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기다리던 지력+3이 뜬 것까진 좋았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을 모두 소모하셨습니다.】
【10분 후 미션이 시작합니다. 준비하세요.】
"범아…."
녀석을 부르는데, 눈물이 핑- 했다.
1,000시간.
하루가 24시간이니까 열흘이면 240시간이고, 한 달이면 960시간쯤 되려나?
그래, 나는 한 달을 도전했다.
철봉을 하도 돌았더니 손바닥은 몇 번이나 벗겨져서 진물도 아닌 피가 철철 흘렀었고, 얼마 남지도 않은 포인트는 먹을 거 사는 데 다 썼다.
【9분 후 미션이 시작됩니다.】
"알았다고…. 하아…."
내가 받은 미션은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린 다음 1분을 버티는 거였다. 이게 말이 쉽지, 힘만 좋아서 될 것도 아니고, 균형 감각을 포함해서 세상이 짓누르는 중력까지 온전히 받아 내야 하는 거다.
처음엔 요령을 못 찾아서 반동으로 빙글 돌다가 멈추려고 시간 참 많이 까먹었었더랬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두 손으로 철봉 딱 잡고 매달려서 일단 올라간 다음 팔심으로 버티며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했다.
아니, 말이 쉽지! 이게 쉽냐고?
【8분 후 미션이 시작됩니다.】
한 달간 오피스텔에 갇혀 있던 범이도 어깨가 축 늘어진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녀석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맘,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7분 후 미션이 시작됩니다.】
내 개인 사물함인 벽장을 열어 장비를 주섬주섬 착용했다. 군대 가면 관물대 물건을 빠르게 싸는 걸 배운다. 그 경험이 아니더라도 이제 나는 활이나 활 통, 드링크 같은 것들을 매우 숙련된 솜씨로 담을 수 있었다.
딱 5분 걸렸다.
【2분 후 미션이 시작됩니다.】
2층 계단을 올랐다.
"후우우우웁. 파아아아아아아."
그래,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답도 안 나오는데 머리라도 식하고 온다고 생각하자. 피 같은 1,000시간을 그냥 날려 버린 건 황당하지만, 현 상태론 안 되는 건 때려죽여도 안 되는 거다.
'내가 운동에 소질이 없나?'
문득 그런 생각을 할 때, 문이 열렸다.
【안전 구역에서는 대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피라미드에서 주운 '마스터키'로 재능마켓 문을 열고 탈출하려고도 해 봤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는 거다.
'여긴 땅굴인가?'
그나마 환경이 바뀌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베이스캠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중요한 정보가 되는 만큼 나는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허름한 나무 상자가 하나 있었다. 내가 다가가 열자 범이도 궁금한지 쪼르르 쫓아와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삽: 부러지지 않는다. 판매 불가.】
"…."
아아, 삽이냐.
"삽이네."
상자 속 물건은 이게 다였다.
"삽이야…."
괜히 불길했다.
전에 차라리 '삽이라도 주고….' 어쩌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저주로 돌아온 건가?
규웅?
범이가 나를 보며 왜 그러냐는 듯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야. 그냥 불안해서 그래. 별거 아닐 거야. 하하!"
군대에 다녀온 사람은 삽만 보면 괜히 움찔하고 그런다. 그래서일 거다.
"후우! 아자! 가 보자!"
당당하게 삽을 움켜쥐고 밖을 향해 걸었다. 일부러 심호흡을 하고 기합도 내질렀다. 그런데 밖이 가까워질 무렵 어떤 소리가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솨아아아아아아.
'빗소리?'
땅도 질척거리는 듯했다.
'어?'
진짜 비였다.
장대비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처럼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황토가 물과 함께 뒤섞여서 콰콰콰콰콰-! 소리까지 내면서 쓸려 내려간다. 미션이고 뭐고 한 발 앞으로 내딛기도 힘들 것 같은 곳. 여기서 뭘 하라는 거냐?
【미션: 토룡을 사냥하라!】
"…."
뭐라고?
끄으으응.
범이도 두려운지 꼬리를 말았다. 이런 대자연 앞에서 내가 따낸 힘+3쯤은 껌딱지 정도의 접착력조차 없이 쓸려 나갈 것이다.
"환장하겠네…."
그렇게 멍하니 제대로 홍수가 난 주변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뭔가 들썩거렸다. 그건 이런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온통 황토물 세상인데 혼자 새하얀 몸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얼…."
컸다. 그리고 길었다.
"저, 저게… 토룡?"
토룡은 길이 50미터에 몸통은 30년 된 나무처럼 굵은 지렁이였다.
"…거짓말이지? 하하하…."
삽 한 자루 주고, 저걸 잡으라고?
50미터도 눈짐작일 뿐이지 땅 아래, 놈의 몸통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다 나오지도 않았으니 더 길 수도 있다.
"이건 아니잖아…."
콰아아아아아!
빗물에 쓸리는 흙더미에서 지렁이는 마치 춤을 추듯 발광해 대고 있었고, 나는 그런 놈을 바라보면서 쪼그려 앉아 비가 멎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
.
.
선부용역은 4년 전부터 화곡동 인근에 자리 잡았다. 용역은 주로 거친 일을 하고, 일자리 알선도 하면서 밤 유흥 문화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한마디로 돈 되는 일은 다 한다고 보면 됐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부용역의 상승세는 놀라웠다. 첫해에 화곡동 토박이 용역을 누르더니 이듬해 사업을 확장해서 닥치는 대로 일감을 수주했다.
직원만 180명에 5층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데, 소문엔 조폭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선부용역 5층 대표 이사실.
"영배야."
"네, 대표님."
두 사람이 위스키를 가운데 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여기온 지 얼마나 됐냐?"
30대 후반의 남자는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고, 영배라 불린 사내는 가죽 재킷 차림이었다. 영배는 선부용역의 행동 대장이자 핵심 인물이었는데, 지난 4년간 그가 이기지 못한 싸움이 없었다고 전해졌다.
"4년 됐습니다, 대표님."
"4년이라…. 벌써 그렇게 됐나?"
대표는 아련한 눈빛으로 위스키가 든 잔을 바라보다가 훌쩍 들이켰다. 아무리 독주라고 해도 그에겐 별 감흥이 없었다. 이런 술, 아무리 마셔 봐야 그는 취하지도 않았다.
"대표님, 또 그분 생각하십니까?"
"나는 말이다, 영배야. 아무리 돈이면 다 된다고 해도 내가 취했던 힘에 대한 빈자리를 잊을 수가 없구나."
"대표님… 이곳에선 그런 힘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도 대표님은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겠지. 그건 네 말이 맞을 거다. 하지만 손에 쥐었던 걸 빼앗겼을 때의 그 허탈함을 잊을 수가 없는 거야. 너도 그렇지 않나?"
"저는 애초에 비루했던 놈이라 지금의 삶에 만족합니다."
용역 간판을 내밀곤 있지만, 선부용역은 조직폭력배나 다름없었다. 사업 초기엔 인근 조직을 흡수하느라 매일같이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영배는 그 어떤 폭력에도 지지 않았다. 그러니 만족할 수밖에.
"그래, 너는 그렇겠지. 그럴 거다."
"대표님, 앞으로 5년이면 서울을 넘어 전국 조직을 다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남부럽지 않게 되실 텐데,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미련이라."
대표가 웃었다.
"미련인가…."
보잘것없던 영배가 강서구 최대 조직의 행동 대장으로 거듭났다. 그러면 대표의 힘은 얼마나 강할까? 하지만 그는 이 힘이 과거에 비하면 반쪽짜리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피로 계승되는 '혈족' 권능을 전혀 쓸 수 없었는데, 그건 그분이 이쪽으로 오시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힘이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여기선 권능이 아니라 권력이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시고요."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약해 빠졌으니까. 시간을 들이면 이 나라쯤 집어삼키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통치하고 싶은 게 아니야. 완전 종속,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은 거야."
"제가 있지 않습니까, 대표님."
"감히 너 하나가 나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아니다. 영배야,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안다. 갈증이 심할 텐데 참아 주는 것도 대견하고."
잔에 위스키가 콸콸 들어찼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목이 자꾸만 바짝 마르는 기분. 이건 죽을 때까지 가시지 않을지도 몰랐다.
"혹시 새로운 소식은 없는 거지?"
"네, 대표님. 백방으로 알아보곤 있지만…."
그분을 이쪽으로 모셔 오고 싶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영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뭐? 알았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언론에 퍼지기 전에 사건 기록하고 목격자 진술 떠 놓은 거 넘겨!"
흥분한 영배가 전활 끊고 말했다.
"대표님!"
"무슨 일이냐?"
"한강에서 괴물의 시체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사람을 공격했다고도 하고요. 한 놈 배 속에선 사람이 통째로 소화된 흔적이 있답니다!"
"그래?"
"이 세계엔 없는 것들이 확실합니다!"
식인 쥐, 낚시꾼을 공격하는 물고기, 사람을 잡아먹는 개구리? 대표에겐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 세상엔 없는 사건이었다.
"이제 문이 열리나…."
그러면 그분이 오실 수도 있다.
대표가 감정이 격해졌는지 위스키 잔을 살짝 떨자 영배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백작님!"
대표가 아닌 백작이라고 부른 영배. 그 뜻을 알기에 대표도 잔을 부딪치며 기대의 미소를 지었다.
.
.
.
비는 멈췄는데, 땅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시야에 보이는 건 죄다 황토뿐이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동네가 나무도, 돌도,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을까?
처억.
삽을 바닥에 꽂으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미션도 레어가 아닌데, 백작이란 놈은 얼마나 강하길래 그러냐."
지금도 문제인데, 다음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백작 미션도 여기서 살아 나가야 할 수 있는 거다.
"백작이고 나발이고, 토룡부터 잡아야지."
나는 황량한 땅을 바라보면서 하하! 웃었다. 황당해서 그런다, 황당해서!
"파자! 파!"
아까 왕 지렁이가 있었던 곳 위에서 삽을 들고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푸욱. 크게 뜨면 황토라 그런지 설사 똥처럼 한 더미가 푸짐하게 올라온다. 그 무게가 상당했지만, 힘+3은 과감한 삽질과 기계적인 루틴을 반복하게 했다.
푸욱!
뜬 흙을 뒤쪽으로 휘익! 던진다. 범이도 나를 지켜보다가 옆으로 와서 바바박! 땅을 팠는데, 곧 앞발이 황토투성이로 변하자 기겁하며 저쪽으로 가서 발을 털어 댔다.
'지렁이니까 공격력은 별거 없을 거야.'
놈이 진짜 용이었다면 이 미션도 레어 등급은 됐을 거다. 그게 아니란 건 이전 미션들처럼 해결책이 존재할 거란 것이고, 이 삽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 삽, 생각보다 괜찮아.'
이런 힘으로 산더미처럼 흙을 떠서 퍼내는데, 자루가 부러지거나 날이 휘지도 않는다.
'이런 물건을 준 이유가 있겠지.'
삽질을 하다가 내가 직면한 문제를 떠올렸다.
1. 식량이 없다. 가방 속 음식은 철봉 하느라 다 썼다.
2. 주변엔 눈 씻고 찾아봐도 먹을 게 없었다. 현지 조달이 안 된다는 거다.
이 두 가지 때문에라도 나는 최대한 빨리 지렁이를 사냥하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팍팍팍팍!
그래서 삽질을 더 가혹하게 해 댔다.
군대에서 매복 진지를 파 본 사람이라면,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 거다. 근데 여긴 더 심하다. 돌부리는 없지만, 흙을 파면 옆에서 흙이 또 흘러내렸다.
해결책?
없다.
'그냥 ×나게 파는 거지!'
그렇게 2시간쯤 팠을까?
내 주위로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깊이도 얼추 10미터는 될 거다. 흙을 퍼서 둘 곳이 없어서 위에까지 올라가서 버리고 와야 했다.
그런데 이때!
까앙-!
삽이 뭔가에 맞고 튕겼다.
"크윽."
반탄력에 손이 저릿저릿했다.
깊이 파고들어 가니까 돌이 나온 건가? 생각하면서 밑을 봤다가 그대로 몸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