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지렁이다!
그 지렁이!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으로 삽을 꽉 잡곤, 놈의 하얀 몸통을 향해 내리찍었다.
하지만 역시나 까앙-!
"허업…."
반탄력에 넘어질 뻔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어이가 없어 삽을 버리고, 활을 들었다. 지렁이는 내가 삽으로 때렸는데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건 다를 거다.'
활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인내' 스킬이 추가 타격을 꽤 모아 뒀을 거다.
"불 기름."
혹시 몰라서 강철 촉에 불까지 붙였다.
주욱. 시위가 늘어났다.
과녁이 코앞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기에 최대한 가까이에서 쐈다.
피잉!
그러나 티익.
지렁이 몸통 표면에서 미끄러진 화살은 뒤쪽 흙더미에 파묻혔다.
"…!?"
도대체 왜?
'다시!'
핏핏핏핏핏!
나는 미친 사람처럼 활을 쐈다.
그러다가 활을 던져 버렸다.
"이이이익!"
나는 다시 삽을 들고,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하지만 역시나 까앙!
"크흑!"
뒤로 넘어지면서 이를 악물었는데, 지렁이 몸통이 그제야 스르륵 움직였다.
"아, 안 돼!"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흙 속으로 사라진 지렁이였다. 그 말은 즉 다시 땅을 파야 한다는 거다.
"와… 환장하겠네."
땅을 파서 놈을 찾아도 공격 방법이 없었다. 삽도 안 돼, 활도 안 돼, 뭘 어쩌라는 건지! 힘+3은 대체 어디 간 거냐?
"뭐냐고! 어쩌라고!"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악을 썼다. 어차피 곧 일어나서 땅을 파고 있겠지만 이렇게 소리라도 질러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
"하아… 하아…."
내가 판 구덩이 속에서 이렇게 누워 하늘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안락하긴 하다.
규웅.
범이가 내 얼굴을 혀로 핥았다. 기운 내라는 것 같았다.
"후, 그래. 배고파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막 일어나려는데, 이상한 그림자가 구덩이 위로 훅! 지나갔다.
"…?!"
위기감에 범이를 끌어안고 녀석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몸을 움츠렸다.
'뭐가 있어?'
풀뿌리 하나 없는 이곳에 지렁이 말고 다른 게 있었던가?
'구름은 아니야.'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리가 들렸다.
파파파파파파팟!
질퍽한 흙 위를 경박스럽게 뛰어가는 어떤 것의 소리였는데, 얇은 나뭇가지로 젖은 땅을 빠르게 때리면 나는 그런 것과 비슷했다.
"…조용히 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범이에게 말해 준 뒤 나는 조금씩 구덩이를 올라갔다.
그리곤 봤다.
"…크헙…."
노란색 덩어리?
아니… 노란색 동산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거다. 내 눈높이에서부터 보자면 정글에서 본 굵은 나무처럼 쭉 뻗은 두 개의 다리가 몸통을 지탱하고 있었고, 얼추 10미터쯤 올라가면 복슬복슬하고 탐스럽고 귀여운 노란색 엉덩이가 보인다.
그 동그란 엉덩이를 따라 양옆으로 가면 제 기능을 전혀 못 할 것 같은 작은 날개가 있었고, 동그란 몸통을 반쯤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동그란 머리가 달려 있었다.
'오리? 아니야, 병아린가?'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저 병아리가 내가 정글에서 만난 거대 원숭이보다도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귀여워서 현실감이 전혀 없잖아!'
마치 영화관에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귀여운 건 왜인가?
'끄응….'
하지만 범이는 거대한 크기에 무서운지 가방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저 크기를 보면 누구라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찰팍, 찰팍!
병아리의 발가락 세 개는 흙에 빠지지 않게 버텨 주었다. 녀석은 뭘 찾는지 주변을 빠르게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멈추더니 퍼덕퍼덕 뛰었다. 그러더니 부리로 땅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설마?'
그 설마가 맞나 보다.
땅을 파던 병아리가 원하는 걸 못 찾았는지 옆쪽으로 가서 또 파 댄다.
'저 녀석, 지렁이를 찾는 건가?'
여기 지렁이 말고, 또 뭐가 있나?
'잘하면 어부지리로 미션을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막타 친다고 하던가? 병아리가 지렁이를 끌어내면 내가 어떻게든 지렁이한테 한 발 먹인다. 그런 뒤 병아리가 지렁이를 잡아먹으면 미션 완료!
이게 될까?
나는 조금 더 올라갔다.
저 거대한 병아리 눈엔 내가 개미 똥구멍보다도 보잘것없이 보일 거다. 50미터짜리 지렁이를 기대하고 왔는데, 나 따위가 보이기나 할까?
'지렁이와 병아리. 이게 여기 생태계였냐….'
어떤 자식 머리에서 나온진 모르겠지만, 지렁이 하나만 있었을 때보다는 희망이 보이긴 했다.
'한강 괴물 3종 세트는 저 녀석에 비하면 애교였네.'
병아리는 계속해서 부리로 땅을 헤집었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까 녀석 부리가 휘휘 저으면 내가 몇십 번에 걸쳐서 삽질하는 것보다 더 깊은 자국이 생겼다.
파닥파닥!
병아리가 계속해서 주변을 뛰어다니며 땅을 뒤졌다. 하지만 좀처럼 지렁이는 나오지 않았는데, 병아리의 등장에 더 깊이 숨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삽으로 때릴 때는 꿈쩍도 안 하던 게….'
난 여기서 병아리만도 못한 존재였던 거냐. 무력함에 치를 떨고 있는데, 병아리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머리가 앞으로 홱 고꾸라져서 숨을 쉴 때마다 들썩거렸다.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황토밭에서 오갈 데도 없었다.
꼬록.
배에서 신호가 왔다. 더 굶주렸다간 기력이 떨어지고 탈수까지 올지도 몰랐다. 어제 빗물을 좀 받아 마셨기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사람은 물 없인 살 수 없다.
'아, 미치겠네.'
나는 슬금슬금 물러나서 내가 파 놓은 구덩이로 들어왔다. 숨을 곳은 여기밖에 없었기도 했고, 다른 구덩이를 처음부터 다시 파자니, 눈앞이 아찔했다.
'놀면 뭐 해.'
지렁이 몸통이 단단하긴 했지만, 모든 부위가 그렇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놈에게도 약점이 있지 않을까? 그 약점을 찾으려면 일단 놈을 찾아야 했다.
'단단하긴 해도 공격력은 없을 수도 있어. 지렁이잖아.'
지렁인 땅을 파먹고 사는 생물이다.
'설마, 나를 먹진 않겠지?'
놈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것도 완전히 재배할 순 없었지만,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안 담그기엔 내가 너무 촉박했다.
푸욱.
푹!
다시 땅을 팠다.
아래로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할진 모르겠지만 깊이, 더 깊이 내려가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우…. 허리야…."
잠깐 쉬려고 상체를 들었다. 구덩이 위를 봤는데 우물에 빠진 것처럼 위가 까마득했다.
'저기에서 흙을 덮어 버리면 여기가 내 무덤인 거냐….'
괜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나름, 운동도 열심히 했고 정글에서도 살아남은 강인한 정신력도 갖췄는데, 지렁이 따위에게 고전하고 있다니.
"후우…."
나는 세로로 파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괜히 동굴처럼 가로로 팠다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질식사할 거다. 단단한 돌 같은 것들이 있다면 모를까, 이런 황토에선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어제 무식할 정도로 비가 오는 걸 보지 않았나?
'파자.'
삽을 들고 또 땅을 팠다.
정말 깊이 내려왔다 생각할 때 즈음,
콰르르르릉.
저 위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주라.
이렇게 땅을 파냈는데, 또 비가 오면 내가 한 고생은 대체….
후두둑!
비웃기라도 하듯 구멍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아, ×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맥이 탁 풀려서 삽을 지팡이 삼아 잡고 벽에 등을 기댔다.
톡, 토옥.
얼굴에 떨어진 빗방울이 이리도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범아…."
규웅?
범이가 가방에서 머릴 내밀었다.
"만약 내가 잘못되면 여기서 잘 살아야 한다. 저 형들한테 개기지 말고, 쥐 죽은 듯 살아."
코스트코 건물만 한 병아리가 있는 세상이니 적응하기 쉽지 않겠지만, 너만이라도 내가 어떻게든….
그르르릉!
범이가 위를 보며 울었다.
"…?"
내가 녀석을 따라 위를 보았는데, 모골이 송연했다. 병아리가 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허억…."
이제까지 먹었던 치킨들한테 미안해졌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줄 수 없을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빤히 우릴 보다가 스윽 사라지더니 뾰족한 부리가 아래로 코옥! 쑤셔 왔다.
"흡…!"
하지만 녀석의 얼굴은 구덩이에 비하면 너무도 컸다. 부리가 반밖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래도 위압감은 굴착기가 머리 위로 내리꽂힌 수준이었다.
후두두두둑!
흙더미가 떨어졌다.
"젠장!"
놈이 얼굴을 비벼 댈수록 부리가 점차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삽을 쥐고, 벽을 파기 시작했다. 흙에 깔려 죽든 저 부리에 죽든 이젠 뒤가 없었다.
퍼버버버버벅!
워낙 황당한 세상이라 내 힘이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힘+3과 근력+1이 더해진 내 삽질은 인간계 최강일 것이다. 무엇보다 삽도 튼튼해서 내 힘을 고스란히 받고도 부러지지 않았으니, 쾌속 질주!
콱! 콱콱콱! 콰악!
그렇게 한참을 파들어 가던 삽이 뭔가에 막혔을 때, 나는 직감했다.
이 반탄력! 아까도 맛봤던 거다.
까앙-!
"아욱…."
손목이 떨어질 것 같은 고통은 필수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마침내 지렁이를 발견한 거다.
역시나 흠집조차 나지 않은 지렁이 몸통을 보면서 나는 놈의 몸을 따라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가 뿌리 옆의 흙을 살살 치우는 것처럼 삽으로 걷어 냈다.
부욱, 부부부부붓!
더 깊이 들어온 부리가 구멍을 휘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멀찌감치 와 있었다.
크으으응!
콧바람을 씩씩거린 병아리 부리가 위로 쑤욱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구멍으로 물이 차기 시작했는데, 아직 내가 있는 곳까진 닿지 않았지만, 어제처럼 비가 온다면 삽시간에 차오를 거다.
'물은 괜찮아. 여차하면 쓸 수 있는 드링크가 있으니까. 흙이 덮이지만 않으면 돼.'
위엔 병아리가, 아래엔 자연이 도사리고 있다. 이걸 해결할 방법은 이 지렁이를 죽이는 것밖에 없었는데, 공격이 통하질 않으니 환장하겠다.
'어쩌지?'
그렇게 고민하는데,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쑤우우우우욱!
지렁이 몸이 위로 솟구치기 시작한 거다. 그건 항거할 수 없는 너무도 강력한 힘이었고, 지렁이도 놀랐는지 사정없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크윽?"
지렁이 몸을 붙잡고 있다가 미끄러워서 놓치고 말았다. 지렁이가 빠져나간 구멍을 따라 길이 나 있어서 빠르게 네발로 기어서 그 구멍을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보았다.
"아…."
병아리 부리에 지렁이 몸통 끝부분이 물려 있는 걸! 결국 병아리가 지렁이를 찾아 밖으로 끄집어낸 거다.
파닥, 파다닥!
기쁜지 허공에 발길질을 해 대던 병아리가 고갤 들더니 지렁이를 통째로 삼켰다.
"아, 안 돼!"
꿀꺽, 꿀꺽!
저 큰 지렁이가 순식간에 병아리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보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꺼억-!
병아리는 트림까지 하더니 만족한 듯 삐약! 울다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또 꾸벅꾸벅 졸았다.
"…."
내 토룡이…!
박탈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범이가 뒤로 뛰어내렸다.
"…야!"
어디 가냐며 돌아섰다.
내가 막 나왔던 구멍이 보였다.
"…!?"
그리곤 그 구멍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빛을 봤다.
'하, 한 마리가 아니었어?'
스르르륵.
움직이는 지렁이의 몸통은 아까보단 상당히 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