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저놈이 왕이라니….'
뭔가 허탈하기도 하다.
비쩍 마른 원숭이는 나보다 작아 보였는데, 늙었는지 털도 곳곳이 하얬다.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큰 쪽이 왕이라고.
'그래도 뭔가 나아진 건가?'
거대한 놈과 싸우라고 하면 절망적이었지만, 저 늙은 원숭이를 보니 조금 용기가 솟는다.
잠시 후.
원숭이 왕이 뭐라 뭐라 떠드는 것 같더니 피라미드 곳곳의 구멍에서 작은 원숭이들이 튀어나와 우끼끼! 울어 댔다. 춤을 추는 것같이 덩실거리는 녀석도 있었고, 큰 원숭이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메시지가 터졌다.
【축하합니다! 필드에서 긴 시간 동안 전용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스킬: 첫 타 강화(인내)를 얻었습니다. 이제 시간을 비축할수록 첫 번째 공격에 추가 타격 효과가 발생합니다.】
'오…. 이런 식으로 스킬을 얻다니!'
뜻밖의 수확에 좀 더 기운이 났다.
나는 물약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천천히 이동하면서 피라미드를 주시했다.
'얼마나 있는 거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구멍이 있었다. 그곳을 통해 원숭이들이 드나드는 것 같다.
'근데 저게 본거지라면 뭘 먹고 살아가는 거지?'
딱 봐도 피라미드 안엔 엄청나게 많은 원숭이가 있어 보였다.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선 놈들도 먹거리가 필요할 것이다.
'보자, 네놈들이 거기서 뭘 하는지.'
드링크가 효과가 남아 있을 때, 작은 정보 하나라도 찾아야 했다.
.
.
.
이틀이 지났다.
거대 원숭이는 근처에서 머물며 왕의 명령을 듣는 것 같았다.
피라미드를 관찰한 결과, 이상하게도 원숭이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 더 지난다고 해도 수확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놈들이 나오게 하든가 내가 들어가야 한다.
'녀석들의 전투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문제야.'
서큐버스를 만만히 봤다가 잡아먹힐 뻔하지 않았나? 저 거대 원숭이야 그렇다고 쳐도 작은 놈들이 얼마만큼 강한지 모르기에 무턱대고 진입할 순 없었다.
'구멍이 작진 않을 걸 보면 드나드는 덴 괜찮을 것 같지만, 수백 마리가 몰려오면 감당할 수 없을 거고.'
피라미드가 워낙 커서 내가 숲에서 나가면 바로 눈에 띌 것이다.
'저격밖에 답이 없나?'
나는 나무 뒤에서 피라미드를 보며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너무 멀어.'
하지만 가장 가까운 구멍도 500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멀리 쏴 본 적은 없었다. 활이란 게 힘도 중요하지만 멀리 쏘려면 바람을 타거나 낙차를 이용해야 한다. 단순하게 직선으로 500미터를 날아갈 순 없다.
'접근해서 쏴야 해.'
피라미드 주변엔 나무가 없어서 햇빛이 고스란히 내리비친다. 밤이 와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저놈도 잠들 테니까.'
피라미드 뒤쪽을 서성이는 큰 원숭이를 보며 나는 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왔다.
"위험하면 바로 도망치는 거다."
갸르릉.
나는 범이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킨 뒤 숲에서 나왔다.
구름이 달빛을 가릴 때, 속도를 높여 피라미드에 접근했다. 이런 꼭짓점 구조는 위에서 아래를 너무 쉽게 볼 수 있었다. 거의 바닥에 붙다시피 이동해야 했고, 작은 소리도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르르르르르렁!
거대 원숭이가 코를 골아 대고 있었다.
'모두를 상대할 필욘 없어. 왕만 잡으면 돼.'
지난 미션을 떠올려 보자. 10,000포인트를 모으라고 했을 때 나는 표범을 잡아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표범은 내 동료가 되었고, 적은 따로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저 무식하게 큰 괴물은 내 상대가 아니다. 수많은 원숭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노려야 할 건 오직 한 놈!
'놈이 어디에 있느냐인데.'
피라미드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뚫었다고 하면 과장이지만 낮은 구름 정도의 위치까지 솟아 있는 건 확실했다. 잠실에 있는 가장 높은 빌딩보다도 훨씬 높을 거다.
'그렇다고 한다면 적어도 200층. 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수 없으면 그 높이만큼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건 팩트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피라미드 앞까지 와 보니, 나를 발견한 원숭이가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성급할 필욘 없었다. 이미 오랜 시간을 여기서 보냈는데, 며칠 더 지낸다고 힘들진 않았으니까.
다음 날.
거대 원숭이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기 전에 잠에서 깬 나는 피라미드를 관찰했다.
-우끼끼끼끼!
-우끼! 우끼!
원숭이들이 구멍에서 나와 포효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곤 어제처럼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경계병은 없어.'
뭘 하는지 몰라도 낮엔 구멍 밖을 내다보는 원숭이가 간혹 있었지만 그렇다고 외부 침입을 대비해서 보초를 서는 것 같진 않았다.
'이놈들은 낮에 움직이고, 밤엔 자는 거야. 그건 확실해.'
또다시 밤이 오자 이번엔 용기를 더 냈다.
"얌전히 있어."
범이를 가방에 넣고 벽을 기어올랐다. 비스듬하고 거친 표면의 돌이라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곤 스윽.
지면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으로 수면에서 올라오듯 조금씩 얼굴을 들어 안쪽을 보았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어둠뿐이다.
살금살금.
구멍에 들어갔다.
구멍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컸다. 내가 서서 다녀도 무리가 없었는데, 넓다고 방심하진 않는다. 활을 들고 상체를 바짝 숙여 조금씩 걸어 보았다.
'너무 어두워.'
휴대폰은 이미 방전된 지 오래였다. 라이터가 있지만, 그걸로 뭔갈 했다간 원숭이들이 다 잠에서 깰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가긴 아쉬운데….'
생각했을 때였다.
'어? 저거?'
희미하지만 푸른빛 같은 게 저 끝 쪽에서 보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아주 느릿느릿 이동했다.
"…."
침 넘어가는 소리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히 소음을 절제하고 걷길 열 걸음.
'아…?'
이런 게 왜 여기에?
'뭐야? 이게?'
빛을 내는 걸 가까이에서 봤다. 이건 절대로 자연적인 게 아니었다. 마치 형광등 조명을 가장 미약한 상태로 맞춰 둔 것 같았는데, 확실한 것은 '기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는 것이었다.
'설마 사람이 사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면 원숭이들이 이걸 만들었다는 거 아닌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시야는 확보했어.'
벽의 오른쪽에 붙은 띠에서 불빛은 균등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파란 불빛을 일상에선 잘 쓰지 않는다.
'이런 걸 어디에서 봤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원숭이가 소유할 지식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궁금증이 더욱 커져만 갔다.
이쯤에서 나가야 한다는 경고가 뒤통수를 간지럽혔지만, 그것보단 호기심이 더 강했고 지금이 아니면 아주 중요한 걸 놓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더 가 보자.'
여차하면 돌아보지도 말고 이 길로 탈출하는 거다. 원숭이 몇 마리쯤 길을 막아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 더 진입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랐다.
지이이이잉.
옆의 문이 열린 거다.
"흐읍…."
나도 모르게 숨소릴 내고 말았는데, 열린 문 안쪽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것들이 있었다.
"이, 이게…?"
망가지고 부서진 잔해. 용도를 추정할 순 없었지만, '기계'를 이루는 부품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뭔데? 이거?'
단순히 원숭이들이 모여 사는 사원 같은 거라고 여겼는데, 내부는 그게 아니었다.
쇠 파이프 같은 걸 하나 들어 보았다.
'이상한 질감이야.'
오토바이를 오래 타 봤고, 각종 공장도 전전해서 안다. 철이 주는 느낌과 이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인데.'
내 주변에 널린 잔해가 다 이런 재질이었다. 혹시 몰라서 작은 거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내가 워낙 가진 게 없으니 나중에 뭐라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부품 745XX-83을 얻었습니다.】
'부품? 무슨 부품이지?'
의문이 가득하지만, 더 지체할 수 없기에 좀 더 둘러본 뒤 다시 문가로 갔다. 그러자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인지 문이 다시 지이잉 열렸다.
바깥쪽에 원숭이는 없었다. 기척도 없었다.
'조금만 더 가 보자.'
시위에 먹인 화살 끝이 바르르르 떨렸다. 어둠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벽을 등지고 한참을 걸었다.
적어도 1시간은 걸은 것 같다. 워낙 내 속도가 느렸기 때문도 있겠지만, 첫 번째 방 이후론 한동안 변화가 없었다.
'아침이 오려면 멀었어.'
그래도 속도를 더 올려야겠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원숭이들은 군대가 아니야.'
조직적이지도 않았고, 체계가 잘 잡힌 것도 아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야간 보초가 반드시 있었겠지.'
이 안에서 근 한 시간을 보냈는데, 마주친 원숭이가 없다는 것은 원숭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다.
'천적이 없거나.'
하긴 밖에 어마어마한 놈이 있는데, 뭐가 덤빌 수 있을까. 어쩌면 원래 있었는데, 모조리 토벌됐을 수도 있고.
'내겐 다행인 일이야.'
오늘 하루에 무언갈 다 할 생각은 없었다. 원숭이 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놈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40분을 더 갔을 때,
'아….'
이번엔 문이 먼저 보였고,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아도 됐다.
'외부까지 이렇게 먼 건가.'
무식하게 큰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긴 통로도 이해는 갔다.
'없어라…. 제발 아무것도 없어라….'
문을 발견한 건 좋지만, 그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다.
기이이익.
활시위를 한껏 당기면서 문으로 접근했다.
지잉.
역시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안쪽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달려 숨어들었다.
지잉.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난 뒤 허리를 폈다.
'여긴 대체….'
200평쯤 되는 큰 공간이 느닷없이 나왔다. 내가 걷던 통로처럼 푸른빛으로 가득했고, 천장도 높았다.
'뭘 위한 거지?'
조심히 걸으면서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았다. 이곳 역시 온전한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 디딜 곳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건 대체….'
원숭이를 찾으러 왔다가 괴상한 걸 봐 버린 기분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곳에 원숭이들이 사는 걸까? 원숭이를 키우던 주인이 사라진 걸까?
'이번 미션은 혹시 이걸 내게 보여 주려고 그랬던 건가?'
재능마켓의 정보는 언제나 지극히 제한적이었기에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애초에 내 힘으론 큰 원숭이 같은 걸 상대할 순 없었어.'
그렇다는 건 '왕'이라는 작은 원숭이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왕'이 여기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나는 이 피라미드에 왔어야 한다는 거다.
'정글에서 생존하는 것이 첫 번째, 큰 원숭이는 어쨌든 여기로 오게 되어 있는 것 같으니 피라미드를 찾는 게 두 번째.'
큰 원숭이를 만나지 않아도 자력으로 여기까지 온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왕을 사냥하는 게 세 번째겠지.'
고심하면서 발밑을 주의하며 걷는데, 범이가 훌쩍 뛰어내렸다.
"아?"
깜짝 놀라서 손을 뻗었다.
'야! 안 돼! 가만히 있으라고!'
큰 소릴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범이는 내 마음도 모르고 폴짝폴짝 저쪽으로 뛰어갔다. 얼마나 빠른지 잡을 수도 없었다.
'조심하라니까!'
범이를 따라 속도를 높이는데, 녀석이 훌쩍 뛰어올랐다. 벽에 붙어 있는 선반 같은 곳이었는데,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한다지만 지금은 참아야 하지 않나?
'야! 이리 와! 야!'
손을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범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더니 엉덩이를 깔고 앉아 앞발을 혀로 핥았다.
그런데 그때, 범이의 발바닥이 무언가를 눌렀다.
-우우우우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