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커스텀은 외형을 바꾼다.
하지만 저건 내 신의 한 수.
족발을 가장한 5,000포인트짜리 맹수였다.
"…?"
유선도 놀랐는지 뒤를 돌아봤는데, 이미 그사이에 범이가 그녀의 가슴팍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콰직!
"…아아아악!"
목덜미를 물린 그녀가 바닥으로 데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발길질에 테이블이 주르륵 밀렸고, 술병들이 쓰려졌다.
"하아… 하아… 하악!"
나도 몸을 일으키며 정신을 차렸다. 뿌옇던 정신이 맑아지며 오한이 밀려왔다. 더 늦었다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콰득, 콰드드득!
범이는 유선의 목을 물고 사정없이 대가리를 흔들어 재꼈다. 크기는 작아졌어도 파괴력만큼은 그대로였고, 그게 커스텀의 무서운 점이었다. 이래서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거다.
"아으윽… 아흐으으윽…."
버둥거리던 유선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너… 진짜 괴물이구나."
나는 유선의 힘을 뼈저리게 겪어 봤다. 하지만 그런 유선도 범이에게 급소를 공격당하니 오래 버티지도 못했다.
갸우웅?
범이가 유선의 가슴에 앉아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유선의 목덜미는 절반쯤 사라졌다. 저 귀여운 주둥이가 먹어 치운 거다.
"…우엑."
고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저걸 먹다니. 당분간 저 녀석을 품에 안고 다니다간 트라우마에 시달리겠다.
【서큐버스를 사냥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미션을 완수했습니다!】
【8,00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재능마켓에서 '특별한' 보상을 수령하세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특별한 보상이고 뭐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까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도민준. 레벨 6. 사냥꾼. 체력 1, 지력 1, 순발력 1, 근력 1….】
메시지는 계속 울렸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가지고 왔던 칼을 품에 숨기며 옆에 축 늘어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멍하니 앉아 있는 아저씨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죽은 것도 아닌데 초점이 없었다.
"가자!"
나는 주머니에서 드링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곤 녀석과 반씩 나눠 마셨다.
【은신 효과가 발동합니다. 지속 시간 15분.】
무려 1,000포인트짜리 드링크다. 혹시 몰라서 피 같은 포인트로 사 둔 건데, 쓸 때가 됐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었다.
아까 들어오며 길을 봐 뒀기에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됐어. 끝났어.'
은신이 풀릴 때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혹시 몰라서 나는 지하철 대신 강남역으로 뛰어서 이동했다. 간혹 이정표를 잘못 보고 빙 돌기도 했는데, 그게 차라리 더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였습니다.】
터엉!
문이 닫히자 겨우 안심이 됐다. 하층에서 사냥할 땐 그곳이 현실이 아니란 생각에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키나와도 외국이라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계속해서 뭐가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범이가 품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저쪽에 누워 길게 기지개를 켜곤 이내 잠을 청했다.
"넌 참… 태평하다…."
나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안쪽으로 가서 벽에 기대자 주르륵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결과적으론 범이가 해냈지만, 어쨌든 미션은 성공했고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을 잡았다. 그녀가 뭘 어떻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재능마켓이 살인귀를 양성하는 곳은 아닐 거란 믿음이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저쪽 진열장을 보았다.
'은신 물약'이 솔드아웃이라는 표시가 있고, 입고 대기 시간이 59분 남아 있다. 어제 이맘때 샀으니 24시간마다 하나씩 충전되는 거다. 이제까지 포인트로 저런 값비싼 드링크를 많이 사 본 적이 없어서 어제 알았다. 물건이 매진될 수도 있다는 걸.
그 옆엔 같이 샀던 '순발력 증가'와 '체력 증가' 드링크에도 마찬가지로 매진 표시가 있었는데, 어제 저것들을 사느라 3,700포인트나 소모했다. 돌이켜 보면 저것들을 다 먹었어도 그 여자의 힘은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도 물약은 수시로 사서 저장해 둬야 한다는 걸 배웠지.'
애써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미션도 완료했는데 계속 처져 있을 순 없었다.
"특별한 보상을 수령하라고 했는데…."
어디 있다는 걸까?
진열장을 보았지만, '카드'라든지 하는 것들은 없었다.
그런데 옷장이 끼이익 열렸다.
"아."
붙박이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열린 문 안엔 하나의 카드와 반짝이는 돌이 있었다.
보자마자 돌은 알겠다.
아이템이 저런 식으로 나타나니까.
돌부터 주워 들었다.
【펫 전용 커스텀(레어)을 획득했습니다.】
"어?"
【사용자의 이미지를 불러옵니다.】
【길들인 펫에 해당 커스텀을 할 수 있습니다.】
홀로그램처럼 내 앞으로 떠오른 몇 가지 이미지에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펫 전용이라면 저기 졸고 있는 범이 거란 얘기 아닌가?
"…이게 뭔데?"
【해당 커스텀(레어)은 원할 때 언제든 불러올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 커스텀과 중복 사용도 가능합니다.】
"헐… 대박."
내 눈앞에 자전거가 보였다.
내가 신문 배달할 때 쓰던 그거 말이다. 옆으론 오토바이가 보였다. 그런데 저건 이 시대의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내가 마흔 살 때 타던 미래의 배달용 전기 오토바이다.
"고르라고?"
【커스텀하시겠습니까?】
"하긴 한다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머리에 스친 건 저 녀석을 타고 다닐 수 있겠단 거였다. 잠깐이지만 '저쪽'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이왕이면 오토바이로…."
좀 더 빠르지 않을까?
【해당 커스텀(레어)은 추가 효과가 없습니다. 펫의 고유 능력으로 발현됩니다.】
"그래도 오토바이로 할래."
그립다고 해야 하나? 근 1년을 먹을 거 안 먹고, 살 거 안 사면서 모은 돈으로 장만했던 오토바이였다. 따지고 보면 저 녀석도 나랑 같이 싱크홀에 빠지지 않았나?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반갑기까지 하다.
【펫에 커스텀이 부여되었습니다. 이제 원할 때 이미지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단, 펫이 사망할 경우 커스텀도 소멸합니다.】
졸던 범이의 몸에서 빛이 번쩍 났다.
갸웅-?
펄떡 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뭐가 어떻게 된다는…."
【커스텀 변형하시겠습니까?】
"어, 그래."
그 순간이었다.
후욱!
바람이 부는 것 같더니 범이가 오토바이로 변했다. 몇십 년 후의 모델이라서일까? 미래 디자인의 오토바이는 멋있기까지 했다.
갸우우웅?
그런데 혼자 움직이기도 한다.
갸우우우웅?
울기도 한다.
'하하, 그래도 앞으론 택시 잡아타고 다닐 일은 없겠는데?'
겉만 보고 속으면 안 된다는 진리를 또 한 번 느끼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쿠웅!
오토바이가 옆으로 넘어졌다.
그르렁, 그르르르렁.
그리곤 몇 번 뒤척이는가 싶더니 잔다.
"…."
나나 저 녀석이나 당분간 적응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몸을 돌려서 붙박이장으로 갔다.
이제 두 번째 아이템을 확인하자.
"이건 뭐지…."
스킬 카드는 아니었다.
그보단 좀 더 익숙하고 평범한 물건이었다.
"어어…?"
손에 들고 뒤쪽을 보니 숫자가 쓰여 있었다.
"1102?"
브라칸 빌딩 도어록의 카드키였다.
.
.
.
강남 경찰서 강력2팀 장형욱 팀장은 심각한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우리 관할에서…."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었다. 유명 인사도 자주 들락거리는 강남 최고급 술집에서 터진 엽기적 살인이었다.
"끔찍하군."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지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약한 냄새는 가시질 않았다.
그가 조우진 형사에게 물었다.
"무슨 약을 썼대?"
그게 아니라면 이런 훼손을 일어날 수 없었다. 사망 추정 시각은 고작 2시간 안쪽이었다.
"국과수에 넘겨 봐야 알 것 같답니다. 다들 이런 건 처음 보지 않습니까?"
"그렇지. 처음이지. 용의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은 돌아왔고?"
"네."
이 룸엔 유력한 용의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엔 무리가 있다. 일단 웨이터의 증언에 따르면 여기엔 용의자 말고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19번 방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피해자 신원은 나왔어?"
"그게… 모른답니다."
"하? 몰라? 그걸 말이라고 해?"
"워낙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아가씨들이 많답니다. 가출했거나 남편 몰래 뛰는 애들도 있고요. 유선이란 이름 외엔 나온 게 없습니다."
"나이는?"
"20대 초랍니다. 믿기진 않으시겠지만…."
반장도 머리를 흔들었다.
시체는 말라비틀어져서 80도 훌쩍 넘은 노파 같았다. 목덜미를 물어뜯겨서 끔찍한 모습이었고,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는데 안구와 이빨은 공포 영화에 나오는 귀신 같았다.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여자가 죽은 지 고작 2시간도 안 됐다는 거다.
-팀장님!
밖에서 다른 형사가 급히 달려오며 말했다.
"택시 수배됐답니다! 강남역 5번 출구랍니다!"
"오케이! 여긴 계속 폐쇄하고 장부 내놓으라고 해! 안 내놓으면 무기한 폐쇄야!"
물론 말만 그렇게 한 거다.
이 가게 매출이 하루 얼마던가. 곧 위에서 압박이 내려올 테고, 이내 풀릴 거다. 하지만 장부라도 뒤지지 않으면 CCTV도 없는 상태에서 범인을 특정하기란 불가능했기에 그는 엄포를 내며 밖을 향했다.
'그 남잔 범인이 아니야.'
첫 번째,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입가나 옷, 손톱 같은 것에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여자의 목이 저렇게 뜯겨 나갔는데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그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었고, 약에 취한 건 아니었기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이 나가 버린 거다.
"빨리 가지!"
"네!"
차에 오르자마자 강남역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은 넘긴 상태라 막히진 않았다.
"팀장님."
조우진 형사가 휴대폰으로 뭘 보더니 말했다.
"유선이란 피해자의 최근 매상입니다. 보시죠."
"하… 아주 열심히 일하던 친구였네? 6개월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만근이야?"
"가게 최고 에이스였답니다. 피해자를 보기 위해서 한 달씩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고 하고요."
아까 그 노파 모습을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체로 뭐에 홀렸나? 아니지. 내가 홀렸을지도 몰라.'
생전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체 때문에 선입견이 생겼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했다.
"여깁니다!"
차가 멈췄다.
팀장은 차에서 내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강남에 흔히 있는 대형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CCTV부터 확보하고, 피해자가 어디 사는지 확인해."
"네!"
그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경찰 밥 먹은 지 22년이었지만, 아까 그런 시체는 처음 봤다. 그의 경험과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사건,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신종 마약 사건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게 너무도 많았다. 요즘 유행하는 펜타닐 때문에 급사한 사람도 저렇게까진 안 된다.
'뭐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한 대의 담배가 모두 타들어 갔을 때, 그가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일 수 없었다. 건물에서 조우진 형사가 뛰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찾았어?"
"네! 1102호랍니다!"
1102호.
가면 뭔가 나오겠지란 생각에 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