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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마켓-63화 (63/277)

#063화

"멀리 가지 마."

갸르르릉.

내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범이도 긴장했다.

'드디어 뭐가 나오는 건가?'

드르르르릉.

규칙적으로 울림이 나고 있었다. 이건 꼭 도심을 걷다가 발아래 환풍구에서 지하철이 지나갈 때 느끼는 그런 진동 같았다. 두려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

나는 활과 활 통 같은 것들을 단단히 메고 굳은 표정으로 칼을 잡았다. 그리곤 발을 내밀어 나무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웬만한 건 자르지 않고 길을 뚫으려는 것인데, 괜한 소음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쉬지 않고 걸었는데, 길이 없어 가늠하기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꾸준함 덕분에 꽤 먼 거릴 이동했다고 생각했다.

드르르르릉!

하지만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직 울림의 진원은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방해하는 나무가 가장 문제였지만, 이걸 다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범아, 올라가 보자."

이대론 방향조차 찾을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나무 아래에 우뚝 섰다.

재능마켓을 알기 전의 나였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내 근력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고, 그보다도 더 쉬운 방법도 있었다.

【커스텀을 해제합니다.】

작고 귀엽던 범이의 모습이 순식간에 거대한 표범으로 변했다.

할짝, 할짝!

녀석도 기분이 좋은지 내 얼굴을 핥아 댔다.

"야야, 알았어. 그만."

나는 범이 등에 올라타서 매달렸다.

"가자!"

갸르릉!

범이가 훌쩍 나무를 타고 올랐다.

'흐읍!'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 것 같다. 물론 그것보단 백배 스릴 있었다.

파박파박.

범이의 발톱은 나무 타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날렵한 몸은 작은 실수도 하지 않았으니 그 높은 나무의 꼭대기 언저리까지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탄식했다.

"헐…."

충분하다 생각한 나무가 더 키 큰 나무들에 가려 그늘져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등에 매달려서 아쉬워하는데, 범이가 내 속을 읽은 걸까?

"어? 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악! 야아아아!"

생각도 못 했다.

휘익! 날아오른 범이가 옆의 나무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참으로 다행인 건 나무에 녀석의 발톱이 닿았다는 거고, 불행인 건 주르륵 미끄러진 거다.

"허어어억!"

3미터쯤 떨어지다가 겨우 범이의 몸이 멎었는데, 그 짧은 순간 나는 영혼이 반쯤 나간 기분이었다.

"야! 말이라도 하고…."

뒷말이 이어질 새 없이 범이가 움직였다. 범이도 당황한 것 같다. 작은 몸으론 나무 사이로 휙휙 날아다녔겠지만, 녀석은 지금 육중한 표범에 나까지 태우고 있으니 예상이 어긋났을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온 나는 범이의 등에서 내려 나뭇가지를 밟았다.

"와아…."

근 보름 만에 처음으로 넓은 하늘을 봤다. 위는 온통 파란색이었고, 아래엔 녹색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저 지평선 끝까지 다 나무였으니, 이 정글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안 된다.

"대박…. 하하… 하하하…."

좋아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러다 여기서 몇 년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기막혀서 헛소리가 나온다.

괜히 말이 씨가 될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닫았다.

"숨바꼭질도 아니고, 여기서 원숭이를 어떻게 찾으라고…."

남산 타워에 올라가면 서울 전경이 대부분 내려다보인다. 그 타워만큼 이 나무가 높은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동서남북 가시거리 끝까지 숲이 보인다는 건 어쩌면 이 정글이 서울보다도 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 이름을 윌슨이라고 지을 걸 그랬어."

갸르릉?

"네가 있어서 다행이란 말이야."

범이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할 때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겠다 싶었던 나는 막 내려가려고 했다.

으드드드드득!

저 멀리서 굉장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헛?"

우지끈, 나무들이 쓰러졌다.

이 나무들의 키가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 20미터는 될 거다. 아마 큰 건 30미터까지 자란 것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그런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렇게 큰 나무는 무게도 상당할 텐데….

그런데 그때,

"저, 저게…."

녹색의 물결 위로 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미친…. 세상에…."

원숭이였다.

그것도 오지게 큰 원숭이.

"흐읍."

놈은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사라졌다. 설마 아까 그 진동이 저 녀석이 낸 것인가?

'저게 설마 원숭이 왕?'

얼핏 드러났던 놈의 몸집에는 집채만 하다는 표현도 모자랐다. 저 정도면 아파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스스스스스스스스.

원숭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주변 나무들이 춤추듯 흔들리는 게 보인다는 거다.

"범아!"

나는 범이의 등에 올라탔다.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면 저 원숭이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할 수 없다.

캬웅!

내가 올라타자 범이가 옆의 나무로 뛰었다. 아깐 죽을 것 같았는데 목적이 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더 놀라운 걸 목격해 버려서 그런지 머릿속에 추락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휙! 휘익!

범이는 계속해서 나무에서 나무로 뛰었다. 나무들이 워낙 빼곡했고 범이도 일반적인 표범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동 속도가 빨랐다.

쿠웅! 콰앙!

콰지지지지직!

뭔가 쓰러지고 뽑히고 부러지는 소리들이 가까워진다. 이 정글의 무법자는 거대한 나무조차도 이쑤시개처럼 뽑아서 길을 만들었다.

"…."

나무 위에서 저 아래를 봤다. 녀석이 지난 길은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불도저가 지나간 것 같은 길이 새로 나 있었는데, 내가 받은 정글도 한 자루가 이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저걸… 잡으라고?"

나는 기가 막혔다.

"비벼 볼 수 있겠냐?"

범이를 보며 물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범이의 발톱은커녕 송곳니로 물어도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진짜 괴물.

그게 우리 앞에 있었다.

.

.

.

시간이 더 지났다.

내가 여기 온 게 무려 한 달이 되어 간다. 원숭이한텐 내가 개미로 보이는 건지 아직까진 걸리지 않고 미행 중이다.

드르르르르릉! 드르르르릉!

미행하기 쉬웠던 것 중 하나는 녀석도 밤이 되면 저렇게 코를 골면서 잔다는 거다. 낮엔 과일나무를 통째로 씹어 먹었는데, '과일'만 똑 따서 먹는 게 아니라 과실이 달린 나무 윗부분을 전부 먹어 치웠다.

원숭이가 지나간 자리엔 황폐함만이 남았고, 녀석은 또 다른 먹이를 찾아 이동했다.

"…."

벌러덩 드러누워서 손으로 배를 벅벅 긁는 원숭이를 보면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놈을 따라붙으면서 계속 고민을 해 봤지만, 상대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차라리 삽자루 하나 주고 산이랑 싸우라고 하든지.'

그러면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삽질부터 시작할 텐데 이건 뭐 어쩌라는 건질 모르겠다. 그나마 건진 수확은 놈이 평소엔 이족 보행이 아니라 손도 써서 걷는다는 것. 내가 알던 원숭이보다 훨씬 크고 무섭게 생겼으며 털도 짙은 갈색이고, 웬만큼 뾰족한 나무도 녀석의 가죽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절대 내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던가? 지금 상황으로 해당될진 모르겠지만 모르느니만 낫다 위로해 본다.

'저 두꺼운 손바닥과 발바닥엔 내 강철 촉 화살도 안 들어가겠지?'

생긴 것답지 않게 몸놀림이 무척이나 빠르기까지 하다.

'최악인 건 나무도 뽑아 버리는 힘과 그걸 씹어 먹는 턱이고.'

너무 만만하게 봤다. 후딱 하고 재능마켓 체류 시간을 따내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저런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않았다.

드르르르르릉, 드르르르르렁.

저놈은 저렇게 세상 편하게 자는데, 나는 열흘째 거의 못 자고 있었다. 저런 놈 근처에서 어떻게 자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하게 변해만 갔고 몇 번이나 포기할까? 나약한 생각에 휘말렸다.

갸르릉.

아마 이 녀석이 없었다면 더 힘들었겠지.

"알아. 버틸 거야. 나는 지지 않아."

범이의 얼굴을 끌어안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은 했지만 내 머리론 정말이지 답이 없었다. 지력+10이 되면 다를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어. 참는 건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거니까.'

처음엔 범이도 크다고 생각했었다. 그다음엔 더 큰 매가 나왔다. 아직 저 원숭이 크기는 적응하려면 멀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

.

.

정글에 온 지 44일째 아침.

-쿠어어어어어어어어어!

잠에서 깬 원숭이가 포효했다. 저건 적이 나타나서 그런다거나 위협을 느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난 아저씨가 기지개를 켜면서 '아으으으' 내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어오, 고막 터지겠네."

나무에 등을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이던 나도 일어났다. 작아진 범이도 내 품에서 튀어나와 앞발을 모으고 몸을 쭉 폈다.

"왜 아침마다 저 지랄이야, 지랄은."

이젠 나도 많이 무뎌졌다. 아직도 저 녀석을 공략할 방법은 못 찾았지만, 사람이 참 무서운 게 녀석이 눈에 익었다는 거다.

빠직! 빠지지지지직!

일어나고, 똥 싸고.

"아오…. 냄새…."

바람이 이쪽을 향하는지 내가 있는 100미터 밖에까지 고약한 냄새가 퍼졌다.

뒤통수를 벅벅 긁던 녀석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처럼 그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긴 했다. 당장 놈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놈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어정쩡한 동행이 되고 있는 거다. 게다가 놈이 초토화시킨 잔해를 뒤지면 먹다 흘린 과일도 제법 많았으니, 식사도 해결이 되어 좀 더 느긋이 지켜볼 수 있었다.

아삭.

정체불명의 과일 하나를 깨물며 우리도 이동할 준비를 했다.

정글 최강.

녀석에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그 어떤 천적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먹고 자고 싸고… 그게 다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지만 저 녀석에 비하면 모자란 감이 있다.

화살을 들었다.

피잉.

부러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과일 하나가 떨어졌다.

그걸 범이에게 던져 주며 원숭이 뒤를 따라갔다. 해가 머리 위로 솟았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간다. 밤이 오면 원숭이는 드러누워 코를 골아 댈 것이고, 우리의 하루도 끝이 난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재능마켓은 이 미션을 내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내 준 걸까? 이제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은 다 뭐란 말인가?

한동안은 이런 자괴감에 치를 떨었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조차도 들지 않았다.

나는 이제 관전자다.

정글 그 자체였으며 저 단순한 원숭이의 삶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그럴 것 같았다.

"음?"

이상한 게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으으음?"

범이도 놀랐는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기지 않아서 나는 저쪽을 보며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너도 보여? 저거?"

우리의 눈앞에 두둥 나타난 거대한 피라미드는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넓이는 잠실 종합 운동장보다도 훨씬 커 보였는데, 나무 때문에 가려서 몰랐던 거지 아주 멀리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게 왜 여기 있나? 아니, 저걸 피라미드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탑이라고 해야 하나?

'전에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땐 못 봤어. 하긴 상당히 멀리 왔으니까.'

원숭이가 피라미드 쪽으로 걸어갔다.

'설마 저게 놈의 집인가?'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니 집이 있다면 저 정돈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쿠웅-!

피라미드 앞에서 원숭이가 바닥을 향해 이마를 찍었다.

"…?"

흡사 절을 하는 것처럼 공손한 자세였는데, 한참이 지나자 피라미드 외벽 구멍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드링크!'

왠지 이 장면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단 생각에 가방에서 병을 꺼내 마셨다.

【30분간 시력이 월등히 좋아집니다.】

순간, 화악.

눈에 망원 렌즈가 달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곤 이내 내 의지에 맞춰 초점이 잡혔다. 그리고 보았다.

'허어… 얼?'

구멍에서 나온 건 두 발로 선 원숭이였는데,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목걸이까지 찼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원숭이 왕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사냥해야 하는 대상을 완전히 잘못짚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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