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65화 (65/277)

#065화

"뭘 건드린 거야!"

동물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고양이가 인덕션 버튼을 눌러 불이 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허엇?"

푸르스름하기만 하던 침침한 등이 돌연 환한 빛을 내뿜었다. 벽면의 파란 등에만 들어오던 불빛이 천장까지 모조리 켜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벽에도, 바닥에도, 부서진 잔해 일부에서도 불이 들어왔다.

범이도 이런 변화가 놀랐는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앞발을 혀로 할짝거렸다.

"…."

녀석과 실랑이해 봐야 힘만 빠진다. 이왕 벌어진 일, 정보를 모아야 했다.

"이게 다 뭘까…."

봐도 모르겠다. 기계란 건 알겠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내가 보아 왔던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현재가 아닌 20년 후의 기계들까지 봤었다. 하지만 그 진보된 것들도 여기에 있는 것에 비하면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진다.

"환장하겠네."

벽을 따라 빙 돌던 나는 유리처럼 생긴 안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움찔했다.

"도면인가?"

정확하진 않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크네."

내가 있는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아마 바닥에서도 가장 아래쪽 어딘가일 것이다. 수백, 수천 개의 통로가 있었고 그만큼 많은 방이 존재했다. 그 중심에 거대한 홀도 보였는데, 뭘 하는 곳인진 알 수 없었다.

"멀진 않은데…."

가장 넓은 곳이 가장 많은 정보를 품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선 더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범이에게 손짓했다.

"가자."

범이가 쪼르르 달려와 뛰어올라 가방에 들어갔다.

"함부로 이것저것 만지지 마.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말하곤 문가로 걸어갔는데, 지잉 문이 열리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야, 큰일 났다."

통로에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던 것이다. 이걸 원숭이들이 못 봤을 리 없었다.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애써 태연한 척해 봤지만 선택해야 했다. 나가야 하나? 아니면 큰 홀을 확인해야 하나?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면 앞으로 경계가 강화될 수도 있어. 기회가 있을 때 진입한다.'

판단은 빨랐고, 발은 더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왕 마음을 정한 거, 느릿느릿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다다다다닷.

발걸음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활을 들고 앞을 조준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뭐가 나오든 쏴 버릴 기세로 강철 촉의 화살까지 시위에 먹여 놓았다.

아까 본 도면을 떠올렸다.

'방 여섯 개를 지나야 홀 초입이 나와.'

다른 방들엔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지잉, 지이잉.

열리는 문 안쪽으로 기척이 있는지 없는지만 눈으로 훑은 뒤 계속 뛰었다.

그렇게 30분쯤 뛰었다.

내 전력 질주는 굉장히 빠르다. 1,000km 미션 덕분도 있지만, 체력과 코어를 기반으로 하고 순발력까지 더해져서 육상 선수 못지않은 기동력을 낼 것이다. 이렇게 뛰었는데 30분이나 걸렸다니 정말이지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뛰다 보면 언제나 목적지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 앞이야.'

도면상엔 이 홀이 내가 지나온 통로의 길이보다도 컸었다.

"딱 붙어 있어."

진지한 목소리로 범이에게 말한 뒤 홀로 짐작되는 곳 앞에 섰다. 문은 없었다.

"…아…."

우선 가장 먼저 보인 건 위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로 뚫려 있는 천장은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까 착각했다. 이 피라미드는 잠실 종합 운동장보다도 몇 배는 더 컸다. 이 홀만 해도 축구장 몇 개는 들어가겠다.

그런데도 아직 놀라긴 이르다.

'저것들은 저기 모여서 뭘 하는 거지?'

홀의 중앙엔 위로 솟구친 원형의 기계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흘러나온 녹색 액체가 바닥을 호수처럼 적시고 있었고, 원숭이들은 그런 액체 근처에서 늘어지게 누워 자고 있었다.

'망토 입은 놈은 없는 걸 보면 저것들은 일반 원숭이인가?'

나 때문에 불이 켜진 것이든 아니면 여긴 원래 밝았던 것이든 간에 원숭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옆을 보았다.

'계단이 있어.'

벽을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저 위쪽까지 까마득히 이어져 있었다.

원숭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아래가 더 잘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는데, 홀은 피라미드의 중심에 있는지 사방으로 뻗어 가는 12개의 통로가 있었고 홀의 중심에서 위로 나무처럼 솟구친 기계에는 중간중간 불빛이 반짝거렸다. 멈춘 게 아니라는 거다.

'이걸 원숭이들이 만들었을 린 없잖아.'

계단을 올라가면서 원숭이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그 숫자가 대략 파악됐다.

'200마리쯤 되나?'

많은 수였지만 이 피라미드 크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적어 보였다. 10배? 아니, 저 100배는 수용 가능할 것 같은 규모지 않나?

'얘들은 빈집에서 사는 건가? 여기 주인들은 어디로 간 거지?'

궁금함을 발걸음에 담으면서 계속 올라갔다. 원숭이들이 손톱만 하게 보일 때쯤엔 속도를 더 올렸다. 끊임없는 오르막이었지만, 내 허벅지는 당당하게 버텨 내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통로를 마주했다.

"…."

위를 올려다보면 아직도 까마득했다. 이렇게 높이 올라왔건만 절반도 안 된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원숭이들이 깨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면 모든 곳을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왕이면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오며 훑자.'

목적을 잃지 않아야 했다. 내 미션은 원숭이 왕을 사냥하는 것이지 이 수상한 피라미드를 정찰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정하곤 곧장 계단을 뛰었다.

그렇게 무려 2시간.

"헉, 헉헉…."

이건 나도 힘들었다. 등산 2시간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저 아래에서부터 이어졌던 나무 같은 기계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피라미드 꼭대기로 짐작되는 지점도 시야에 들어왔다.

때마침 계단 옆으로 마지막 통로가 나왔다.

'계단에서 이어진 통로는 88개. 이것까지 89개째.'

역시 다 뒤졌다간 일주일도 모자랄 것이었다.

'왕이니까 최상층에 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어.'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통로에 진입했다. 아래에서 보았던 것처럼 벽엔 푸르스름한 등이 일관되게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의 환한 등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계단에서 통로로 들어간 뒤 만난 첫 번째 문에서 활을 들고 안쪽을 노리며 호흡을 멈췄다.

지이이잉.

빠르게 돌아가는 내 눈동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포착했다.

'없어.'

방 내부는 아래에서 보았던 것처럼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다음.'

통로를 달려서 다음 문을 찾았다. 놈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일일이 뒤져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없어.'

12개의 방이 지나갔다.

중간에 통로가 오른쪽으로 휜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라미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져. 여긴 맨 꼭대기니까 상대적으로 좁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뛰었을 때, 바람이 불었다.

'아.'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만난 거다.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들이쳤다.

조심스럽게 통로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밤이라서 세상은 온통 까맣지만, 저 아래가 다 정글이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세상이 환해졌다. 달빛을 가린 구름이 물러난 것이다.

"아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드넓은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광경과 그 위에 서 있다는 신기한 기분은 다른 곳에선 느껴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캬오!

범이가 뛰어내렸다. 그러면서 뒤쪽을 향해 포효했다.

'이런!'

잠깐 방심했던 나를 자책하면서 활을 들고 돌아섰다.

-누구냐!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의 고성이 들려왔고, 펄럭거리는 망토와 희끗희끗한 형체가 복도 끝에서 잡혔다.

티잉!

형체를 보았다 싶었을 때, 화살이 날았다.

【스킬: 첫 타 강화(인내)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퍼어어어억!

화살이 벽을 뚫고 끝까지 들어가서 박혔다. 아무리 강철 촉을 달았다지만 엄청난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벽을 맞혔다는 건 빗나갔다는 뜻이었다.

저쪽에서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울음소리가 또 들렸다.

-히이이익! 침입자다! 적이 침입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뒤쪽으로 난 외부에서 강렬한 소리를 들었다.

쿼어어어어어어어어!

밤엔 무조건 잠만 자던 큰 원숭이였다. 그 코골이는 해가 떠야만 멈췄었는데, 오늘은 이변이 일어났다.

'젠장!'

왕의 명령에 잠에서 깨어난 거대 원숭이가 피라미드로 펄쩍펄쩍 뛰어오고 있었다.

"쫓아!"

범이에게 외치며 돌아왔던 길을 거슬렀다. 저쪽에서 도망가는 기척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오면서 봤던 12개의 방에 숨진 않은 거다.

'성가시게 됐어.'

왕이 나를 발견했고, 왕의 명령을 들은 거대 원숭이가 날뛰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밖으로 가면 죽는다.'

용케 피한다고 해도 거대 원숭이는 오늘부터 경계를 삼엄하게 할 게 분명했다.

'지금 끝장을 봐야 돼!'

속도를 더 높였지만, 원숭이 왕이 어찌나 빠른지 기척은 더욱 멀어졌다.

'저놈은 강하지 않을 거야. 그랬다면 나와 맞섰겠지. 도망쳤다는 건 내게 승산이 있다는 뜻이고!'

순식간에 계단이 보였다.

그리곤 아래로 내려가는 망토도 발견했다.

쌔애애애애액!

이미 들고 있던 활에서 화살이 날았다.

퍼억!

'맞았나?'

망토를 뚫은 화살을 봤지만, 원숭이 왕은 계단 옆 통로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뭐가 저렇게 빨라!'

아까웠지만 후회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쏠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넘어질 것처럼 빨리 계단을 내려가서 놈이 도주한 통로를 향했다.

이때였다.

콰앙!

뭔가가 피라미드를 때렸다.

그그그그그긍!

천장에서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무식한 놈이…."

보이지 않았지만 큰 원숭이가 밖에서 피라미드를 때리고 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쾅! 콰아앙! 쾅!

놈의 괴력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거다.

'막아야 돼!'

최악의 상황이라면 원숭이 왕이 큰 원숭이와 합류하는 거다.

"범아!"

캬아아아아!

내 뜻을 읽었는지 범이가 앞으로 내달렸다. 나보단 훨씬 빨랐기에 원숭이 왕이 밖으로 나가는 걸 범이가 막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통로 끝에 닿았을 때 원숭이 왕은 없었다. 홀로 선 범이만 꾸웅?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숨었어!'

지나온 방 어딘가로 도주한 거다.

그런데 갑자기 달빛이 사라졌다.

"피, 피해! 범아!"

통로 끝에서 커다란 눈동자가 안쪽을 보고 있었다.

"…!!"

범이가 깜짝 놀라 이쪽으로 후다닥 뛸 때, 커다란 주먹이 구멍을 때렸다.

콰앙-!

놈이 워낙 커서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겠지만, 이곳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저 괴물 같은 자식이!'

물러난 범이와 함께 통로 안쪽으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을 열었다.

지이이잉.

"…!"

"…?"

방 끝에서 원숭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너!"

하지만 원숭이 왕은 우끼끼! 웃더니 어디론가 훌쩍 뛰어내렸다.

"어어엇?"

급히 뛰었다.

"이런!"

아래로 이어진 구멍이 있었다. 놈은 이곳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망설일 틈이 없다.

나는 부서진 바닥을 통해 뛰어내렸다.

"크읍."

충격을 줄이며 좌우를 바라봤다. 원숭이 왕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날랜 녀석이었다.

-끼끼끼끼….

저쪽에서 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야!'

범이의 등을 두드리며 뛰었는데, 밖으로 나가자 완전히 뜯겨 나간 벽이 보였다. 이건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다.

"…!"

안쪽에서 망토 끝자락이 보였고,

그으윽!

화살 끝이 놈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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