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청담동으로 향하는 길.
나는 그동안의 계획을 정리했다.
오피스텔에서 유선을 상대할 순 없었다. 만약 엘리베이터와 복도, 출입구에 설치된 CCTV에 내 모습이 찍힌다면 나는 앞으로 재능마켓에 드나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헬스장?
아니, 그것도 곤란했다.
거긴 나를 아는 사람도 있고, 마찬가지로 CCTV가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노릴 수 있는 그녀의 동선 중.
한 곳뿐이었다.
"후우우…."
저 대로변 건물 지하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술집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랜만에 하려니까 살 떨리는데?"
가방에서 준비해 온 옷을 꺼냈다.
교복과 코트는 눈에 너무 띈다. 활도 쓸 수 없다. 오늘의 나는 최대한 거슬리지 않아야 했다.
이틀간 저길 지켜본 결과, 나는 단 하나의 루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는 그 짧은 순간을 노리기엔 극히 위험했고,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가기엔 내 외모가 지나치게 앳됐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
'침착하게.'
나는 늘 내가 해 오던 일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혹시 몰라서 몇 개의 드링크도 샀다.
'안에도 CCTV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변장이라고 하긴 했는데,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조심해야 돼.'
후….
긴장은 되지만 그래도 몇 년이나 해 본 거라 어렵지는 않다. 나는 봉지로 싼 족발을 들고, 가게 정문으로 향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었다.
'문지기인가?'
계단 아래엔 덩치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나를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가 물었다.
"어디?"
"대기실요."
"가 봐."
머리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잠입에 성공!
전직의 경험이 이렇게 또 도움이 된다.
'유선은 어디 있지?'
이전의 삶에서도 술집 배달이 꽤 많았었다. 이런 규모는 처음 봤지만, 대기실에서 종종 음식을 시켜 먹는 걸 알고 있었다.
지하는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양쪽으로 가득한 방과 그런 몇 개의 방 밖에서 대기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뭐야, 이거? 매점인가?'
잘못 온 것 같다.
골목 끝엔 식당 같은 게 있었다.
'하, 무슨 가게 안에 이런 게 다 있냐.'
몇 번이나 건장한 남자를 마주쳤지만, 그들은 나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흔한 배달부로 여기는 거다.
'유선은 어디 있지?'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혹여 바깥으로 이동이라도 했다간 낭패다.
나는 반대편으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또 갈림길이었다.
이번엔 왼쪽으로 가 본다.
'아, 저기가 대기실인가?'
열린 문 안쪽으로 여자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그 숫자가 얼핏 봐도 오십 명은 넘었다. 이미 룸 안에 들어간 여자들도 많을 텐데 정말이지 엄청난 규모였다.
'별천지구나.'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는 여자들 사이엔 유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는 여자도 있었다.
'여긴 없어.'
발걸음이 빨라졌다.
언제까지고 계속 이 안을 돌아다닐 순 없다.
나는 대기실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갔다. 아까완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 보였다.
"…."
-언제 단속 나온다고?
-토요일쯤이라던데?
-하, 개새끼들. 또 얼마를 받아 가려고 그러는 건데?
-선거철이잖아.
덩치 큰 남자들이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의 엄청나게 큰 보드 판에 룸 번호와 아가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종의 현황판이었다.
-42번 예약입니다! 15분 후 도착입니다!
-오케이! 초객이야?
-초객은 아닌데 지명은 없습니다!
-화란이 애들부터 초이스 대기시켜!
-네엡!
웨이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나 정신없던지 내겐 눈길조차 안 준다.
그사이 내 눈이 빠르게 돌았다.
현황판엔 상무나 실장 이름이 적힌 곳도 있었고, 아가씨 이름인 것도 있었다.
'유선! 19번 방!'
운이 좋았다.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소파의 덩치들이 돌아보기 전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CCTV가 없어. 어디 숨겨져 있는 건가? 아니면 원래 안쪽엔 없는 건가?'
모르겠다. 이곳도 마냥 합법적인 곳은 아닐 게 분명하니까 켕기는 게 있다면 대놓고 카메라를 달아 두진 않았을 거다. 드나드는 손님도 불편해할 거고.
'잘됐어.'
나는 방 번호를 확인하면서 빠르게 걸었다. 몇 개의 방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그게 크진 않다. 방음이 잘된다는 뜻일 거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유선의 얼굴을 떠올렸다.
며칠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봤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그저 강남에 사는 젊고 예쁜 여자였다. 하지만 수호자의 안경을 쓰고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창백하고 무서운 얼굴. 시체 같은 피부와 퀭한 눈은 구울과 비슷했다.
가끔 드러나는 누런 이빨?
으으…. 당장 사람들 살점을 물어뜯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투욱.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야, 조심해, 새끼야."
"…죄송합니다."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인상을 쓰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후….
심장이 쫄깃해진다는 기분이 딱 이럴 거다. 내가 배달 일을 꽤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자연스럽게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9번 방 앞까지 왔다.
'설마 안에서 잠겨 있진 않겠지?'
만약 이 문이 잠겼다면 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다음을 기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아간다!'
다행히 문고리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안쪽을 살폈다. 오른쪽엔 화장실이, 왼쪽엔 옷걸이가 있었고, 상석에 남자와 여자가 보였다.
남자는 축 늘어져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몸에 올라타서 입을 맞추고 있는 꽤 선정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았다.
철컥.
문을 닫았다.
'웨이터로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다 무시할 만큼 더 중요한 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하네.'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내 눈에 띄었다. 실제로 그녀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롯이 그녀의 '몸'은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여자가 올라타 있는데도 남자는 정신 줄을 놓은 것처럼 헤벌쭉 누워 있었다. 하긴, 모르는 게 약이다.
스윽.
품에 숨겨온 칼을 꺼냈다.
활을 들여올 수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가져왔다.
'제기랄, 발이 안 떨어져.'
육식 토끼도 잡아 보고 매와도 싸워 봤지만, 사람 형태의 괴물에는 언제나 거부감이 있었다.
테이블 근처까지 가서 조심히 족발 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때 남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키스하던 유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커지는 동공은 내 손의 칼을 발견했는데,
"…?"
그녀는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대신 거짓말처럼 훅! 뛰어올랐다.
처억.
자리를 잡은 그녀가 소파 위 공간에 쪼그려 앉아 거미처럼 다릴 벌리곤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뭐야?"
그리곤 스스스슷.
그녀의 손톱이 매끄럽게 자라났다.
'도망갈 틈을 줘선 안 돼.'
문을 등지고 서서 자세를 낮췄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누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나는 경계하며 물었다.
"저 사람한테 뭘 한 거지?"
남자는 영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이 문을 향했다.
"넌 뭔데? 너,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뒤집혔다.
"만난 적도 없는 것 같고."
기억이라도 더듬나?
점점 흉측해지는 그녈 보며 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몇 명이나 죽였지?"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게 중요해?"
"적어도 내겐."
"그러는 너는 몇 명이나 죽였는데?"
그녀의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비틀렸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노려보는 눈은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그냥 보내 주지 않을 거지?"
그녀의 말에 나는 나를 설득하듯 말했다.
"물론."
"그럼 죽어!"
그녀가 메뚜기처럼 뛰어올라 테이블 위로 착지하더니 다시 도약하면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손톱을 피하려고 휘두른 칼이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간신히 옆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며 두 번째 공격도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빨라!'
소파로 밀쳐진 내 위로 뛴 유선은 순식간에 방위를 차단하면서 허벅지로 내 하체를 눌렀다. 두 손으론 내 팔을 잡았는데 힘이 어찌나 강한지 황당할 정도다.
'이, 이 정도라고?'
근력에 체력에 순발력에 각종 운동까지 해 오면서 나도 꽤 자신이 있었다. 그 김우태한테도 한 방에 팔씨름을 이겨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알았다. 그건 사람 기준이었다. 이들은 괴물이다. 내 근력+1 따윈 저 가녀린 팔조차 떨치지 못했다.
"킥킥…. 잘생겼네?"
그녀의 머리칼이 아래로 떨어지며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제기랄. 무슨 놈의 힘이….'
완벽한 오판이었다. 비쩍 마르고 여성 형태를 하고 있어서 나도 속았던 거다. 이전의 좀비나 구울을 경험했던 것이 오히려 판단을 흐렸을 수도 있다. 분명 유선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위 개체였으며, 여기서 오랫동안 적응한 생존자였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었다.
"…?"
"…!"
웨이터였다. 그는 얼음통을 들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도와줘!'라고 소리치면 좀 그런가? 나는 저들에겐 불청객이잖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들어오지도 않고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내가 소파에 누워 있고 유선이 그런 내 위에 올라타 앉았으니 오해한 것 같다.
'이런 염병….'
"킥킥! 어쩌나? 이제 올 사람도 없는데? 쟤들 30분에 한 번씩 돌거든. 그리고 그 30분이면 너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하아….
입김이 후욱 불어닥쳤다.
"오랜만에 포식해 볼까? 맛있겠네."
그녀의 입술이 점점 다가왔다. 입을 꾹 다물고 저항하면서 온몸에 힘을 줬지만, 태산이 내려앉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참지 마. 그냥 받아들여.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녀의 시커먼 혀가 날름거릴 때, 등줄기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제기랄…. 드링크는 써 보지도 못했는데….'
혹시 몰라 사 온 것들이 다 주머니에 있었다. 그런데 손을 움직일 수가 없다.
"저, 저리 가!"
힘 증폭?
아까 진즉에 썼다.
양말의 주력+1?
여길 들어오자마자 쓰고 도망쳤어야 했다. 나 같은 원거리 캐릭터가 애초에 칼 한 자루 딸랑 들고 덤비는 게 아니었다.
"스으으으읍. 하아아아아."
그녀의 숨결에서 달콤한 향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
온몸의 힘이 통째로 그녀에게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리곤 이어 몸이 저항을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이게 먹잇감을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독이란 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상석의 남자도 이걸 맛보고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스으으으으읍!"
닿을락 말락 한 입술 사이로 막대한 에너지가 내게서 나와 그녀에게 흘러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곁에서 보면 참으로 에로틱하겠지만, 나는 안경 너머로 무시무시한 그녀의 진면목을 보고 있었으니,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40년을 모솔로 살다가 룸빵에서 아가씨한테 죽는구나….'
이렇게 세상 억울할 수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그렇게 좋던 머리조차 굴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도 숨겨 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부스럭.
족발이 담긴 봉지가 꿈틀거렸다. 유선도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는데, 그게 그녀의 가장 큰 실수였다.
쿠앙-!
봉지가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