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66화 (66/277)

#066화

'…!'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지는 망토를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치잇. 더럽게 빨라!'

순발력만큼은 범이보다도 저놈이 월등한 것 같다. 홀 쪽으로 도주하는 놈을 따라 뛰는데, 묘하게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조용한데?'

밖에서 미쳐 날뛰던 거대 원숭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어올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건가?'

어찌 되었든, 원숭이 왕을 따라가야 했다.

'앞으로 첫 타는 더 신중해야겠어. 아까 그 위력이라면… 적이 뭐든 간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어.'

첫 타 강화(인내)는 시간을 누적할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손잡이 부분까지 기계를 뚫고 들어간 위력이라면 함부로 화살을 남발할 수 없었다.

'지금도 위력이 쌓이는 거겠지?'

맞힐 수 있을 때 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뛰었을 때,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런데….

"허얼…. 저 자식이?"

원숭이 왕이 원통 기둥에 매달려서 아래로 주르륵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저기까지 무려 20미터가 넘는데, 어떻게 저기까지 뛴 거냐?

"범아!"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범이라고 해서 저기까지 뛰는 건 무리였으니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등에 타자마자 범이가 계단을 쏜살같이 질주했다.

'이대론 뭣도 못 하겠는데?'

맹수의 등에 매달려 있는다는 건 생각보다 피로감이 상당하다.

"커스텀!"

【외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콜!"

범이의 몸이 번쩍하더니 오토바이 형태로 변했다. 물론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들썩이고 덜컹거리는 건 똑같았지만, 내겐 가장 익숙한 탈것이었고, 최소한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우끼끼끼끼!

그러나 빙빙 돌면서 내려가는 우리보다 주르륵 직선으로 떨어지는 원숭이 왕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범아! 더 빨리!"

오토바이였지만 외형만 그럴 뿐 기본적인 출력은 1범력이다. 전적으로 범이의 능력에 기인한다는 거다.

-끼끼끼!

내가 안타깝게 외치자, 원숭이 왕이 나를 보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가운데 있는 손가락만 남기고 주먹을 쥔다.

'저 새끼가?'

저런 걸 어디서 배운 거지?

-우끼끼끼끼!

"놓쳐선 안 돼! 범아!"

닦달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 넓은 피라미드에서 저놈의 꼬리를 다시 찾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최악이 우릴 찾아왔다.

쿠웅!

"…뭐?"

묵직하게 쿠웅! 때리는 소리라기보다는 빠르게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아래에서 올라왔다.

쿵쿵쿵쿵쿵쿵!

"또 뭔데?"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왜 항상 불행은 같이 오는 걸까?

-쿠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 원숭이의 얼굴이 보였다. 기둥을 타고 올라오는 거대 원숭이는 포효를 질렀고, 그런 원숭이 아래에서 작은 원숭이들이 줄줄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미친!'

어딜 갔나 했더니 안으로 들어와서 기둥을 오르고 있었다니! 저놈이 드나들 만한 거대한 통로가 어딘가에 있었던 건가?

-쿠워어어어어! 쿼어어억!

거대 원숭이가 뒷다리로 기둥을 박차더니 이쪽을 향해 뛰었다.

"피, 피해!"

무시무시한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는 거대 원숭이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갸아아앙!

오토바이를 가장한 범이가 간발의 차이로 겨우 피해 내며 계단 아래로 달렸다.

등골이 오싹했다.

저 손에 잡힌다면 범이와 나는 그대로 곤죽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카오오오오!

거대 원숭이가 우리가 있던 계단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쪽을 보며 분노한 울음을 뱉어 냈다. 그러더니 몸을 흔든다. 우릴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건 녀석과 대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선 안 돼! 저쪽으로!"

조금 전엔 운이 좋았지만 그런 행운을 두 번 기대할 순 없었다. 거대 원숭이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저건 싸우라고 있는 게 아니라 도망치라고 존재하는 트랩 같은 거다.

넘어질 듯 미끄러지던 오토바이가 가까스로 통로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끼이이이이익!

커스텀은 바퀴가 지면에 쓸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구현했다.

콰앙-!

하지만 그걸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있던 곳으로 거대 원숭이가 날아와 달라붙어서 팔을 쑤욱 집어넣었다.

"제길! 이거나 먹어라!"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상체를 뒤로 돌리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지만,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주고 활을 들었다.

투웅!

화살이 거대 원숭이의 손가락을 향해 뻗어갔다. 녀석의 손은 소가죽을 100장쯤 겹쳐 놓은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내 강철 화살촉도 저걸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내가 노린 건 어떤 지점이었다.

"가라아아아아!"

쭈욱 뻗어오는 손을 보며 비명처럼 소릴 질렀을 때!

푸우욱-!

【명중률이 상승했습니다.】

강철 촉이 놈의 손톱과 손가락 틈으로 파고들었다. 스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운도 따라 주었기에 가능한 공격!

-쿠어어어어어어어!

놈이 비명과 함께 팔을 거뒀다.

아무리 덩치 큰 사람도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면 아픈 건 똑같다.

"좋았어!"

녀석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쾌재를 부르며 통로를 질주하다가 오토바이를 틀었다.

지이이이잉.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쉬려고 온 게 아니다.

황급히 벽 쪽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가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팔을 쭉 뻗어 보았다.

'모자라.'

내부의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기에 천장까지 팔이 닿지 않았다.

나는 잔해를 모아 발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까치발을 들고 버티며 손끝을 천장에 뻗었다. 아슬아슬했지만 밸런스 볼 운동을 했던 덕분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됐어!'

차가운 감촉이 닿자마자 그것을 밀었다.

많은 방을 돌면서 눈여겨봐 둔 곳. 이건 환풍구일까? 모르겠다. 지금은 내 몸 하나 밀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게 중요했다.

훌쩍 뛰었다.

잔해가 와르르 무너졌지만, 손아귀에 턱이 잡혔다. 과거였다면 완력으로 오르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철봉의 고수다.

후욱! 몸을 띄웠다.

"범아! 어서!"

【커스텀이 변경됩니다.】

작은 표범으로 변한 범이가 쿠앙! 소리치며 뛰어올랐다. 녀석의 앞발이 손에 잡히자마자 나는 안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외쳤다.

"빨리!"

무조건 멀어져야 했다.

거대 원숭이는 못 들어오겠지만, 작은 놈들은 얼마든지 비집고 들어올 거다.

'일이 꼬였어.'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놈들에게 발각되면 작은 원숭이만 상대하면 될 거라고 여겼는데, 큰 놈까지 안으로 들어오다니!

'그래도 당황하지 마. 난 할 수 있어. 변한 건 없잖아.'

공포에 먹히면 손발이 굳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차라리 잘됐을지도 몰라. 여기라면 놈들도 나를 쉽게 찾지 못할 거야.'

시야가 무척이나 어두웠다.

내가 올라온 입구처럼 바닥에 듬성듬성 있는 곳에서 올라오는 빛이 유일했지만, 나는 계속 움직여야 했다.

'원숭이가 후각이 좋던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좁다면 숫자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범이도 있으니까 몇 놈 들어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 테고.

-우끼끼끼끼끼!

-끽끽끽!

내가 들어왔던 방에서 놈들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 빨리 이동했다.

계속 환풍구에서만 머문 게 아니라 다른 방이 나오면 그리로 내려갔다가 통로를 지나 또 다른 환풍구를 찾아 이동하면서 놈들의 추적을 따돌렸다.

'너흰 너희가 나를 사냥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그리곤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

.

도화지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청소는 내가 한다니까? 아이, 참!"

"괜찮다니까. 살살 움직이는 게 소화도 잘되고 더 좋아."

오 년이었다. 할머니의 병세는 악화만 했었다. 그런데 요즘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리 줘. 우리, 나가야 한단 말이야."

"어디?"

"병원 가기로 했잖아!"

"아, 그랬지."

물론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도 깜빡깜빡하셨다. 그런데 외투를 직접 찾아서 걸치는 저 모습만 봐도 아주 놀라운 변화였다.

도화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무려 1년 만에 찾는 병원이다. 초기엔 꼬박꼬박 다녔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의사도 병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괜히 할머니의 병이 위중해서 시설이라도 들어가면 할머니와 헤어져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할머니….'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도화지는 피식 웃었다.

치매라는 게 좋았다가도 나빠지고 어떤 날은 멀쩡해 보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계속 버텨 줬으면 하지만 의학적으로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할머니, 내리자."

"벌써 다 왔어?"

"응, 조심해. 넘어져."

병원 로비에서 절차를 밟고, 1시간쯤 기다리자 간호사가 두 사람을 불렀다. 할머니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의사가 밝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씁쓸함이 있었다. 도화지를 바라보는 눈빛엔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인사를 한 건 할머니였다.

"아… 네? 아! 네! 할머니! 저,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기억하다마다요."

꾸벅 허릴 숙여 인사한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푸근하게 웃었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의사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눈빛이 너무 좋은데?'

그는 그간 수많은 환자를 보았기에 의사는 할머니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한데, 의사가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니, 멀쩡한 게 좋지만, 그건 정말 이상한 건데….

복잡해진 눈으로 그가 억지로 웃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할머니,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아침에 TV에서 봤어요."

할머니는 연도와 날짜를 정확히 말했다.

"손녀는 기억하시고요?"

"호호호! 제가 화지를 어떻게 잊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인데."

"하하, 그렇죠…."

이게 말이 되나?

의사는 침을 삼키며 화지에게 물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기다릴 수 있지?"

"네, 당연하죠!"

치매는 뇌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한다. 뇌가 늙으면 가장 먼저 기억력이 망가지고, 그렇게 망가진 기억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최근 기억부터 사라지고 가장 깊은 곳의 오래된 기억만 남는데, 그래서 치매 환자들이 아이처럼 변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할머니는 '어른'이었다.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질문도 먼저 해 올 정도였다.

"네, 할머니. 그런데 할머니, 요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일은 무슨. 잘 먹고 잘 자고, 그러지요."

"운동 같은 건요?"

"나이가 들어서 집이 편해요. 나가면 고생이야, 고생."

의사가 노트에 글씨를 적었다.

『어떻게? 왜?』

1년 전에도 할머니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였다. 건강한 아들이 세대원에 올라 있지만, 연락도 안 된단다. 어린 화지가 홀로 고생한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다.

"잠은 푹 주무세요?"

"그럼요. 호호! 아주 잘 잔답니다."

치매 노인은 본인이 언제 잠을 자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케이스는 처음인데.'

의사가 차트를 보며 고심하다 도화지를 보았다.

"혹시 MRI 찍어 볼 수 있을까?"

"그거 돈 많이 들잖아요."

"아니, 병원에 청구하는 걸로 찍어 볼게. 돈 안 들어."

"정말요?"

그의 직감이 맞는다면 할머니의 상태는 학계에 보고할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다.

그가 노트에 다시 글씨를 적었다.

『기적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좋아진 것뿐일까?

이제 그걸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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