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76화 (76/277)

#076화

'좋았어!'

다시 구멍으로 급히 들어갔다.

색도 더 우윳빛이고 굵기도 가늘다는 것에 내 화살이 먹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지렁이가 한 마리일 리 없잖아!'

워낙 과격한 몸뚱이를 봐 버려서 이무기로 착각했나 보다. 지렁인 원래 토양만 맞으면 우글우글 많다.

'약한 놈을 찾으면 되는 거였어!'

그렇게 당하고도 또 속다니! 정글에서 거대 원숭이를 보고도 이래!

나는 희망과 자책을 동시에 하며 지렁이를 쫓았다. 하지만지렁이가 지나간 길은 점차 비좁아지더니, 금세 내 머리 하나 넣기도 빠듯해졌고,

바바바박!

삽으로 퍼내며 가 보았지만, 이러다간 압사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기어 나왔다.

"으음…."

솨아아아아아.

무지막지한 비가 온다.

이런 날은 뜨거운 믹스커피 한잔이 딱인데…. 콸콸 흐르기 시작한 저 누런 황토물 말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병아리가 먹은 지렁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어.'

어제 그 지렁이를 봤을 땐, 족히 오십 미터는 될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10미터 안쪽이었지. 그렇다는 건 여러 마리를 내가 한 마리로 오해했다는 거야.'

차분히 생각해 보니 여러 마리가 사방으로 불쑥불쑥 솟구치는 걸 잘못 본 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처음 내가 삽으로 쳤던 지렁이와 막 병아리가 먹은 지렁이는 다른 개체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섰다.

'기회는 아직 있어!'

나는 구멍 밖으로 나가서 슬쩍 밖을 정찰했다. 병아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아직도 졸고 있었다.

'저놈도 그걸 아는 거야.'

아니라면 벌써 떠나지 않았을까? 지렁이가 더 있다는 걸 아니까 엉덩이 붙이고 있는 거다.

'유능한 사냥꾼은 환경과 지형지물을 이용한다고 했었어.'

누가 한 얘긴진 모르겠지만, 참 그럴듯하다.

'나한텐 이 비와 흙, 그리고 저 병아리가 있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떠올려 보자.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니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했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자 범이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와 앉았다.

'비가 엄청나게 왔었고….'

지렁이들이 땅 위로 올라왔었다.

솨아아아아아.

뭔 놈의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진 모르겠지만 장대비는 어제에 버금갈 정도로 쏟아붓고 있었다.

'오늘도 그럴 수 있다는 거야!'

머릿속이 번뜩였다.

'때가 왔을 때, 약한 놈을 노린다!'

뿌옇던 머릿속이 맑게 갠 것 같았다.

'좋아!'

구멍에서 활을 들고 기다렸다.

"…."

바닥은 점차 진창으로 변해 가고, 병아리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역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불쑥, 땅 위로 구불구불 뭔가가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지렁이였다. 언뜻 보면 어제의 착각처럼 한 마리 같지만, 역시 여러 마리임이 분명했다.

'이놈들! 비가 오면 땅속에서 버틸 수 없는 건가?'

확실하진 않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약한 놈도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내렸다. 저 큰 병아리의 노란색도 비에 가려 회색으로 보였다.

'어디냐.'

내가 숨죽이며 활을 겨냥하고 있을 때였다.

푸드득!

병아리가 깨어났다.

삐아아악!

그러더니 기쁜 듯 곧장 사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놈도 지렁이 사냥에 나선 것이다.

'먹고 자더니 또 먹는 거냐….'

구불구불. 모습을 드러냈던 지렁이들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땅속으로 숨었다가 멀찌감치에서 다시 솟구친다.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병아리가 날뛰어 줄수록 내겐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다. 놈들의 강력한 피부는 내 화살조차 뚫지 못하지만, 저 병아리는 꿀꺽 삼켜 버리니 지렁이에겐 최악의 천적이라 할 수 있겠다.

'부리가 얼마나 단단하면 저걸 뚫냐….'

위장은 또 어떻고? 저 딱딱한 걸 지렁이라 불러야 하는 거 자체가 난센스다.

'힘도 나보단 쎄니까 되는 거겠지.'

그동안 힘엔 꽤 자부했는데, 병아리만도 못하다는 게 기가 막힌다.

'쳇, 비교할 걸 비교하자.'

부러워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은 화살이 박힐 약한 지렁이를 찾는 것뿐이었다.

'저놈?'

사방을 주시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위를 놓았다.

피잉-!

빗속을 뚫고 날아가는 화살에서 특별한 효과가 나타났다.

【물과 바람을 무시합니다.】

'작살!'

원래는 바람만 무시하던 화살이 이제는 작살 스킬 덕분에 비까지 무력화하며 날았다.

【추가 타격 효과가 발동합니다.】

거기에 인내 효과까지!

퍼억-!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맛이 났다.

'박혔다!'

이렇게 기쁠 때가!

하마터면 와아! 소리칠 뻔했다. 그러나 환희도 잠시였다. 화살에 박힌 지렁이는 스르륵 땅속으로 들어갔다.

"모야…."

나름 필살의 한 방이었는데, 허무하다. 그러다 퍼뜩 생각났다. 지렁이는 잘 안 죽는다는 걸. 밟거나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말리거나 하면 죽겠지만, 놈의 몸에 급소란 게 있던가?

"젠장…."

저쪽을 보니 병아리는 어느새 지렁이 한 마리를 물고 후다다닥! 뛰어가고 있었다.

"…?"

갑자기 왜 저래? 생각하는데, 불길한 소리가 저쪽에서부터 났다.

콰아아아아아아.

무언가 거대한 것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

지렁이고 뭐고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범이에게 외쳤다.

"범아아아!"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커스텀!"

보통의 오토바이라면 바퀴가 흙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겠지만 범이는 외형만 그렇게 보이는 거다.

슈우우우웅!

나를 태운 오토바이가 날아올랐다.

'어디로?'

생각과 동시에 커다란 꽁무니가 보였다. 나는 경험과 정보가 없었지만, 저 녀석은 여기 산다.

따를 수밖에 없단 거다.

"빨리! 더 빨리!"

범이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병아리와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나는 어제 본 또 하나가 생각났다.

'아?'

홍수처럼 거대하고 도도하게 흐르던 흙탕물. 병아리는 그때 없었다.

'물?'

그랬다. 물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해일처럼 저쪽에서부터 덮쳐 오는 거대한 물은 세상을 다 쓸어 버릴 것 같았다. 병아리는 이미 멀찌감치 도망쳤고,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커스텀 해제!"

외치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드링크를 하나 꺼내 마셨다. 나머지 반은 범이의 주둥이에 쑤셔 박았다.

뀨우?

그리곤 녀석의 몸을 꼬옥 안았다.

바로 그 순간, 내 몸이 옆으로 후욱-! 떠밀렸다.

"흐으으읍-!"

【15분간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 어쩐지 이런 드링크를 그냥 줄 리가. 근데 숨을 참는 것과 홍수에 쓸려 나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크윽! 빠져나갈 수가 없어!'

물살이 얼마나 빠른지 폭포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숨을 참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흙탕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와서 단박에 의식을 잃었을 거다. 나는 이 와중에도 범이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리곤 내 목숨처럼 가방을 끌어안고 버텼다.

'어지러워!'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물속에 처박히기도 하고, 다시 수면에 떠오르기도 하면서 대자연의 흐름에 함께했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큰 깨달음을 얻어 각성하기도 하던데 그건 영화니까 그런가 보다. 난 그냥 죽을 맛이었다.

'나가면 수영을 배우자.'

근데 이 정도 상황이면 수영이 쓸모가 있을까? 모르겠다. 그냥 정신을 유지하려고 아무거나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쓸려 온 걸까?

이래선 베이스캠프를 찾을 수나 있을까?

지렁이는 어디를 쏴야 죽지?

와중에 머릿속에 지렁이가 떠오른다.

그러던 중, 퍼억.

목이 옆으로 꺾였다.

'으윽!'

뭐에 맞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질 모르겠다.

'아, 안 되는데….'

갑자기 기절하면 비명도 못 지른다.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

.

.

팀장이 급히 병원 로비로 달려갔다.

"헉! 헉!"

평소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그였는데, 이렇게 다급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경찰입니다! 701호 어디로 갑니까?"

그의 얼굴을 본 간호사가 서둘러 알려 주었다.

"저기 오른쪽 돌아서 첫 번째 엘리베이터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팀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다행히 1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를 바로 잡아타고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그가 지금 얼마나 급한지 누가 봐도 알 것이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701호로 전력 질주한 그가 병실로 들어섰다.

"야! 우진아!"

병실엔 이미 다른 형사가 있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우진이는?"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감우성 형사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보시고… 설명드리겠습니다."

화질이 좋지 않은 CCTV는 한강을 비추고 있었다.

'굴다리?'

초입을 비추는 CCTV에 조우진 형사가 들어서고 있었다. 조우진 형사가 뭘 발견했는지 손을 뻗으며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화면이 바뀌었다.

굴다리 내부를 비추는 화면에서 조우진 형사가 뭔가의 뒤를 따라 뛰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CCTV가 비추는 화면 끝자락에서 조우진 형사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형체는 작은 소녀였다.

"용의자는 중학생 정도로 보입니다."

"중학생이 이랬다고?"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조우진 형사의 몸에서 나타난 자상들도 흉기라기보다는…."

"뭔데?"

"의사 소견으론 손톱 같다고 합니다. 그게 배를 쑤신 것 같다고…."

"뭐?"

조우진 형사는 날카로운 뭔가에 복부가 찔려 병원에 이송되었다.

"저 용의자는? 신원은?"

"그게…."

이 CCTV가 소녀를 포착한 단 하나의 단서였다. 귀신이 곡한 노릇처럼 조우진 형사를 공격했던 소녀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인근에서 용의자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근에서 노숙을 하는 것 같았답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고 행색도 더러웠는데 미친 것 같다는 목격자도 있었습니다."

"가출 청소년 명단하고 대조해 봤어?"

"하는 중입니다."

"…."

요즘 하도 이상한 일이 많아서 머리가 띵하다. 한강에서 발견된 커다란 개구리 몸속에서 실종된 남자의 뼛조각이 나오질 않나…. 뭣도 모르고 삼켰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어쨌든 실종된 남자의 전자 발찌도 함께 나왔으니 그 남자가 죽었다는 건 변함없었다. 그래서 조우진 형사도 한강을 탐문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니. 적어도 경기권 내에서 한강 근처에 유독성 오·폐수를 버리는 업체는 없었어."

쥐에, 개구리에, 베스까지. 비정상적으로 자란 생물들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

조우진 형사를 내려다보며 팀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톱이라고? 말도 안 돼!'

CCTV를 보면 용의자는 무척 말랐고 키도 작았다. 그런데 성인 남성의 배를 손으로 뚫었다고? 게다가 조우진은 그냥 성인 남자도 아니다. 강력반 형사다.

'다른 흉기가 있었을 거야.'

작은 체구의 소녀였을 테니까 조우진은 경계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이 가설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자 힘으로 저 정도의 상처를 내려면 힘이 꽤 돼야 할 테니까.

그럼 별생각 없이 다가갔다가 습격당했다?

'그런데 왜?'

이게 참 이상했다.

가출한 청소년들이 경찰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공격한다? 발견이 조금만 늦었으면 조우진은 죽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용의자를 찾아. 서울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야 돼."

"그래야죠. 저도 화납니다. 요즘 애들이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촉법은 아니겠죠?"

너무도 작은 체구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촉법이라도 무조건 잡아야지. 한강 따라 멀리 이동해서 도심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까 주차된 차 블박도 다 협조받아. 공중화장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경들 투입하고."

"알겠습니다."

분노해서 지시를 내리던 팀장은 문득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다시 줘 봐."

감우성 형사가 CCTV를 재생시켜 건네주자 팀장이 화면을 가까이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었는데, 이상한 게 떠올랐다.

"여기! 이거!"

"네?"

"봐! 여기! 뭐 같아?"

팀장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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