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건물 밖으로 나온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는데, 다행히 택시나 지하철을 타진 않았다.
그녀가 뱅뱅사거리 방향으로 이동했다.
'어딜 가는 거지…?'
혹여 놓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서 긴장하며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한 건물 지하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짐?'
나한텐 헬스장이란 용어가 더 편한 장소.
'하층민이 운동을?'
사람도 아니면서 별걸 다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성형외과는 못 들어갔지만, 여기라면 안쪽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경쾌한 음악이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헬스장이 이렇게 고급스러워?'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있던 이런 곳을 나만 모르고 살았는지 이곳은 꽤나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근데, 어디로 갔지?'
그녀가 어디 있을지 살피며 고개를 쭈욱 빼곤 둘러보는데, 데스크에 있던 사람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우린 서로를 보며 놀랐다.
"어? 야! 너! 민준이!"
"우… 태 형?"
"하하! 왔구나!"
민소매를 입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며 반긴 사람은 김우태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학교는 어떻게 하고 이 시간에 왔냐?"
"아… 그… 개교기념일이에요, 오늘."
"근데 왜 교복을 입고 있는데? 너, 땡땡이쳤지?"
"윽…."
"하하! 네 나이 땐 다 그러고 버티는 거지. 어쨌든 잘 왔다. 검색하니까 바로 나오지?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내가 여기 없으면 어쩌려고."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이게 아닌데…. 차라리 잘됐나?'
안쪽을 보며 그녀의 행방을 찾았다.
내 속도 모르고 김우태가 말했다.
"체육관으로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아, 그냥 둘러보려고요. 사실 이런 델 다닐 형편도 아니고…."
"너는 싸게 해 준다니까. 형 못 믿냐?"
"싸게 얼만데요?"
"삼 개월 하면… 특별히 40에! 육 개월이면 60!"
"허얼… 뭐가 그렇게 비싸요? 우리 동넨 한 달에 3만 원이라던데."
"야, 거기랑 같냐? 여기 기구들이 얼마짜린데! 그리고 너 500만 원 땄잖아!"
"어휴, 무리예요, 무리. 고딩이 무슨…."
그러면서 저쪽을 봤는데, 그녀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진짜 운동하러 온 건가?'
괴물이 이렇게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간다니 갈수록 묘하다. 게다가 어제 그렇게 늦게까지 술 취한 사람과 돌아와선 이렇게 아침 일찍 바른 생활을 한다고?
"흐흐흐. 너 이 새끼…."
"네?"
"여자 보러 왔구만?"
"아, 아니거든요!"
"하하! 네 나이 땐 다 그런 거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김우태가 내 등을 손으로 쳤다.
"어후… 맘대로 생각하세요."
"하하! 어쨌든 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가라."
때마침 걸려온 상담 전화에 김우태는 내게 손짓했다. 먼저 돌아보란 뜻이었다.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그녀는 러닝 머신에서 뛰고 있었는데, 남자들 대부분이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음….'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운동하는 곳이라 그런지 대부분 극도로 가벼운 차림.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트레이닝복이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남자들은 그녀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의자에 앉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내 옆에 김우태가 앉았다.
"예쁘지?"
"네?"
"저 애."
그녀는 두 달 전에 등록했다고 한다. 매일 이 시간에 나와서 운동한다고 하는데, 그녀를 보기 위해서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오는 얼간이들이 이렇게 많단다.
"봐, 다들 운동도 제대로 안 해. 어떻게든 번호 한번 따 보겠다는 거지."
김우태 덕분에 그녀에 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성은 몰라, 회원 명부에 유선이라고만 써 둬서. 아마 근처 업소 아가씨 아닐까? 예명 많이 쓰니까."
유선….
김우태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 너도 그랬잖아. 여기, 싼 편은 아니거든. 근데 평일 이 시간에 젊은 애가 운동한다? 평범한 직업은 아니란 거지. 연예인이면 내가 모를 리 없을 거고."
김우태는 씁쓸하게 웃으며 당부했다.
"행여나 저런 애들한테 잘못 걸리면 공사 제대로 당한다. 꿈도 꾸지 마. 뭐, 너한테 작업 칠 일은 절대 없겠지만."
.
.
.
유선의 일과는 매우 혹독한 편이었다. 처음 이 세계로 넘어와서 어떤 여자의 몸을 차지했을 때는 마냥 신나고 좋았지만, 점차 기억이 흘러들어오면서 며칠이 지나기 전에 깨달았다. 이곳도 그렇게 녹록한 세상이 아니라는 걸.
그나마 다행히 그녀는 남자의 정기를 흡수할 때마다 과거의 힘을 조금씩 되찾았다. 그녀의 힘은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힘이 있었고, 그녀에게는 겉모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혹 능력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적응해야 했고, 더 안전해지려면 많은 돈도 필요했다. 또한, 감정을 억누르고 본능을 참아야 했다.
"…."
헬스장을 나온 그녀가 스타벅스로 향했다. 하층에서 생식을 하던 그녀였기에 이 세계 음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지만, 커피와 샌드위치를 앞에 놓고 앉아 있으면 제법 쏠쏠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편한 시간에 연락 한번 부탁드립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건너편 남자가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네,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꼭입니다!"
기쁜 듯 파이팅 포즈를 하며 돌아가는 남자를 보며 유선이 웃으며 초승달처럼 눈을 만들었다. 명함을 보니까 인근 대기업에 다니는 것 같다.
'요즘 더 잘 꼬이는데? 힘이 강해지고 있어서 그렇겠지?'
하층에서 그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버러지나 다름없었다. '퀸'에 비하면 그녀의 힘은 발톱의 때만도 못한 것이었고,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언제나 목을 움츠리고 살아야 했었다.
그런데 여긴 어떤가?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 있기만 해도 마치 퀸이 된 것처럼 모든 남자들이 떠받들었다.
'오십 명만 흡수하면 나도 퀸처럼 될 수 있을 거야.'
하층에선 안 돼도 여기선 퀸과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가리라. 힘의 얘기가 아니다. 저쪽에서 100이라면 여기선 1만 있어도 100의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오십 명이 죽어야 한다는 게 문제인데….'
슬슬 장소를 물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거사를 치르면 신분을 다른 거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얼굴도 더 아름답게 바뀔 거니까 경찰은 따돌릴 수 있을 것이고 남자들이 돈다발도 가져오리라.
'이런 점은 귀찮단 말이지.'
하층에선 누가 죽어 나가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여긴 죽음에 관해서 지나치게 까다롭다.
커피를 다 마신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거사만 마치면 좁아터진 오피스텔에서 탈출할 거다. 그리곤 여왕처럼 살면서 온 세상 남자들을 발아래 둘 것이다.
'더 강한 남자를 찾아야 해.'
대한민국에서 힘은 곧 돈과 권력이었다. 지금도 돈 있는 남자들을 부리고 있긴 하지만, 진짜 '재벌'이나 '권력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그녀는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이번엔 가방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술집이 밤에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 강남은 아니었다. 24시간 돌아가는 곳도 있고 룸이 100개가 넘는 곳도 있었다.
-유선! 오늘도 일찍 왔네?
청담동.
대기실로 향하며 그녀는 예쁘게 웃었다.
다른 애들은 가게에 오기 전에 숍도 가고 하지만 그녀는 수수하게 다녔다. 그저 홀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화장 조금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아름다웠다.
-와… 유선 언니는 진짜 예쁘다.
-어쩌면 저래? 관리도 안 받는 거 같은데.
-칫, 짜증 나.
그렇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
거울을 보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오른쪽 눈가에 금이 가 있었다.
'부서지고 있어. 빨리… 정기를 흡수해야 돼.'
그녀는 남자가 필요했다.
그녀는 수컷의 생명력을 먹고 살았는데, 특히 이곳으로 넘어온 뒤론 마음껏 포식을 할 수 없어서 문제였다.
정기가 없으면 이 껍데기를 유지할 수가 없다.
-83번 룸! 유선 지명이다!
상무의 말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네!"
그녀는 이미 가게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본래 예쁜 애들은 공주처럼 굴기도 하고 손님도 가리고 하는데, 유선은 달랐다.
벌컥!
"유선아!"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진하게 입을 맞췄다.
"스으으읍. 하아아아아."
남자의 눈이 조금씩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자신의 생기가 빨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흡수하는데, 남자들은 그렇게 당하고 가면 갈증을 느껴서 다시 찾아온다.
물론 그럴수록 유선은 감질났다.
'더 필요해, 더….'
갈라졌던 그녀의 눈가 피부가 사르륵 아물어 갔다.
.
.
.
그녀를 관찰한 지 4일째.
유선이란 여자는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스타벅스에서 브런치를 즐겼으며, 대낮부터 술집에 나가 일을 하곤 새벽녘에 남자랑 돌아왔다. 함께 온 남자들은 모두 오래 있지 않고 돌아갔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까지 알아낼 필욘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됐다.
"이제 몸은 괜찮고?"
"네."
오랜만에 학교에 왔다.
수시로 전활 걸어 둬서 선생님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중간고사 앞두고 무릴 해서 그런가 봐요."
"신문 배달은 그만뒀다고?"
"네. 몸이 못 버텨 줘서요."
"잘 생각했다. 그 시간에 잘 자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지."
선생님은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건 진심이었다.
내가 오늘 학교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여어, 인성아."
"앗! 도민준! 다 나았냐?"
"그래."
-아앗! 민준이다!
-민준아! 괜찮아?
교실에 가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유선을 미행하느라 며칠 결석했는데, 얘들은 내가 아파서 빠진 줄 안다.
'고마운 녀석들이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원이는 없었지만 이런 평화롭고 단조로운 하루를 눈에 새기고 싶었다.
학교를 마치곤 어머니 식당으로 향했다.
"좀 어때?"
"호호호! 아들, 왔어?"
어머니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효과 봤어?"
"말도 마! 오늘 점심에 아주 난리였다니까?"
어제 나는 어머니께 생수를 갖다줬다. 그걸로 일단 밥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는데, 알바하는 고깃집에서 얻어 온 비법이라며 어머니께 드렸다.
"확실히 강남에서 장사 잘되는 가게는 달라! 내가 먹어 봐도 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아까 어떤 학생은 밥을 네 그릇이나 비웠다니까? 호호호! 사장님께 꼭 고맙다고 안부 전해 드리고!"
"응."
그냥 맛만 있는 게 아닐 거다. 그 생수의 효과는 '회복'이다. 사람의 몸은 본능적으로 해로운 걸 피하고 이로운 걸 찾는다. 희석해야 해서 효과가 떨어진다지만 맛있게 한 끼 먹고 피로가 가시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근데, 엄마. 그거 꼭 아껴 써야 돼. 그게 고로쇠보다도 몇 배 귀한 거래."
"그럴 만해. 밥 냄새만 맡아도 손님이 지나가질 못할 것 같다니까? 호호!"
연신 흥에 겨워 말하는 어머니를 살포시 안았다.
"다녀올게."
"벌써 가려고?"
"응."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차 조심하고."
내가 조심할 건 차가 아니었지만,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