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68화 (68/277)

#068화

"무작정 덤비지 마."

범이가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뀨웅?

…못 알아들었구나.

그래, 표정만 봐도 알겠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만져 준 뒤 뛰었다. 그러면서 EMP에 대해 떠올렸다.

'8시간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별도의 장치가 없는 걸 보면 자연히 충전된다는 건가? 써 보면 알게 되겠지.'

그래도 레어씩이나 되는 물건인데, 허접하진 않을 거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무 붙진 말자.'

통로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속도를 늦췄다.

-끼끼끼!

소리는 홀에서 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걸 보면 계단 어딘가에 있거나 다른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다.

'어디냐.'

벽에 바짝 붙어서 계단을 꼼꼼히 살폈다. 일주일 동안 방귀 소리도 감추던 녀석이었는데, 이젠 나를 도발하기라도 하듯 계속 울어 대고 있었다.

후욱 훑고 보니 계단엔 없었다.

'저 아래쯤 어딘가에 있는 건가?'

통로로 짐작되는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기둥을 기어오르고 있는 은빛 물체.

그것이 등에 멘 망토가 펄럭거렸다.

그르르릉!

범이도 긴장했다.

'이런! 저기 숨어 있었나?'

녀석은 기둥에 매달려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길!"

나는 뒤로 물러서며 활 대신 다른 물건을 들었다.

'어떻게 쓰는 거지?'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EMP의 성능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스터키와 똑같이 생겼고,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

'이걸 누르는 거겠지?'

그런데 어디가 앞인지 모르겠다. 잘못하면 내가 맞는다. 나는 기계가 아니니까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정통으로 맞아서 좋을 건 없을 것 같다.

'이쪽인가?'

이 순간에도 원숭이 왕은 무서운 속도로 기둥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막대를 뻗었다. 그러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출력을 설정하세요.】

【범위를 지정하세요.】

버튼을 누르자 연달아 날아든 메시지에 나는 그냥 외쳤다. 원숭이 왕이 기둥에서 이쪽을 향해 훌쩍 뛰었기 때문이다.

"몰라! 쏴! 최대로!"

【최대 범위, 최대 출력으로 설정되었습니다.】

후우우웅.

막대 끝에 푸른빛이 모였다.

그리곤 터졌다.

"어허억!"

내 몸이 뒤로 후욱 밀려났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막대 주변으로 화악 퍼져 나갔는데, 일순간 벽과 천장의 전등을 포함한 기둥의 빛까지 모조리 암전되었다.

-끼이이이이익?

나도 놀랐지만, 더 놀란 건 원숭이 왕이었다.

-끼이이이이잇!

원숭이 왕은 이쪽으로 날아오다가 갑자기 벌거벗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계단 난간을 붙잡아 보려고 사지를 뻗었지만, 녀석을 반기는 건 중력뿐이었다.

"아아…?"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끼아아아아아아…!

혹시나 한 건데, 정말 그게 기계였나 보다. 이렇게 잘 먹혀들다니, 내가 해 놓고도 어안이 벙벙하다.

"…."

EMP 막대를 보니 파랗게 빛나던 버튼이 빨갛게 바뀌어 있었다.

【충전 중입니다.】

'이런 보물이 있나!'

감동은 나중에 하고, 떨어진 원숭이를 찾아야 했다.

"범아!"

【커스텀을 변경합니다.】

범이의 모습이 오토바이로 변했을 때였다.

【축하합니다!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허억? 뭐?"

【원숭이 왕을 사냥했습니다. 회수된 아이템은 재능마켓에서 확인하세요.】

【재능마켓 체류 시간 1,000시간을 획득했습니다.】

【사냥꾼 호칭이 '원숭이 사냥꾼'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원숭이는 본능적으로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태어나서 가장 운 좋은 날이 바로 오늘이 아닐까?

'떨어져 죽은 거냐?'

원숭이도 나무에서 종종 떨어진다지만 이 높이에서 추락했으니 죽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믿기지 않는 건, 그간 녀석과 숨바꼭질을 했던 고된 세월이 뇌리를 스쳐 가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저 아래에서 거대 원숭이의 포효가 들려왔다.

'이크!'

게다가 피라미드 전체가 드드드드드드! 진동하기 시작했다. EMP 때문에 기둥의 빛이 꺼져서인지 아니면 원숭이 왕이 죽어서 어떤 변화가 생긴 건진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불쑥 든 생각은 하나였다.

'무너진다!'

나가야 했다.

"달려! 범아!"

홀이 아닌 통로를 향해 오토바이가 질주했다.

흐드드드득!

그으으으으으윽!

뭔가 부서지고 뒤틀리는 소리가 무섭게 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까 내가 있던 자리에 천장이 내려앉았다.

"더 빨리!"

전속력으로 달리던 오토바이가 마침내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오랜만에 본 하늘이었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상쾌한 공기가 폐로 한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이걸 즐길 틈은 없었다. 피라미드 외벽을 따라 오토바이가 미친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끼끼끼끼끼끼!

저쪽 아래를 보니 원숭이들 역시 피라미드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도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 포효했다. 그런데 계속 보아 왔던 일사불란한 어떤 모습이 없다. 사방으로 그냥 흩어진다.

'왕의 지배에서 벗어난 건가?'

모르겠다. 이젠 관심도 없다. 미션을 끝냈으니까 나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했다.

와르르르르르!

쾅! 콰앙!

물론 여기서 살아남는 게 먼저다.

"으아아아아아아!"

가운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피라미드는 점차 붕괴 범위를 넓히고 있었고, 그게 그림자처럼 우리 뒤를 바짝 따랐다.

"달려어어어어어!"

거의 끝까지 내려왔을 때, 오토바이는 돌출된 돌을 밟고 훌쩍 날아올랐다.

"히이익!"

【커스텀 변경.】

허공으로 붕 뜬 내 옷을 범이가 물었다. 그러더니 몸을 쭉 펴서 앞발을 뻗었다.

녀석의 발끝이 나뭇가지를 잡았다.

후두둑!

영락없이 부러졌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긴 했다.

쿠웅!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는 내 코트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는데 등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지만, 다행히 어디 하나 부러진 곳은 없었다.

【수호자의 코트가 낙상 대미지를 줄였습니다.】

【방어력 5가 대미지를 감소시켰습니다.】

【물리적 타격이 감소했습니다.】

범이는 표범의 유연함으로 알아서 낙법을 했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치곤 괜찮은 결말이었다.

하지만 낙관할 때가 아니다. 더 멀리 떨어져야 했다. 완전히 무너지는 피라미드에서 흙먼지가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범이와 함께 숲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저건 뭐였을까?'

원숭이들은 이 근처에 살던 놈이었을지도 모른다. 녹색 액체를 맛본 녀석들이 자릴 잡은 것일 수도 있다. 이건 내 직감인데, 원숭이들이 모든 방의 기계를 파괴한 건 아닐 거다. 그럴 지능도,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궁금한 건 거대 원숭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저 피라미드는 왜 이런 곳에서 파괴되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션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았어. 오래 걸렸을 뿐이야.'

하지만 됐다.

이제 다 끝났다.

미션을 해냈단 기쁨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은 모든 걸 잊게 했다.

"범아, 저기!"

정글에선 길을 잃기 쉽다지만, 이미 거대 원숭이가 여기까지 오면서 낸 흔적이 있었기에 그걸 따라서 뛰었다.

와삭!

땅을 구르고 있던 과일 하나를 잡아 깨물었다. 오랜만에 씹을 거리가 들어오니 입 안이 축제였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저 멀리서 거대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신 마주치지 말자.'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놈이었다.

.

.

.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것도 일주일이나 걸렸다. 거대 원숭이를 만난 지점까진 그나마 쉽게 돌아왔지만, 그 이후론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잘랐던 나무 같은 건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정글의 무서운 점이다.

그래도 돌아왔다.

'완전 거지꼴이구나.'

체감상 이 정글에서 1년은 있었던 것 같다. 원숭이 왕을 운 좋게 이겼던 것도 이제 가물가물하다.

갸르릉.

범이가 내 옷을 물고 채근했다.

"그래, 가자, 가."

일주일 동안 작은 동물만 사냥했던 게 싫었던 것 같다. 이 녀석도 어쩔 수 없는 맹수라서 사냥 본능을 깨우려면 큰 먹잇감이 필요했다.

나무로 이뤄진 캠프로 들어섰다. 눈에 익은 곳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안전 지역에선 대미지를 입지 않지만 공복도는….】

정글도를 던져 버렸다.

이미 날이 상했고, 특별한 아이템도 아니었다. 저 앞에 보이는 푸르스름한 막으로 범이와 함께 들어갔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보상을 수령하세요!】

'고오맙네, 아주.'

일단 좀 씻자. 대체 얼마나 못 씻었던 거냐.

계단을 내려갔다.

익숙한 필라테스 기구들과 아이템 진열장이 보였다.

"하아…."

집에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범이와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기 손잡이를 돌렸다.

솨아아아아아아.

떨어지는 물이 모든 걸 씻겼다.

거짓말 같던 정글 생활에서 겨우 탈출했는데, 이렇게 다시 강남 한복판에 와 있다니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바르르르르.

말끔해진 범이가 몸을 털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전처럼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서 망가진 것들이 복원되자 욕실 밖으로 나왔다.

'진짜 말도 안 된다니까.'

피로까지 날아가 버리고, 더러웠던 옷도 깨끗해지자 나는 장롱으로 걸어갔다.

이제 보상을 확인할 차례다.

손잡이를 잡고 벌컥!

【부품 745XX-83을 700포인트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부품 9462GG-91을 900포인트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부품이라니?'

아! 그때 그 방에서 챙겨온 것들을 말하는 건가?

【훼손된 부품 342TT-1002를 400포인트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와아…."

생각도 못 했던 공돈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손을 뻗었다.

늘 빛나는 돌을 잡을 때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펫 전용: 나노 갑옷(레어)

기계 문명의 정점에 있는 ×××에서 만든 전투용 갑옷. 신체 능력을 월등하게 올려 주며 방어력 또한 훌륭하다.】

"호오오오오오?"

나는 범이를 돌아보았다.

【펫에게 장착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나노 갑옷이 해당 펫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촤악-!

순식간에 범이의 몸에서 은빛 물결이 터졌다. 꼭 수은 같은 그게 순식간에 범이의 몸을 감쌌는데, 범이가 놀라서 쿠왕! 뛰어오르다가 뀨우? 얼굴을 두리번거렸다.

"오올, 멋진데?"

저 물건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내가 익히 알고 있었다. 고작 원숭이가 써도 그랬는데, 범이가 사용하면 얼마의 괴력을 낼 수 있을까?

범이는 지금도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서큐버스를 만났을 때도 녀석이 아니었다면 내가 죽었을 거다. 범이가 강해지는 건 나도 무조건 환영할 일이었다.

규우융? 끼이이잉!

녀석은 자기 앞발을 보더니 익숙하지 않은지 펄쩍펄쩍 뛰어다녔는데, 그런 범이를 뒤로하고 나는 웃으며 다시 장롱을 보았다. 다른 아이템도 확인해야 했다.

【회생 드링크 3개를 얻었습니다.】

【대체 에너지 드링크를 4개 얻었습니다.】

이것들은 그 EMP 발생기를 얻었던 방에서도 보았던 것들이었다. 이런 드링크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나였기에 이번 미션 보상이 꽤 쏠쏠하다 여기며 마지막 빛나는 돌을 집었다.

그런데….

【불 기름(유니크)을 얻었습니다.】

"유… 니크?"

이런 대박이 터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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