장까지 올라온 베테랑이었다. 그래서 경찰 대학 나왔다고 간부 딱지 달고 거들먹거리는 종자들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강나은은 꽤 쓸 만한 것 같았다.
물론 현장 경험이 없을 테니 더 지켜봐야겠지만.
"조우진 형사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팀장이 발이 우뚝 멎었다. 그의 눈이 매섭게 변하기 전에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용의자의 힘으로는 절대 강력반 형사를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방법이 하나 있다면."
"있다면?"
"약입니다."
"으음…."
"용의자는 맨발로 다녔습니다. 며칠 전 인근에서 용의자를 목격했다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최근엔 미성년자들도 SNS나 클럽 인근에서 쉽게 약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 봐라?'
팀장도 아까 병원에서 알아낸 사실들 아닌가?
"급격한 노화와 폭력성, 사려 분별할 수 없는 갈증은 약 외엔 없습니다."
"…."
끄덕이며 차에 탄 팀장이 장안동을 향해 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가는 길에 영장이 나왔다.
"열쇠공 불렀습니다."
연장으로 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뒷일이 골치 아프다. 그래서 요즘엔 영장이 나오면 이렇게 스마트하게 처리한다.
'제법인데?'
팀장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강나은은 경찰대 수석 졸업자다. 온종일 사건 파일 보는 게 일상이었고, 잠도 잘 안 잔다. 유일한 취미라면 격투기? 흠뻑 땀을 흘리고 머릴 식힌 다음 또 사건 파일을 들여다보는 독종이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두 사람이 8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열쇠공이 도착해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제 따면 됩니까?"
팀장이 고갤 끄덕이자 열쇠공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끼이익.
열린 문 안쪽에서 악취가 화악! 풍겨 나왔다.
"크흡!"
"우욱-!"
팀장과 강나은 경위는 코를 막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오매, 이게 무슨 냄새야!"
열쇠공이 기겁하면서 저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처음이겠지만 팀장은 익숙했다.
죽음의 냄새.
"감식반 불러요."
"네, 팀장님."
팀장이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신발 겉에 신었다. 현장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쓰는 비닐이었다.
그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안으로 들어갔다.
"…."
원룸 구조라 안이 한눈에 보였는데, 오피스텔엔 가구랄 게 별로 없었다. 빌트인을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없어. 그러면 이 냄새의 출처는….'
그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화장실 문을 열었다.
"…크윽…."
그리고 보았다.
마치 새까맣게 타들어 간 것 같은 시체. 그것은 아주 작은 욕조에 누워 있었는데, 온몸의 수분은 다 빠져나간 것처럼 바짝 쪼그라들어 있었고, 심지어 구더기조차 끓지 않았다.
'미라?'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소금이 가득 찬 드럼통에 넣어도 이렇게 잘 말릴 수 없을 거다. 살인범들이 가장 어려워하면서도 실수가 잦은 것도 바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다. 팀장은 욕조와 시체가 닿은 부분을 보았다.
'말도 안 돼.'
깨끗했다.
시체가 부패하면 반드시 이런저런 현상이 벌어지고 그것 때문에 시체를 대충 산에 묻으면 발각되는 거다.
"다른 곳에서 범행하고 여기로 옮겼을 수도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죽었다는 건 확실하군요."
팀장은 이제 김유선과 관련된 실종자들이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버렸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그 괴이하던 김유선의 시체와 이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란 거다.
이상한 건 비슷했지만….
"자상이 없는데요?"
시체에 바짝 다가가서 살피던 강나은 경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말리려면 피부터 뺐어야 할 텐데 어디에도 상처가 없어요!"
능숙한 살인범들은 목, 팔목 같은 동맥이 흐르는 곳을 딴다. 그렇게 가벼워진 시신을 가방이나 트렁크에 넣어야 무게가 확 줄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걸까요?"
강나은 경위가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팀장은 그녀에게 한 수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걸 이제부터 밝히는 게 우리 일인 겁니다."
.
.
.
부드러웠다.
추운 겨울날 배달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씻고 두툼한 솜이불에 누우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늑하고 따듯하고….
"으음."
눈을 뜨기 싫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꼬르르르르륵!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육체는 한계점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건 좋은 신호였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허억?"
정신이 들자마자 떠올랐다.
나는 분명 급류에 휩쓸렸고, 뭔가에 맞아서 정신을 잃었는데?
"푸웁…."
이 거대하고 푹신한 털은 대체 뭔가?
"우우우웃!"
털 무더기를 두 손으로 헤치며 버둥거리는데, 털이 떠올랐다. 그래, 산더미 같은 털이 둥실 위로 떠오른 거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한 쌍의 눈동자.
"허억…."
병아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삐약?
비는 멎었다.
나는 급히 가방을 열어 보았다.
뀨우?
범이가 머릴 빼꼼하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털 덩어리가 또 아래로 추락해서 나를 짓눌렀다.
"커헉…."
병아리는 나를 깔고 앉아 엉덩이를 비볐는데 내가 탈출하려고 바닥을 기면서 나아가자 병아리는 자세까지 바꾸며 끈질기게 나를 깔아뭉갰다.
"이런…."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이야!
"자, 잠깐만! 숨 막힌다고!"
바락바락 외치자 털이 다시 둥실 떠올랐다. 강철 기둥처럼 선 두 개의 다리가 보였다.
삐야악?
무시무시한 부리가 내 앞으로 내려왔다.
삐약!
이 괴물 병아리가 나랑 뭐 하자는 거냐?
부리로 내 몸을 툭툭 건들더니 병아리가 날개를 펴고 퍼드덕 뛰었다.
"…."
좋아하는 것 같은데?
꼬르르르르륵!
일단 나는 가방 속에서 드링크를 하나 꺼냈다. 다 먹고 이제 꼴랑 하나 남은 내 마지막 비상식량이었다.
【대체 에너지 드링크.】
병아리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 기력이 없어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벌컥, 한 모금 마시고 범이에게도 내밀었다.
쭙쭙쭙.
젖병을 문 송아지처럼 범이도 잘 받아 마셨다. 이 녀석은 이제 내가 주는 생수나 드링크에 완벽하게 중독됐다.
【공복감이 해소됩니다.】
【필요 영양소가 충족되었습니다.】
"아…."
효과 죽인다. 숨 쉴 힘도 없었는데, 단박에 멀쩡해졌다. 범이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방에서 뛰어내리더니 몸을 바르르 털었다.
"…."
문득 위를 보았다.
병아리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드링크 병을 보니 오 분의 일쯤 남아 있다.
"너도… 줄까?"
삐약?
근데 이게 간에 기별이라도 가나?
뭐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까 녀석의 벌어진 주둥이에 남은 걸 부어 버렸다. 그래 봐야 저 큰 몸집 때문에 그냥 침을 바른 것 같았지만 부리를 다물고 쩝쩝거리던 병아리는 갑자기 펄쩍펄쩍 뛰었다.
"쿠억…."
놈이 방실방실 뛸 때마다 풍압이 발생해서 나는 무방비로 서 있다가 뒤로 데굴데굴 굴러 버렸다.
"아놔…. 이 자식이…."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 단단한 지렁이도 한입에 삼키는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도 먹지 않고 품어 줬다는 것도 기적이었다.
근데 통제가 안 된다. 커도 너무 커서 근처에 있기만 해도 깔려 죽겠다.
내가 날아간 걸 봤는지 병아리가 후다닥 뛰어오더니 얼굴을 바닥으로 내렸다.
삐약?
"이제 더 없어.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내가 알기로 이 드링크 약효는 반나절이다. 그 후엔 또 굶주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갑자기 놀라서 손을 더듬었다.
활!
"후우…."
활 통도 만져진다. 삽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소중한 건 다 있었다. 무엇보다 범이도 지켰다.
그러고 있는데 내 몸을 부리가 밀었다. 힘이 얼마나 강한지 벽이 떠미는 것 같다.
"야, 하지 마."
녀석의 부리를 손으로 밀어 봤지만 부리는 집요하게 내 몸을 밀어 댔다.
설마 놀자는 거냐?
"하지 말라니까!"
내 외침에 녀석이 깜짝 놀랐는지 두 날개를 활짝 폈다.
삐약!
그러더니 훌쩍 뛰어올랐다.
화악!
풍압이 또 일었다. 황토 흙먼지가 비산하고 녀석의 질펀한 엉덩이가 바닥으로 내려오면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아, 진짜…."
진심으로 짜증이 치솟으려고 하는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대상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