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과 옷가지, 화장품이 전부다. 지독히도 간소한 살림살이와 사진 하나 없는 삭막함에 팀장은 입맛을 다셨다.
"감식반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뭘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어제부터 지금까지 누가 여기 드나들었는지 확인해 봐."
"김 형사가 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팀장이 벽장을 열어 보았다.
"우진아."
"네, 팀장님."
"이게 뭐로 보이냐?"
"장롱이요."
"아니, 여기 말이야."
깔끔하게 개어 놓은 이불 옆에 공간이 하나 있었다.
"뭔가 있던 자리 같은데요?"
"그렇지? 이불이 이쪽으로 살짝 무너졌잖아."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체를 보고 난 뒤부터 모든 것이 다 이상해 보였다.
그때 조우진 형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조우진 형사가 통화도 마치지 않은 상태로 팀장에게 말했다.
"신원 확인했습니다! 이유선, 22세, 자양동에 살았었답니다. 본가는 전주인데, 2년 전 서울로 올라와서 혼자 자취하던 중이었고요."
"여긴 언제 왔고?"
"피해자 명의의 오피스텔이 아닙니다."
"그럼?"
"신진태란 사람인데, 부동산을 통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누군가 얻어 줬을 수도 있다. 화류계에선 흔한 일이었고, 때론 가게에서 아가씨 숙소를 잡아 주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니까.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
그가 주방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배달 음식만 시켜 먹는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 흔적이 없을 수가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싱크대의 물때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여긴 새것처럼 윤기까지 났다.
'다시 가게로 넘어가야 하나?'
여기선 더 있어 봐야 얻을 정보는 없을 것 같았다.
"흐음…."
10분쯤 더 지났을 때였다.
욕실을 꼼꼼히 살피던 그에게 조우진이 돌아왔다.
"팀장님!"
"뭐 나왔어?"
"이 오피스텔 명의자 말입니다!"
"신진태?"
"8개월 전부터 실종 상태랍니다!"
"뭐어?"
"44세 남성! 연화대학교 최연소 정교수 직함까지 달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미치겠군…."
이럴 줄 알았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더니 이 사건, 그냥 끝날 게 아니었다.
"더 파 봐. 그 가게에서 김유선이 만난 사람 모두 체크하고 실종자가 더 있는지도 알아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장부 안 내놓으면 매일같이 내가 가서 턴다고 말해."
"네!"
팀장은 혹시 몰라 욕실 천장까지 들춰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오는 건 없었다.
"CCTV는?"
"어제 김유선이 외출한 뒤로 여기에 온 사람은 없습니다."
CCTV가 복도를 비추기에 모습을 들키지 않고 숨어드는 건 불가능하리라.
팀장의 눈이 벽장으로 향했다.
어색하게 빈 공간.
누가 저기에 있던 물건을 들고 나갔다면 CCTV에 찍혔을 것이었다.
'아닌가?'
그의 직감은 무시할 것은 아니었지만, 모르겠다. 이 사건 자체가 수상한 것투성이였다.
.
.
.
지이이익.
가방을 열어 다시 확인해 보았다.
"하…."
이런 돈다발은 살면서 처음 봤다.
"이게 다 얼마야?"
카드키를 얻은 뒤 나는 1102호로 향했었다. 혹시 몰라서 쿨타임을 기다렸다가 은신 드링크까지 먹고 갔는데, 그렇게 들어간 1102호에서 이 가방을 발견했다.
【하층민을 섬멸할 시 하층민의 아이템을 자동적으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는 이게 내 전리품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꿀꺽!
괜히 조마조마했다.
가방 속 물건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5만 원권과 만 원권이 뒤섞여 있어서 일일이 나누는 것도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일단 돈은 돈대로 물건은 물건대로 나눴다.
【해당 아이템의 귀속이 풀렸습니다.】
【사용자가 지정되면 재능마켓에 판매할 수 없습니다.】
돈은 5,450만 원이었다.
내가 몇 달간 개고생을 해서 번 돈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오천만 원…."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모은 거야?
"크흠."
이러다간 계속 돈만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눈을 돌렸다.
물건은 세 개.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화장품인가?'
하나를 잡고 뚜껑을 열어 보니 동그랗고 물컹한 게 들어 있었다.
【서큐버스의 파운데이션
사용 시 일정 시간 동안 매력이 +3 증가한다. 지속 시간 24시간. 귀속된 사용자에게만 효과가 발동하며 타인에겐 작용하지 않는다. 소모품.】
"…."
내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기에 재판매란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 흥정하듯 메시지가 울렸다.
【500p에 판매하시겠습니까?】
"오백?"
비싼 건가?
나는 혹시나 하며 되물었다.
"이거 사려면 얼만데?"
【해당 제품은 재능마켓에서 50,000p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날강도를 봤나!"
10%의 가격에 사서 10배로 뻥튀기해서 팔다니! 아무리 내게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도 500엔 절대 안 판다 안 팔아!
【…600p에 판매하시겠습니까?】
"안 판다고! 꺼져!"
흥정을 하다니….
뭐 이런 시스템이 다 있나?
분을 삭이며 다른 물건을 들었다.
【서큐버스의 매니큐어
사용 시 매력이 +2 증가한다. 지속 시간 7일. 소모품.】
이것도 귀속된 사람에게만 효과가 발휘된단다. 두 가지 물건을 다 사용하면 매력이 +5가 된다는 뜻인데, 내가 셔츠랑 코트로 매력 +2가 되어 봐서 그 효과를 어느 정돈 짐작할 수 있었다. 무려 여고생에게 전화번호를 따이지 않았나?
'꼭꼭 숨겨 둔 걸 보면 그 여자도 이것들은 아껴 쓰려고 했던 건가?'
소모품이라고 했으니, 마구 쓸 순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건…."
【610p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 때는?"
【해당 제품은 재능마켓에서 50,000p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 네에. 그럼요. 그러시겠죠."
괜히 물어봤다.
심지어 아까보다 10p 더 올려 준다는데 헛웃음만 나온다.
이제 마지막 물건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붙박이장에 있던 두 가지 물건은 미션을 성공해서 받은 보상이었고, 이게 '하층민'의 아이템이었다.
'내가 당했다면 내가 모은 아이템도 그 여자한테 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번엔 반짝이는 돌을 집었다.
이내 빛을 내며 사라지는 돌은 메시지로 변화했다.
【저장용 가방을 얻었습니다. 가방은 커스텀을 통해 여러 형태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들고 왔던 가방이 사라졌다.
"어?"
난데없는 변화에 잠깐 멈칫했는데, 이어지는 설명에 입을 떡 벌렸다.
【저장용 가방(레어)
외부에서 가방 속 물건을 소환할 수 있다. 가방의 크기와 형태는 커스텀을 통해 바꿀 수 있다. 타인이 가방을 소유해도 해당 물건은 소유자가 죽기 전엔 타인이 강제 귀속할 수 없다. 생물을 저장할 수 없다. 저장할 물건이 가방의 크기를 넘을 순 없다.】
"소환한다고?"
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 여자가 아이템을 아끼려고 가방에 넣어 둔 게 아니었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으니까 그런 거다.
"대박이다…."
이제까지 몇 개의 레어 아이템을 얻었었지만 이게 단연 최고였다.
나는 흥분해서 외쳤다.
"줘! 가방!"
【기본형 가방의 이미지를 불러옵니다.】
작은 여행용 가방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 같다. 큰 거 말고 기내용이다. 다른 건 아까 내가 봤던 그 여자의 가방 형태고, 또 하나는 장바구니다.
"…더 큰 건 없어? 이거엔 활이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기다렸다는 듯 몇 개의 이미지가 솟구쳤다.
【커스텀: 고급 진열장
영웅들이 사용하는 최고급 소재의 12단 진열장! 언제든 아이템과 소지품을 저장하고 소환할 수 있다.
가격:190,000p.】
재벌 집에 가면 시계랑 넥타이 같은 거 넣어 두는 그런 진열장이 보였다.
"놀리는 거지?"
비싼 게 좋다는 거 누가 모르냐?
포인트가 없잖아! 포인트가!
"싼 거 보여 줘, 싼 거! 활이 들어갈 정돈 돼야 해!"
【커스텀: 10층 빌딩 보관소
수십 대의 차량과 헬기까지 보관할 수 있는 꿈의 장비! 설명이 필요 없다. 추가로 포인트를 사용하여 지하 공간을 증축할 수 있다. 사용자의 허가를 받지 않은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다.
가격 12,970,000p.】
이거 지금 나 멕이는 거 맞지?
뭐? 천이백구십칠만 포인트?
"…뭐 하냐?"
【커스텀: 평범한 벽장
가로 1m, 세로 3m의 저장소.
가격: 18,000p.】
"진작 이럴 것이지."
그 후로 몇 개의 물건을 더 봤지만, 평범한 벽장이 가격적으로나 크기로나 가장 알맞았다. 그간 이것저것 쓰고 벌고 하다 보니 25,000포인트가 모였는데, 벽장 하나엔 투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앞으론 하드 케이스나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뜻 아닌가?
'하층에서도 소환이 되나?'
【하층에선 소지한 아이템만 사용 가능합니다.】
"알았어. 이거 줘. 벽장!"
【18,000포인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양말 이후로 이런 거금은 처음 써 보지만, 참을 수 없었다.
【누적 포인트 7,000p.】
스스스스스스스.
홱!
옆을 돌아보니 벽에 장이 하나 더 생겨났다.
"오오오오!"
나는 그곳으로 뛰어가서 문을 열어 보았다. 나무로 된 평범한 장롱이다. 하지만 여기에 물건을 두면 언제든 꺼내쓸 수 있다는 거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가!
"해 보자!"
부랴부랴 활과 화살, 드링크와 생수도 몇 병 넣어서 문을 닫았다. 그리곤 절로 넘어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활! 소환!"
【해당 품목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용사의 빛나는 활!"
【용사의 빛나는 활을 소환합니다.】
"오오오오오오!"
내 앞으로 활이 생겨났다.
고블린과 싸웠을 때 총이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빛이 빚어낸 활이 거짓말처럼 내 손아귀에 잡혔다.
"이건 진짜 쩐다…."
그런데 마냥 즐기기엔 경고 메시지가 섬뜩했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1시간 2분 남았습니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젠장!"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을 다 장롱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돈뭉치 사이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투욱 떨어졌다.
"…이게 뭐지?"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아… 민증이구나."
김유선.
사진은 그 여자와 전혀 달랐지만, 이름과 주소가 나와 있었다.
"…."
일단 주민 등록증도 장롱 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조만간 체류 시간을 더 얻어야겠어.'
그건 곧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거란 뜻이었다.
'서브 미션도 완료해야 하고.'
모든 미션이 끝나야 중급 필라테스가 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긴 하루였어. 그치?"
품에 안은 범이에게 말을 하며 건물을 나가는데, 움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찰?'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로에 경찰차가 멈춰 서더니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내렸다.
-CCTV부터 확보해!
저들이 왜 왔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을 움츠리고 범이의 머리를 가방으로 꾸욱 누르며 지하철로 향했다.
'그 여자를 찾아온 거야.'
그녀가 서큐버스라는 괴물인 걸 저들은 꿈에도 모를 거다. 내가 설명해 봐도 미치광이 취급받을 게 분명했다.
'날 보진 못했겠지? 은신 물약을 썼으니까 가방도 보이지 않았을 거고.'
지하철에 탔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빈자리가 있었다.
범이가 든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스르륵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